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눈물의 재회를 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에브릭의 품에서 빠져나온 진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풉.”
“웃지 마라.”
고개를 숙여 한참을 들지 못하는 진현.
그 너머에서는 이브가 에브릭의 현재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엘릭서의 효과는 엄청났다.
그래도 죽을 위기에서 막 벗어난 터라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을 줄 알았으나.
‘모든 게 정상이야.’
아니, 정상이라는 말로는 모자랐다. 에브릭의 몸 상태는 완벽했다.
오히려 간간이 가게에서 봤을 때보다 몇 배는 좋아 보였다.
‘엘릭서의 위력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다시금 전설의 비약의 효과를 되새긴 이브는 눈물로 젖은 에브릭의 옷에 클린 마법을 걸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석찬이 다가왔다.
“이브, 에브릭 씨는 괜찮아?”
“괜찮으세요. 오히려 너무 멀쩡하셔서 탈이 날 정도예요.”
“그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찬.
‘에브릭 씨는 무사하고, 그럼 이제….’
그의 시선은 천천히 벽 앞에 쓰러진 올레드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은.’
석찬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죽었나?”
“확인해 보면 되죠.”
어느새 다가온 이브가 올레드의 몸을 살폈다.
“죽었네요.”
맥을 짚어본 이브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가 한 행동 때문일까?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딱히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석찬은 대충 그의 시신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공동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진현이 석찬의 등을 두드렸다.
“석찬아, 저게 뭐냐?”
“뭔데? 어?”
뒤를 돌아본 석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공동의 중앙에 거대한 빛의 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저건?”
조심스럽게 빛의 구를 향해 다가선 석찬.
번쩍!
지척에 다가선 순간, 빛의 구의 중심에서부터 가공할 만한 밝기의 빛이 터져 나왔다.
“크윽, 모두 눈 감아!”
잠시 후 빛이 사그라졌고, 석찬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빛의 구가 있던 자리에는 웬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저 노인은 대체 누구지?’
“할아버진 누구세요?”
그때, 진현이 노인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잠깐, 기다려!”
적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노인은 경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석찬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노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렇게 노인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석찬의 눈에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 노인, 몸이 반투명한데?’
그렇다. 반투명한 노인의 몸 너머로 반대쪽 공동이 훤히 비쳤다.
그 말에 진현이 몸을 벌벌 떨었다.
“뭐, 뭐야. 귀신이야?”
‘맞다, 저놈 귀신 무서워했지.’
헌데 옆의 이브도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설마 이브도…?’
아마도 맞는 것 같았다.
“휘유.”
작게 한숨을 내쉰 석찬은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노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저기요.”
그때, 노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휘이잉!
‘크윽, 뭐야?’
고작 눈을 떴을 뿐인데 엄청난 기운이 석찬의 전신을 감쌌다.
‘뭐야, 이 노인?’
그때,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인가?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든 녀석이?]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것만 같은 음성.
노인의 물음에 석찬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뭐야, 이 압박감은.’
압박감이 얼마나 강했는지,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석찬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예.”
[흠, 정직한 녀석이군. 좋아.]
그 순간, 석찬을 짓누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컥! 헉, 헉.”
석찬은 숨을 고르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흰 백발이 무성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그 몸은 여느 젊은이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도대체 뭐 하는 양반이야?’
[내가 누구냐고?]
“제 생각을 읽으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노인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말을 이었다.
[나의 이름은 라우르, 전(前) 투신이다.]
“전 투신?”
[그래.]
석찬의 머리가 멍해졌다.
갑자기 신이라니?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조금 전의 기운 등을 봐서는 전혀 거짓 같지 않았다.
[믿지 못하는 표정이로군.]
“솔직히… 네, 믿기 어려운 얘기네요.”
[그럴 수도 있겠군.]
노인, 라우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를 보게.]
‘위?’
위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었던 흰색 바탕의 깨끗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을 왜…?”
[잠자코 보고 있게.]
순간, 라우르의 손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울이 하나 나타났다.
‘저건?’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마력 방울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미친, 저 정도면.’
살펴본 결과 그 양은 무려 석찬이 가진 마력의 총량을 능가했다.
‘고작 몇 초 만에… 엄청난 실력이다. 전 투신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거 참, 맞다니까. 사람 말 지지리도 안 믿네.]
“죄, 죄송합니다.”
[잘 보게.]
그의 손에서 떠나간 마력 방울이 천장을 향해 쏘아졌다.
스르륵-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마력 방울은 천장에 닿자, 그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흐, 흡수됐어?”
그 모습을 본 진현이 놀랍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파아앗-
곧이어, 천장에서 환한 빛이 일더니 흰 바탕에 푸른 빛의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헌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거대한 그림 같았다.
“이, 이건?”
