제52화
스르륵.
감겼던 이브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천천히 정신을 차린 이브.
밖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니 한나절 정도 잠들었던 듯했다.
‘오래 자서 그런가?’
생각보다 정신이 멀쩡했다.
‘마력 저장소도….’
온몸을 부술 듯이 두들기던 격통은 온데간데없었고, 마력을 운용하는 것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비록 마력 저장소의 등급이 다시 초록색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별로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력량이 엄청 늘었어.’
마력량이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비해 무려 20% 정도나 더 늘어났다.
마력 스탯 또한 이전에 비해 많이 올랐다.
‘이 정도면….’
다시금 파랑 등급이 되는 것도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석찬 오빠는…?’
석찬이 쓰러졌던 자리는 빈 지 오래. 주변을 살펴보자, 동굴 한구석에서 명상을 하는 석찬의 모습이 보였다.
‘깨셨구나.’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지척까지 다가갔건만 석찬은 좀처럼 눈을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나라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석찬의 맞은편에 앉은 이브.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동굴을 환하게 감쌌다.
* * *
석찬과 이브가 탈출에 성공한 이후. 20층 사냥꾼 길드 지부.
“젠장!”
콰앙!
포이그 레바돈의 포효에 집무실의 물건들이 부서져 나갔다.
“지, 진정하시죠. 지부장님.”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레바돈은 팔에 찼던 깁스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올킬러와 은발의 천사. 정말 제대로 당했다.
100년을 넘게 노력해서 지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헌데 서른 살도 안 된 애송이 두 명에게 죽을 뻔하다니. 심지어 은발의 천사는 잠시나마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선보였다.
비록 그게 무한정 사용할 수 없는 힘이라고 하더라도….
빠직.
“으아아아!”
쾅!
“이건 말도 안 돼.”
분한 표정을 짓던 레바돈. 그런 그의 표정이 일순간에 돌변했다.
‘잠시만,’
레바돈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비서를 바라보았다.
“너.”
“예, 예?”
“올킬러랑 은발의 천사 위치, 찾아낼 수 있겠나?”
그 물음에 비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분위기상 모른다고 한다면….
꿀꺽.
잠깐의 정적 후, 비서의 입이 열렸다.
“꼭, 꼭 찾아내겠습니다.”
“좋아. 시간은….”
레바돈은 몸에 칭칭 감긴 붕대를 바라보았다.
전문 힐러의 말에 따르면 몸 안의 독 때문에 치료 마법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차라리 자연적으로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녀석들을 찾아서 찢어발기고 싶건만,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는 마력 체질이 발목을 잡아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자신의 기본적인 회복력으로 볼 때, 한두 달에서 세 달 정도면 충분히 나을 만한 상처라고 판단되었다.
“넉넉하게 4달 주지. 그 안에 무조건 찾아내도록.”
“…예.”
“그래. 날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지.”
통보를 마친 레바돈이 집무실을 나섰다.
‘다음에 만날 때. 그때는 무조건.’
꽈득.
‘이 손으로 끝장내 주겠다, 올킬러.’
레바돈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비쳤다.
그 시각.
‘다음에 만날 때는 내 손으로 직접 결판을 낸다.’
석찬 또한 투기(鬪氣)를 내비치며 수련에 들어갔다.
* * *
약 4개월 후. 6층의 어느 한 외딴곳에 있는 동굴 안.
쿠구궁.
거대한 진동과 함께 동굴 벽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또 무너뜨리셨네.”
그 모습에 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무너진 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는 석찬이 동굴 파편에 깔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뭐 하시는데 또 그러고 계셔요.”
“하아, 하아. 미안.”
고개를 젖히자 이브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식사 준비 거의 다 됐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오세요.”
“그, 그래.”
식사 준비라는 말에 석찬의 몸이 살짝 떨렸지만, 다행히도 이브는 보지 못한 듯하였다.
‘이브는 다 좋은데….’
요리는 정말 못한단 말이지.
[인정하는 바다.]
라우르 또한 석찬의 생각에 동의했다.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만든 음식의 비주얼과 냄새, 그 음식을 먹는 석찬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음식의 맛이 얼마나 끔찍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식사에 대한 생각을 멀리하며, 석찬은 주먹 가득 흘러넘치는 강마력을 느꼈다.
‘어느 정도 성공인가….’
지난 4개월간. 마력 저장소의 돌파 외에도 많은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수련과 시도를 했고, 이제는 강마력도 10분 정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1분 남짓한 정도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후우….”
[이제 나름 쓸 만해졌네.]
‘그런가요?’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마라. 어디까지나 ‘나름’이다. 나름. 내 눈엔 넌 아직 애송….]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
[이 자식이….]
말을 끊지 않았더라면 20분 정도 자기 자랑을 했을 라우르였다.
‘그나저나….’
단전에 자리 잡고 있는 마력 저장소.
그것은 아직까지도 노란색에서 돌파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력량은 엄청 늘었다만….’
수련을 시작하기 전의 마력 스탯은 304.8, 그리고 지금의 마력 스탯은….
‘330’
‘이브는 마력 스탯이 350 언저리일 쯤에 돌파를 했다고 했지.’
