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다음 날 아침.
따사한 아침 햇살이 눈을 콕콕 찔렀다.
“으음….”
마력으로 눈을 보호한 석찬은 몸을 일으켜 보았다.
“으어, 잘 잤다.”
기지개를 켜는 석찬의 눈에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이브의 모습이 보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자 머릿속으로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시비를 건 베테랑 사냥꾼과의 대결이 성사된 이후, 술 때문에 떡이 된 이브를 데리고 나온 자신.
‘어, 이브? 방 열쇠를 좀….’
‘으에… #$*(%&$’
하지만 만취 상태인 이브가 제대로 된 사고나 대화를 할 리가 만무.
그렇다고 방문을 부술 수는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은 바닥에서 잔 것이었다.
“그런데 저건 보기가 좀 그렇군.”
술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브의 옷차림은 처음 눕혔을 때에 비해 상당히 가벼워져 있었다.
“크흐흠. 남사스러워라.”
조심히 자신이 덮었던 이불을 그녀의 목 끝까지 덮어둔 석찬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후, 냄새. 빨리 씻어야겠다.”
피곤해서 씻지 않고 바로 잤더니 온몸이 찝찝한 데다가 옷에서 술과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긴 석찬은 빠르게 욕실로 직행한 뒤 대충 물을 데워 몸을 씻겨냈다.
“후, 이제야 좀 개운하네.”
샤워를 마친 석찬은 마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머리를 턴 뒤, 바지를 입었다.
“으으….”
그런데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멍한 표정의 이브가 욕실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순간, 석찬과 이브의 눈이 마주쳤다.
“어….”
“에….”
두 남녀 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요함 속에서 석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브, 일어났….”
“꺄아아악!”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이브가 석찬의 명치에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퍽!
“커헙!”
예상외의 펀치력에 숨이 턱 막힌 석찬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이브?”
고개를 올리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브가 보였다.
“저, 저기….”
“변태!! 어딜 봐!”
퍼버버벅!
곧이어 이브의 난타가 석찬의 온몸을 구석구석 가격했다.
‘크흡, 방어, 방어!’
아무리 석찬의 내구 스탯이 높다지만 초록 등급의 마력을 입힌 이브의 주먹을 맨몸으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HP : 16,623/16,830]
[HP : 16,486/16,830]
한 방 한 방에 뭉텅이로 줄어드는 HP를 바라보며 석찬이 재빨리 몸 위로 얇은 보호막을 쳤다.
“이, 이브? 내 말 좀… 커헉.”
하지만 계속되는 이브의 연타에 보호막마저 단번에 박살 나고 계속해서 대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돼, 이성을 잃었어.’
그렇다고 이브에게 물리적인 공격을 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계속해서 보호막을 치며 고뇌에 빠진 석찬은 이내 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슬립.”
석찬은 자신의 마력을 이브에게 쏘았고, 곧이어 이브의 몸이 서서히 바닥에 허물어졌다.
“후.”
얼마 전에 이브가 알려준 초급 정신 마법 ‘슬립’.
‘이걸 이렇게 쓸 줄은.’
다시 곤히 잠든 이브를 침대에 눕힌 석찬은 방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딸랑딸랑~
“어셔옵쇼!”
“햇밀죽 2인분이요.”
“포장입니까?”
“네.”
음식이 조리되는 동안 석찬은 식당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석찬을 보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마력으로 청각을 강화시키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야? 베테랑 사냥꾼에게 대결을 신청한 놈이?’
‘그래, 내가 어제 주점에서 봤다니까?’
‘무슨 깡으로 베테랑 사냥꾼한테 덤벼들었대? 요즘 유명하다고 아주 막 나가는구만.’
‘들리겠어! 조심히 말해!’
‘들리면 들으라지, 뭐.’
그들은 어제 있었던 내기로 석찬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되니까 뭐.’
조금 더 기다리자, 직원이 포장된 죽을 가지고 석찬에게 다가왔다.
“주문하신 햇밀죽 2인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음식 값을 지불한 석찬은 빠르게 방으로 돌아갔다.
벌컥-
문을 열자, 아직 잠들어 있는 이브의 모습이 보였다.
죽을 데워 그릇에다가 옮겨 담은 석찬은 그녀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일어나, 이브.”
“우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뜬 이브는 눈앞까지 다가온 석찬의 얼굴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꺄… 악!”
꽈당!
‘오우야.’
침대 밑으로 떨어진 이브를 바라보며 석찬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오… 오지 마요!”
이브는 빠르게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끌어내리더니 온몸에 둘둘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석찬이 작게 중얼거렸다.
“볼 것도 없던데 뭘.”
“다, 닥쳐요!”
이불을 둘러싼 채 일어난 이브의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푸흡.”
“우, 웃지 마요!”
얼굴이 새빨개진 이브는 빠르게 침대와 바닥 위에 널브러진 자신의 옷들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약 3분 후, 옷을 다 차려입고 나온 이브가 매서운 눈빛으로 석찬을 째려보았다.
“설명을 해주시죠.”
“그러니까 말이지….”
석찬은 어쩔 수 없이 이브를 본인의 방에 데려와 재우게 된 이야기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전부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이브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이었다.
“그, 그런 거였군요.”
“응. 난 바닥에서 잤으니까 걱정하지 마.”
“바닥에서요?”
“그럼, 한 침대에서 자리?”
“…….”
이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쥐똥만큼 작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석찬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주먹부터 안 나가네?”
“예?”
“아까 전에는 내 말도 안 듣고 아주 그냥 복날 개 잡듯이 두들겨 패더구먼.”
