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석찬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시작된 지 장장 12시간이 흘렀다.
퍽! 퍽!
고요한 고문실 안에선 석찬의 구타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사… 살려줘. 아니, 주세요.”
처음에는 완고했던 두 남자도 이제는 석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상처가 생기면 쉬면서 진행했던 이전의 고문과는 다르게 석찬의 고문은 말 그대로 쉼 없이 진행되었다.
이브가 치료하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녀의 마법 능력이 뛰어난 탓에 그마저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쿨럭! 제, 제발.”
손가락을 벌벌 떨며 석찬의 다리를 붙잡으려던 남자의 손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말할 기분이 드나?”
“무… 물론입니다!”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석찬의 말에 두 남자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좋아. 다시 한번 물어보지. 너희의 목적이 뭐냐? 에브릭과 굴로는 어디에 있지?”
“저… 저희는 사냥꾼 길드 소속의 1급 사냥꾼….”
“네놈들 이름 알기도 싫으니까 목적만 간단히.”
“예, 옙.”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석찬의 주변인들을 전부 잡아들이는 것.
원래대로였다면 사흘 전에 진현과 알렉산더도 납치해 올레드에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겠는가?
1층의 영주 알렉산더 올가가 수십 년 전 90층대를 최초 공략한 최강의 인간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올가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그야말로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다.
“자, 잘은 모릅니다만, 예전에 올킬러 님이 고블린 킹을 처치했던 장소에 저희 리더와 동료들이 몇 번 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블린 킹의 궁전?”
“예, 예! 그곳입니다!”
‘고블린 킹의 궁전이라….’
석찬이 빠르게 1층 전역에 마력을 퍼뜨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몬스터의 기운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냐?”
석찬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다른 남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 혹시 탐지 스킬을 쓰신 겁니까?”
“비슷한데, 왜?”
“그… 저희 리더가 탐지 마법을 회피하는 마도구를 설치하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마도구는 가격이 워낙 천문학적인 걸로 알고 있는데, 준비성이 철저한 놈들이었다.
“너, 그놈들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냐?”
“무, 물론입니다! 저,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뭘 믿고?”
“거,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쿵!
바닥에 머리까지 찧으며 사정하는 남자들의 모습에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만 믿어 보지. 대신에 구라 치면… 알지?”
“다, 당연하죠! 하하! 당, 당장 모시겠습니다!”
“풀어주세요.”
석찬의 말에 알렉산더의 옆에 와 있던 교도관 둘이 자객들의 팔다리를 봉인한 사슬을 풀어주었다.
“당장 안내해.”
* * *
고블린 킹의 궁전 입구 앞.
“여기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오랜만에 보는 고블린 킹의 궁전에 석찬과 진현이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너한테 고블린 시체 셔틀 시켰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새끼가, 7개월도 더 된 일을.”
그들의 뒤로는 이브, 그리고 길잡이로 붙잡혀 온 자객 둘이 있었다.
알렉산더도 동행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비서 찰스가 밀린 업무를 들이밀며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영주성에 남았다.
1층은 그 면적이 작지 않아 석찬과 이브 단둘만 이동한다면 반나절도 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스탯 페널티를 받은 데다가 부상까지 입은 짐짝 둘과 동행하는 터라 고블린 킹의 궁전에 도달하는 데까지는 무려 하루라는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
“죄, 죄송합니다.”
“빨리 네 녀석들 동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옙.”
[고블린 킹의 궁전 내부에 입장하셨습니다.]
고블린 킹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강해져서 그런 것일까?
이전처럼 위험을 경고하는 붉은 메시지 창은 뜨지 않았다.
석찬 일행은 자객들의 안내에 따라 궁전의 깊숙한 곳까지 이동했다.
한 나무 문 앞에 도달한 자객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긴가?”
“예, 예. 이곳이 저희들의 아지트입니다.”
“좋았어.”
“그럼, 들어가 볼….”
“잠깐만요.”
그때, 이브가 석찬과 진현을 저지했다.
“그냥 이대로 들어갈 거예요?”
“응?”
“이렇게 무식하게 들어갔다가 뭐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괜찮아, 내가 더 세.”
보통의 경우에는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스탯 페널티가 붙는다.
이는 석찬 같은 마력 운용자에게도 통용되는 사실.
하지만 마력이 무한인 그의 특성상, 내구력이 따라주는 한에서는 어느 정도 그 페널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쾅!
문을 열어젖히자, 복면과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 셋이 보였다.
“오, 올킬러?”
석찬을 알아본 그들이 빠르게 자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스탯 페널티가 붙은 움직임 따위, 석찬의 눈에는 5층의 고블린들만도 못했다.
팟!
재빠르게 자객들의 뒤로 이동한 석찬이 강하게 그들의 뒷목을 내리쳤다.
쾅!
“크악!”
그에 진현이 미리 준비한 마력 봉인 사슬로 정신을 잃은 자객들의 팔다리를 봉인했다.
“인질은 어디 있나?”
석찬의 물음에 자객들이 한 책장을 가리켰다.
“저기, 뒤에….”
쾅!
책장을 치우자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법한 구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
“예, 궁전을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제 동료들이 이곳으로 인질을 옮길 거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석찬과 진현도 고블린 킹을 잡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공간이었다.
“좋았어, 당장 들어가자!”
진현이 앞장서서 구멍에 몸을 던졌고, 그에 이어 석찬도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앗, 함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브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이브도 석찬과 진현을 따라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이제 어떡하지?’