자신 또한 그 스탯에 근접했으나 아직까지도 돌파의 기미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레바돈과의 싸움을 위해 필요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마력 저장소의 돌파인데, 제일 중요한 것을 아직 못 끝마치고 있다.
‘이대로는 완전히 승리를 장담….’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와중이었다.
불쑥.
[욘석아.]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라우르의 모습에 소리를 지를 뻔한 석찬이 입을 틀어막으며 이브의 눈치를 봤다.
‘놀랐잖아요, 뭐 하시는 거예요?’
[네놈이 하도 답답해 가지고 이런다.]
‘…….’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냐?]
‘어렵게 생각하다니요?’
[자, 생각해봐라. 비록 넌 그 지부장 놈한테 졌지만 나름 선전했었고, 승리 직전까지 갔었다. 맞지?]
‘그쵸.’
[자, 너는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다. 이것도 맞지?
‘몇 배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강해지긴 했죠.’
[그럼 답 나왔네. 다시 싸우면 네가 이겨.]
‘예?’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수련을 한 것처럼, 적 또한 마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을 터. 게다가 층간 페널티나 전술 등까지 고려해 본다면 수많은 변수들이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라우르의 발언에 석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물론…이죠.’
[이 자식이?]
‘크흠,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죠.’
[그 지부장이라는 인간이 몇 년이나 살았을 것 같냐?]
‘그걸 갑자기 왜….’
[사냥꾼 길드라는 초대형 길드 지부의 지부장이다. 말단부터 시작했으면 최소 50~60년 이상 탑에서 살았단 소리다.]
‘50년,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내가 볼 때 그 정도 살았는데 아직도 그 경지면 그게 그 녀석의 한계야.]
‘한계요?’
[그래. 한계. 모든 인간은 본인의 잠재력이란 것이 있고, 그에 따른 한계가 존재한다. 너도 잘 알잖아?]
‘그쵸.’
잠재력이 높으면 한계도 더 늦게 찾아온다. 이것은 일반인들도 잘 아는 상식이다.
[여담이지만 탑은 이 잠재력을 수치화시켜 주지.]
‘잠재력….’
[잠재력 : 무한]
무한이라고 표기된 잠재력. 라우르의 설명에 처음보다 궁금증이 다소 해소됐다.
‘잠재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한계치가 높은 게 맞는 건가.’
[네 잠재력 수치가 정확히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녀석보단 높겠지.]
‘예. 그럴 겁니다.’
[그래. 그럼 답이 나왔지 않느냐. 다시 싸우면 네가 이겨. 조금 힘들진 몰라도 질 일은 거의 없을 거다.]
‘잠시만요. 그 말씀은 질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이길 확률이 더 높으니까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흠….’
고민이 됐다.
가급적이면 안전하고 확실한 싸움을 추구하는 석찬의 입장에서 먼저 쳐들어가는데 완벽한 확신이 없는 것은 살짝 거슬리긴 했다.
‘그래도….’
이런 대담함 정도는 있어야 성장도 하는 법.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잘 생각했다. 이래야 이 투신 라우르의 화신이지.]
‘그보다….’
석찬의 귀에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이브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흐흠~ 흠~”
‘라우르, 죄송한데 오늘 메뉴가 뭔지 조금 봐주실 수 있으신지….’
[…한번 보고 오마.]
잠시 후. 딱딱한 표정으로 나타나는 라우르.
‘뭡니까. 불안하게.’
[딱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들어라.]
꿀꺽.
[덜 익은 것에 가까운 레어 자칼 구이. 소금이 한 자루는 들어간 것 같은 냄새의 버섯 수프. 그리고….]
‘그리고….’
[‘특제 소스’를 곁들인 빵.]
마지막 메뉴에 석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다시 말해줄까? 특제 소스와 같이 먹는 빵이라고.]
‘…….’
석찬의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다른 메뉴들은 전부 먹을 수 있다.
원래 고기는 생으로도 먹던 식습관은 지구 시절에도 있었으며, 짜게 먹는 것도 이제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참이다.
‘하지만….’
이브표 특제 소스. 그것만큼은 정말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베이스는 짠맛이다. 헌데 짠맛 말고도 단맛, 쓴맛, 신맛, 등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맛들이 그 소스에 담겨 있었다.
처음 2층에서 멋모르고 한 숟갈 떠먹었을 때 입 안을 가득 감싸는 엄청난(?) 맛에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으니….
‘그냥 내가 요리하면 안 되나.’
이 생각을 백 번 이상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브는 항상 석찬에게 괜찮다며 몇 번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상 자신이 요리를 하곤 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괜찮다… 빵이잖아? 소스는 굳이 안 먹어도….’
그의 생각을 읽은 라우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생각했을 때 저 녀석이 그걸 허락할 것 같냐?]
‘…….’
라우르의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숙연해지는 분위기.
“석찬 오빠! 준비 다 됐어요, 빨리 오세요!”
‘…….’
이브의 외침이 사형 선고로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
‘뭔가요?’
씨익.
라우르의 입꼬리가 슥 말려 올라갔다.
[수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