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우선, 에브릭 씨는 괜찮아요.”
“진, 진짜요?”
분명히 좋아해야 할 소식. 하지만 이브의 얼굴은 아직 어두웠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네.”
이브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올레드에게 상처를 입기 전부터 이미 에브릭 씨의 몸은 한계였어요.”
아무리 육체적으로 치유를 했어도, 며칠간 이어진 구타와 굶주림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마저 회복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20분. 제 실력으로는 그 시간 동안 숨을 붙여놓는 게 전부예요.”
충격적인 말과 함께 진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안 돼, 안 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에브릭의 몸을 흔들었다.
그동안 1층에 계속 머물렀던 진현이니, 에브릭과의 유대도 석찬보다 더 깊었다.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 봐, 빨리.”
“진현 씨, 그러면 에브릭 씨 몸에 부담이 갈 수도….”
그때, 감겨 있던 에브릭의 눈이 조금씩 조금씩 떠지기 시작했다.
“아, 아저씨! 정신이 들어?”
“지, 진현이냐?”
“어. 괜찮아?”
“크윽….”
몸을 일으키려던 에브릭은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아저씨!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
“그, 그래.”
편안한 자세로 누운 에브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공격했던 녀석은, 죽은 거냐?”
그 말에 석찬은 벽 한쪽에 처박힌 올레드를 가리켰다.
“예, 진현이가 잘 처리해 주었어요.”
“진현이가 말이냐?”
“에?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니야. 난 석찬이가 다 죽여 놓은 거 막타만 쳤어.”
멋쩍게 웃는 진현.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에브릭의 가슴에 난 구멍을 보자마자 다시금 어두워졌다.
“아저씨….”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공동을 감쌌다.
퍽!
그때, 에브릭의 묵직한 손바닥이 진현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악! 왜 때려!”
“왜 그리 울상이냐, 이눔아.”
“그야….”
“뭐? 내가 곧 죽어서?”
“그야 당연한걸….”
“진현아.”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에브릭. 진현은 말을 하려다 멈추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나는 늙었고, 과거 고블린 킹과의 전투로 몸도 크게 다쳤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물론 탑 안이라서 몸은 더 이상 늙지 않지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법이다.”
‘뭐, 비록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에브릭은 고개를 돌려 붉게 충혈된 진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저런 눈빛을 봤을 때가 언제였던가? 10년? 20년?
어쨌든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진심 어린 슬픔의 눈빛이었다.
“내가 헛살지는 않은 모양이군.”
살며시 눈을 감는 에브릭.
“아, 아저씨!”
“시끄럽다 인석아. 나 아직 안 죽었으니까 소리 지르지 좀 마라.”
“아, 알았어.”
“에효, 귀청 떨어지겠네.”
“나, 난 그냥 걱정돼서….”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라.”
“…알았어.”
“…….”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와중, 석찬은 계속해서 고뇌하고 있었다.
‘정말 에브릭을 살릴 방법이 없을까?’
이 탑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난 소중한 사람인 에브릭.
비록 안 지는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말투는 돌아가신 관장님을 연상시켰다.
그 때문일까? 진현과 석찬은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고, 에브릭도 가끔씩 튕기기는 하지만 그들을 아들처럼 대해 주었었다.
‘한심하다.’
석찬은 처음으로 자신이 한심하고 나약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강한 힘을 가지면 뭐 하나.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할 힘, 차라리 없는 것만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석찬.”
어느새 눈을 뜬 에브릭이 질문을 던졌다.
“방금 말하지 않았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 순간이 온다네. 난 그게 지금일 뿐이지.”
에브릭은 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난 수개월 동안 자네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네.”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온화했던 에브릭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한계인, 것 같군.”
그의 말에 이브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브릭은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느끼며 정말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도 이제… 다시금 그녀를 볼 수 있겠군.’
수십 년 전 병환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간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마저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일까? 이제 꿈에 그리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일만 남았건만, 뭐라고 해야 할까?
‘슬픔? 미련?’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이 꽉 막힌 감정.
‘저 녀석들 때문인가….’
에브릭은 무거운 표정의 석찬, 이브, 그리고 진현을 바라보았다.
“석찬.”
“예.”
그는 자신이 본 사람들 중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층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전성기 시절의 자신조차 어찌해보지 못했던 영주 알렉산더에게 나름 선전을 하고 지금은 단신으로 무려 베테랑 사냥꾼, 심지어 지부장까지 쓰러트렸다.
“자넨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나가면 아마… 탑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네. 그리고….”
이브.
비록 알게 된 지는 꽤 됐지만, 본격적으로 친해진 시기는 석찬, 진현과 엇비슷했다.
그래도 항상 편하게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게다가 그녀는 무려 그 알렉산더 올가의 딸인 데다가 심성까지 고운 착한 아이였다.
현재는 석찬과 듀오로 활동하며 그 명성이 1층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상태.
‘석찬이 녀석이랑 참으로 잘 어울리는 아이야.’
“저 녀석이 저렇게 대단해 보여도 모자란 부분도 몇 군데 있는 놈이니까, 옆에서 잘 좀 도와주게나.”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브릭은 빨개져서 울기 직전인 진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울지 마라 욘석아.”
“…….”
진현. 석찬도 그렇긴 하지만 이 녀석은 정말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다.
‘요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구만.’
‘거기 자네! 혹시 탑에 처음 들어온 건가?’
‘오! 마침 잘됐다. 아저씨! 혹시 탑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어요?’