[나의 화신과 추종자들이 새겨놓은 것이지.]
그림에는 우락부락한 풍모를 지닌 라우르로 추정되는 자, 그리고 그와 대적하고 있는 어떠한 ‘집단’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집단은 구름 위에 서 있었고, 라우르는 땅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저자들은….”
[가증스러운 신들이지.]
“가증스러운?”
[그래.]
라우르는 살기 어린 시선으로 다른 신들이 새겨진 곳을 바라보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건가?’
[그럼, 아주 큰 ‘악연’이지.]
“악연이요?”
라우르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석찬.
그때, 라우르가 손바닥을 내보였다.
[잠시만, 말하기 전에 조건이 있다네.]
“조건이요?”
[간단한 것일세. 밖으로 나가면 나와 만났단 사실을 함구하게나.]
그의 조건은 간단한 비밀 서약이었다. 석찬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딱!
라우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진현, 이브, 에브릭, 그리고 굴드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지금 뭐 하는…!”
[안심하게. 그저 잠든 것뿐이니. 이 대화는 밖으로 새면 안 되거든. 정 걱정된다면 한번 가서 확인해 보게나.]
라우르의 말대로 진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정신을 잃었을 뿐,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자, 이제 둘만 남았으니.]
딱!
허공에서 조그만 탁자와 고풍스러운 잔이 두 개 나타났다.
[천천히 들면서 얘기하지.]
잔 속에는 진한 향을 내는 음료가 담겨 있었다.
[이상한 건 넣지 않았으니 편하게 마시게나.]
자리에 앉은 석찬이 음료의 향을 맡아보았다.
흡사 커피와 비슷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후릅-
맛 또한 적당히 씁쓸한 것이, 완전 커피가 따로 없었다.
“그럼, 한번 말씀해 보시죠. 그 악연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그 전에 잠깐. 노란 등급의 마력 저장소… 자네 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나?]
“…제가 초월자의 길을 걷는 자인 걸 알고 계셨나요?”
[애초에 내 영혼의 조각이 초월자의 길을 걷는 자를 만나야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네.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커피를 들이켜는 라우르.
“잠시만요, 영혼의 조각이요?”
[아, 얘기를 안 해줬었나 보군.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건 내 영혼의 조각 중 일부라네.]
‘미친.’
영혼이 조각난 것도 놀랐지만, 석찬이 진짜 놀란 포인트는 그게 아니었다.
‘영혼이 조각되어 있다는 건, 힘도 조각난다는 소리. 근데도 저 정도의 강함이라고?’
경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석찬의 눈빛에 라우르가 피식 웃었다.
[자넨 천생 초월자인가 보군. 그런 점에 놀라다니 말이야, 하하!]
조금 남은 커피를 몽땅 마신 라우르가 잔을 세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이야기가 조금 샜군.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진지한 라우르의 말투에 석찬이 귀를 기울였다.
[수백 년도 더 된 일이네. 자네, 이 탑을 만든 게 신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게지?]
“예. 100층, 꼭대기까지 오르면 강한 힘과 함께 본래 행성으로 보내준다고….”
그 말에 라우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빠르게 표정을 고쳤다.
[그래, 반만 맞다고 쳐두지.]
“반만요?”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그러니까, 수백 년 전. 내가 신계에서 추방당하기 전의 이야기라네.]
‘신계!’
무언가 장황하면서도 중요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길고도 긴 얘기가 시작…되긴 개뿔.
“이, 이게 끝입니까?”
[그렇다네.]
라우르의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별거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신이 되었는지. 어떻게 수련해서 신계의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는지 정도였다.
사실상 자기 자랑이 90% 정도 되었다.
‘그나마 도움이 되는 거라고 하면은….’
바로 라우르가 신계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였다.
‘탑을 세우는 걸 반대했었다라.’
신계에서 독보적으로 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던 투신 라우르.
평소에도 다른 신들의 견제를 받던 그가 본격적으로 신들의 미움을 사게 된 계기.
바로 탑이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신들과는 다르게 라우르는 탑을 반대했고, 결국 신들에게 배척당해 결국 추방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십니까?”
[모르겠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 아마 다른 내 영혼의 파편들이 알고 있을 수도….]
‘다른 영혼의 파편이라.’
라우르는 추방당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영혼을 6개로 조각내어 탑 곳곳에 뿌렸다고 한다.
“다른 영혼 조각들은 몇 층 정도에…?”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네.]
“아닙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영혼 조각쯤이야 탑을 오르면서 천천히 찾으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제 동료들을 깨워도….”
[잠깐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네.]
“뭡니까.”
[크흠….]
헛기침을 하는 라우르.
‘뭐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곧이어.
[자네.]
라우르의 입에서-
[차기 투신이 되어볼 생각 없나?]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