방에 남은 자객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동료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있었다.
“하아….”
자객 한 명이 천천히 쓰러져 있는 동료에게로 다가가 목에 검을 겨눴다.
“뭐 하는 거냐?”
“이 방법밖에 없어.”
임무도 실패했고, 적을 아지트까지 데려왔다.
녀석들이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한다면? 자신들은 백 퍼센트 죽는다.
자신이 살려면 녀석들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옆의 동료도 그 사실을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휘익!
그렇게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탁!
누군가가 그가 쥐고 있던 칼날을 붙잡았다.
“다, 당신은….”
눈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자객이 눈을 부릅뜨며 검을 놓쳤다.
“이런 이런. 당신이 뭔가, 당신이?”
콰직!
살짝 힘을 주자 중년 남자, 올레드 그리젤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되어 비산했다.
“…지부장님.”
“배신을 하려 했다라, 각오는 되어 있겠지?”
살기 어린 그의 말에 자객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잠깐, 1층이라면 지부장도 분명.’
그도 분명 스탯 페널티를 받았을 것이다.
두 자객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동시에 친다.’
‘오케이.’
“지금!”
“으아아!”
두 자객이 동시에 올레드에게 달려들었다.
씨이익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올레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새겨졌다.
‘웃어?’
콰직!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분명 두 자객의 검은 제대로 올레드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올레드의 몸에는 단 하나의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었다.
“이게 단가? 조금은 기대했건만, 아쉽군.”
“제, 젠장!”
당황한 자객 하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화염의 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호오, 스킬인가?”
“파이어볼!”
쾅!
근거리에서 날아간 파이어볼이 올레드의 머리에 직격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멀쩡했다.
“약하군.”
탁!
올레드의 거대한 손이 파이어볼을 날린 자객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 커헉!”
“배신에 약하기까지, 1급 사냥꾼이라는 이름이 아깝군.”
“크윽!”
“죽어라.”
우득!
축 늘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자객이 들고 있던 검을 놓고 빠르게 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어딜.”
피슛!
올레드의 손에서 날아간 검이 도망치던 자객의 등을 관통했다.
“커헉.”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자객의 몸이 천천히 바닥에 허물어졌다.
쓰러진 배신자들을 뒤로하고 올레드는 벽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이제 숨어들어 온 쥐새끼들을 잡아볼까?”
올레드가 천천히 구멍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한 2분쯤 움직였을까? 어두웠던 구멍 너머에서 한 줄기의 빛이 새어 나왔다.
‘밖인가?’
1분 정도 더 움직이자, 세 사람은 마침내 구멍 너머의 다른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긴?”
사람을 백 명 정도 수용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한 공동.
낡아서 이끼가 끼고 금이 가 있었지만, 그 웅장함은 정말 엄청났다.
‘이런 공간이 궁전 안에 있었다고?’
그때, 공동 한구석에 묶인 채 정신을 잃고 있는 에브릭과 굴드가 보였다.
“에브릭, 굴드!”
석찬과 진현이 빠르게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의 상태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구타를 당한 건지 몸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고, 밥은커녕 물도 마시지 못했는지 피골이 상접했다.
“이브, 빨리 와서 치료해줘!”
“넵!”
석찬의 부름에 이브가 재빠르게 다가와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파아앗-
조금씩 안색이 괜찮아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석찬이 작게 안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조금 심하긴 한데, 한 10분 정도만 더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다행이네.”
“그래도 위험했어요, 조금만 늦었으면 심각해졌을 거예요.”
“고마워.”
잠시 후, 치료 마법 덕분에 몸 상태가 괜찮아진 에브릭이 먼저 눈을 떴다.
“깨어나셨어요?”
“여, 여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에 석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을 꺼냈다.
“이것 먼저 마시세요.”
“고, 고맙네.”
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켠 에브릭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아직 살아 있는 것인가?”
“당연히 살아 계시죠. 그나저나 어떻게 되신 거예요?”
“그게 말일세.”
에브릭은 여느 때처럼 일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던 중, 갑자기 자객들이 기습해 반항할 틈도 없이 붙잡혀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했다.
“석찬이 자네가 전부 해치운 겐가?”
“예.”
“이거 이거,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만.”
“아뇨, 오히려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에브릭이 납치를 당한 것은 순전히 석찬, 본인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에브릭이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그게 왜 자네 탓인가. 다 그 망할 놈들 탓이지.”
“으으….”
그때, 옆에 누워 있던 굴드도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석찬은 그에게도 물과 음식을 준 뒤 사과를 했다.
“됐네, 그게 왜 자네 탓이야?”
굴드도 이 일에 대해선 석찬의 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몬스터 사체를 거래할 때 시세보다 더 비싸게 사주겠다는 것을 겨우 말릴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재회의 순간을 만끽한 후, 석찬 일행은 몸을 일으켰다.
“체력도 회복되었겠다, 이제 밖으로 나갈까요?”
“그럴까? 나도 빨리 가게 가서 장사 준비해야 하는데.”
“나도네.”
“그럼 슬슬 일어나죠.”
진현과 석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에브릭과 굴드는 그들과 함께 처음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구멍 속에서 거대한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다들 뒤로 물러서!”
재빠르게 몸을 빼는 석찬 일행.
이어서 천천히 얼굴을 드러낸 올레드 그리젤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딜 나가려고 그러시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