처음 보는 늙은이한테도 천진난만하게 말을 걸고 덤벙대는 듯하지만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해지는, 진현이 녀석은 그런 아이였다.
“석찬이나 이브만큼은 아니더라도, 너도 충분히 재능 있고, 강하다는 걸 잊지 말아라.”
“…….”
“영주님 밑에서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너도 언젠가는 저 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날이 올 게야,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도록 하거라.”
“알았, 어.”
“굴드도 거기 있나?”
그의 말에 줄곧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상인 굴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에브릭.”
“내 오랜 친우여, 이 아이들은 내 친자식과도 같은 녀석들이야. 내가 죽으면 자네가 나 대신 이 아이들을 좀 잘 챙겨주게나. 사체 가격도 조금 더 쳐주고, 밥도 맛있게 좀 해주고.”
그의 말에 굴드가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물론. 자네의 마지막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할 말도 다 했고, 이제야 편하게 갈 수 있겠구만.”
‘녀석들이 탑을 제패하는 모습도 보고는 싶지만….’
자신은 곧 죽을 몸.
더 이상의 미련은 한낱 늙은이의 욕심에 불과했다.
“안 돼….”
점점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에브릭.
‘정말 이대로 그를 보내주어야 하는 건가?’
석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탁 하고 스쳐 지나갔다.
“맞다!”
석찬은 빠르게 허리춤에 매어놓은 아공간 주머니를 펼쳐 들었다.
“여기 분명 어딘가….”
“뭘 찾으세요?”
“뭐 찾는 거야?”
이브와 진현이 궁금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지금은 그런 거 따위에 일일이 대답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빨리….”
여러 장비와 물약들을 뒤적이던 석찬. 그때 그의 손에 남다른 촉감을 지닌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이거다!”
그대로 그것을 집어 꺼내는 석찬.
그가 잡은 것은 보라색 액체가 들어 있는 어떤 병이었다.
“저건…?”
그것을 본 진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게 뭔데요?”
“엘릭서.”
그것은 바로 0층 시험의 보상인 축복받은 랜덤 박스에서 나온 보상, 엘릭서였다.
[엘릭서]
[등급 : 알 수 없음]
[효과 : 어떤 병이든 상처든 1회에 한해 완전히 치유해준다.]
몇 달 전에 사용할 일이 없어 아공간 주머니에 쟁여놓은 것을 이제야 기억해낸 것이었다.
‘원래는 나중에 목숨이 위급했을 때 사용하려고 했다만.’
소중한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것이다. 아까운 마음은 단 한 톨조차 들지 않았다.
“석찬 오빠, 지금 엘릭서라고 했어요?”
“그래.”
대답을 한 석찬은 빠르게 병뚜껑을 따 에브릭의 입에 보랏빛 엘릭서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언제 죽어갔냐는 듯이 에브릭의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가슴에 났던 구멍도 조금씩 메꿔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이브의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저런 치유 효과라니… 엘릭서가 틀림없어.’
엘릭서가 무엇인가?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엘릭서는 기나긴 탑 역사에서도 나타난 적이 손에 꼽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 치유 효과는 그 어떠한 포션이나 치유 마법조차 따라올 수 없으며, 죽지만 않았으면 대상이 누구든 살릴 수 있다는 전설의 비약.
그런 비약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하다니.
‘정말 대단해.’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엘릭서 한 병을 다 들이붓자, 마침내 멀쩡해진 에브릭의 몸.
마치 편하게 자고 있는 듯한 에브릭의 모습에 석찬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브릭 씨, 정신이 드세요?”
“…….”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에브릭.
‘뭐지?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으음….”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눈을 뜨는 에브릭.
“여, 여긴, 천국인가?”
하지만 점점 시야가 트기 시작한 그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석찬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 석찬? 여긴 천국이 아닌 건가?”
“무슨 천국이에요.”
“난 분명…?”
에브릭은 가슴에 손을 얹어봤지만, 뻥 뚫려 있던 구멍은 어느새 말끔하게 메워져 있었다.
“그럼, 난 살아난 건가? 근데 어떻게?”
그의 물음에 석찬이 빈 엘릭서 병을 살며시 숨기며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어요.”
그 모습에 이브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이브, 쉿.’
조용한 눈웃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는 석찬.
‘석찬 오빠? 왜….’
에브릭의 성격상 만약 자신을 위해 귀한 엘릭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당히 귀찮아질 터였다.
‘에브릭 씨가 살았다. 그걸로 된 거야.’
“아저씨!”
멀쩡한 에브릭의 모습에 진현 또한 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어엉! 다행이야.”
‘진현아….’
에브릭의 품에 안겨 마치 아이처럼 펑펑 우는 진현.
셋 중 에브릭과 같이 보냈던 시간이 제일 많았던 만큼 아마 지금 상황에 울컥함을 멈추지 못한 모양인 것 같았다.
“크허어어엉!”
“진현아, 네 심정은 알겠지만 아무리 다 나았어도 에브릭 씨 몸 상태가 마냥 정상은 아닐 거다. 조금 진정하시게 두자.”
“난 괜찮네. 그냥 내버려 두게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에브릭.
그 모습을 보니 둘의 재회를 최대한 만끽하게 해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보기 좋네.’
탑에 들어온 지 어느덧 수개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중에 가장 뿌듯한 일임에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엘릭서야 어디서든 더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건보다는 사람이 더 귀했다.
석찬의 환한 미소가 밝게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