그의 말에 이브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에, 에?”
“진짜 기억 안나?”
그의 물음에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됐어. 밥이나 먹자. 죽 사왔어.”
“네….”
터덜터덜 자리에 앉은 이브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한 스푼 떠먹었다.
“맛있네요….”
“그러게, 맛있네.”
빠르게 죽을 삼킨 석찬이 이브를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빨리 먹고 좀 씻어라. 너 지금 냄새 장난 아냐.”
그 말에 이브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조용히 해요!”
“하하하!”
소란스러운 식사가 끝난 후, 이브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흐음. 할 게 없네?”
홀로 남은 석찬은 심심함에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노란 등급으로 돌파를 시도해 보려고도 했지만, 주황 등급으로 돌파했을 때를 생각해보니 잘못하면 건물이 날아갈 위험이 있었기에 그만두었다.
“모르겠다, 그냥 훈련이나 하자.”
침대에서 뛰어내린 석찬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팔굽혀 펴기부터 시작해서, 플랭크, 윗몸일으키기 등 여러 가지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씻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석찬은 시원한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캬~ 역시 뭐 할지 모를 땐 훈련이 최고다.”
그렇게 물을 한 잔 더 따르려는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브인 줄 알았으나, 마력 운용자가 가진 특유의 마력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지?’
잠시 문을 바라보던 석찬은 조심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문밖에는 복면에 후드를 뒤집어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누가 봐도 수상한 복장에 석찬이 경계하며 신원을 물었다.
미약한 살기를 발사하는 석찬의 모습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 후드를 뒤집었다.
“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후드와 복면을 벗은 남자는 짙은 흑발에 한쪽 뺨에 십자 흉터를 지닌 20대처럼 보이는 청년이었다.
“저는 심부름꾼 길드의 10층 지부 소속, 베테랑 심부름꾼 테일러 아담이라고 합니다.”
작은 명함을 받은 석찬은 명함에 새겨진 사진과 이름을 눈앞의 청년과 대조했다.
‘거짓말은 아닌 거 같네.’
심부름꾼 길드.
말 그대로 사람들의 심부름을 받아서 수행하는 단체로 사냥꾼 길드와 더불어 탑 내에서 가장 큰 조직 중 하나이다.
‘베테랑 심부름꾼도 베테랑 사냥꾼만큼 따기가 굉장히 어려운 걸로 아는데.’
문득, 왜 베테랑 급이나 되는 심부름꾼이 자신에게 왔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베테랑 심부름꾼이 저한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조금은 부드러워진 석찬의 말투에 테일러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레이놀드 씨와 내기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레이놀드?”
“베테랑 사냥꾼 말입니다.”
“아.”
‘그 베테랑 사냥꾼의 이름이 레이놀드였구먼.’
“저희 지부장님께서 이 내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심부름꾼 길드의 지부장이요?”
심부름꾼 길드의 지부장이면 아마 10층의 최강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관심을 가지다니.
“그래서 말인데, 잠시 실례를 좀 범해도 되겠습니까?”
“실례?”
그때, 테일러의 손에서 푸른빛 전류가 나타났다.
“뇌전(雷電)!”
번개에 둘러싸인 그의 주먹이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휙-
하지만 석찬은 몸을 비틀어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공격이 막히자, 테일러는 빠르게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냈다.
휭-
공중을 도는 단도를 낚아챈 그는 빠르게 단도를 석찬에게 휘둘렀다.
샥-
하지만 단도 역시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빠르게 테일러의 뒤로 이동한 석찬은 그의 양팔을 휘어잡았다.
우두둑-
“끄아아악!”
팔이 꺾이는 고통에 테일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힘 빼, 힘 빼. 힘주면 더 아파.”
“캬악.”
툭.
석찬은 떨어진 단도를 주워 테일러의 목을 겨눈 뒤,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나를 공격한 거지?”
섬뜩한 석찬의 표정에 테일러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의 지시였습니다!”
“지부장?”
“예.”
“왜 그가 이런 짓을 시켰지?”
“지부장님께서는 올킬러….”
“강석찬.”
“예?”
“올킬러라고 하지 마.”
좀 전보다 더욱 섬뜩한 석찬의 얼굴에 테일러가 빠르게 말을 수정했다.
“예, 지부장님께서는 강석찬 님께서 얼마나 강한지 저보고 확인해 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
“한데 역시, 역대 최단 기록으로 탑을 올라오셨다는 명성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요. 지부 랭킹 3위인 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지다니.”
테일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좀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팔이 아픕니다.”
그 말에 석찬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잡았던 팔을 놔주었다.
‘뭐, 아까 공격할 때도 엄청난 적의는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조금 전 자신을 기습할 때도 정말 자신을 죽이려는 듯한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탁!
속박이 풀리자 테일러는 욱신거리는 팔을 어루만졌다.
“후. 힐러를 불러야겠네요. 실례했었습니다. 곧 심부름 길드에서 방금 일에 대한 보상을 하러 올 겁니다.”
“그래.”
“그럼 이만….”
말을 마친 테일러는 단도를 돌려받은 뒤, 터덜거리며 석찬의 방을 빠져나왔다.
심부름 길드로 향하며 테일러는 아직까지 저릿저릿한 팔을 바라보았다.
‘이정도면 아마….’
지부장보다 강할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는 테일러였다.
“빨리 올킬러 님께 올인하라고 보고해야겠군.”
테일러는 더욱 속도를 높여 심부름꾼 길드 지부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