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으아아. 뭔 놈의 탑이 이렇게 넓냐.”
점점 가까워지는 마을 입구를 바라보며 석찬은 기지개를 폈다.
아무래도 나흘 동안 수련하고 날고를 반복했던 탓인지 정신이 꽤 피로했다.
“들어가서 여관방을 잡아보죠.”
이브 또한 퀭한 눈으로 석찬을 뒤따랐다.
“그래.”
입구에 다가서자 가드들이 둘을 가로막았다.
“잠시 명패를 확인하겠습니다.”
“여기요.”
석찬이 내민 금색 명패를 보자 가드들은 순순히 길을 비켜줬다.
“아아… 화폐는 전 층 공용인데, 왜 명패는 마을마다 새로 받아야 되냐. 그것도 좀 통합했으면 좋겠다.”
“동감입니다.”
방을 잡고 이브와 헤어진 석찬은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늦은 밤.
눈을 뜬 석찬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간이라. 간만에 푹 잤군.’
기지개를 한 번 편 석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달빛과 가로등의 불에 의지해 빛나는 길거리에는 몇몇 주정뱅이나 노숙자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흠.’
잠시 그 풍경을 쳐다보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세요?”
“저예요!”
곧이어 들리는 이브의 목소리에 석찬은 문을 열어 그녀를 들여보냈다.
침대에 걸터앉는 그녀의 표정은 뭔가 평소보다 뚱해 있었다.
“아니, 웬일로 이렇게 오래 주무셨대요? 평소에는 서너 시간밖에 안 주무시면서.”
‘그것 때문인가.’
그녀의 첫마디가 그녀의 표정을 설명했다.
“하하. 오늘은 좀 피곤했나봐.”
그의 대답에 이브가 더욱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평소에는 안 피곤했고?”
그녀의 그런 표정도 이해가 됐다.
지난 6개월간 탑을 오르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아무리 피곤해도 수면 시간은 네 시간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방 밖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요?”
“미, 미안해.”
“미안하면 밥이나 사줘요! 기다리기만 했더니 배고파 죽겠네.”
“그래. 먼저 나가있어, 준비해서 나갈게.”
“빨리 나와요.”
“알았어.”
석찬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그려졌다.
씩-
“뭐예요?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요?”
“아니야, 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가줄래?”
“네.”
문을 닫고 나가는 이브를 바라보며 석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가족이라곤 하나 없던 석찬에게 있어서 1층에서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며 탑을 오른 이브는 마치 여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가끔은 잔소리도 하고 모자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눈에는 그런 행동마저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지. 이브 화낼라.’
준비를 마친 석찬은 이브와 합류해 숙소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하하! 그러니까 내가….”
“여기 맥주 다섯 잔 더!”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빈자리에 앉은 석찬과 이브에게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저기, 혹시 은발의 천사님과 올킬러 아니신가요?”
직원의 물음에 석찬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하아… 예. 맞습니다.”
그 말에 직원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하며 크게 흥분했다.
“정말요? 혹시 사인 가능하신가요? 제가 두 분 팬이어서….”
그는 횡설수설하며 품에서 주문을 받을 때 쓰는 메모지와 펜을 꺼내들었다.
“물론이죠.”
석찬은 단숨에 사인을 마쳤고, 이브 또한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다.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쇼!”
직원은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위의 이목이 석찬과 이브에게 집중되었다.
“올킬러랑 은발의 천사?”
“진짠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은발에 백안의 미소녀. 맞는 것 같은데?”
‘하아.’
석찬은 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때는 약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석찬과 이브가 한창 6층의 클리어에 몰두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그때쯤부터 석찬과 이브라는 듀오는 탑 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브는 특유의 은색 머리칼과 아름다운 외모로 ‘은발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고, 석찬은 그가 지나간 곳에는 아무 생명체도 남지 않았다는 것에서 ‘올킬러’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리고 우연인지 공교롭게도 그 별명은 자신의 선수 시절 별명하고도 동일했다.
올킬러라는 유치한 별명이 한없이 부끄러운 석찬과는 달리 이브는 자신의 별명을 썩 기분 나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석찬은 자신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컵에 물을 따랐다.
몇 분 후, 시켰던 음식과 술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는 식사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우와! 맛있겠다!”
음식을 마주한 이브는 어린아이처럼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침을 질질 흘렸다.
“사과의 의미에서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 모자라면 말하고.”
“잘 먹겠슴다!”
이브는 엄청난 속도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역시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이브는 보기보다 식탐이 굉장했다.
뭘 먹던 간에 석찬이 먹는 양의 족히 두세 배는 먹었다.
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이 바로 살이 안 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했음에도 항상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다.
‘이브.’
‘왜요?’
‘살 안찌는 비법이라도 있어?’
그녀의 답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살이요? 당연히 찌죠! 가슴이랑 엉덩이 살찐 것 좀 봐요!’
이브의 말로는 그녀는 대부분의 지방이 제일 먼저 가슴과 엉덩이 쪽으로 집중된다고 한다.
이 무슨 만화 같은 체질이란 말인가.
이브가 큼지막하게 썬 트롤 스테이크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움~ 맛있다!”
그 모습에 석찬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음식을 더 주문해야겠군.’
그렇게 몇 인분의 음식을 추가 주문한 석찬은 홀로 맥주를 홀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왁자지껄 떠들며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런 날은 오랜만이네.’
지난 6개월.
오로지 탑을 오르는 것과 마력 운용 훈련에만 열중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휴식이나 식사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오랜만의 휴식과 약간의 술은 고되었던 석찬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때.
쨍그랑!
갑자기 주점 한쪽에서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걔네들 존나 허접이라니까?”
소란이 난 쪽을 바라보니 얼굴이 벌게진 한 남자가 자신들을 가리키며 가게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취했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석찬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석찬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저 말입니까?”
일단 처음 보는 자였기 때문에 석찬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대꾸했다.
“그럼 내가 너 불렀지, 누굴 불렀냐!”
정중한 석찬과 달리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싸움 날 것 같은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저 남자의 가슴에 달린 명패를 좀 봐….”
그 말에 사람들은 사내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셔츠 위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명패가 있었다.
그것을 본 누군가가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베테랑 사냥꾼!”
“그래, 이 몸이 바로 그 베테랑 사냥꾼이시다.”
탑 전 층에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꾼이 존재한다.
그들은 각 마을에 있는 사냥꾼 길드 지부에서 테스트를 통해 사냥꾼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보통 사냥꾼의 등급은 5급에서 1급까지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1급이 사냥꾼이 받을 수 있는 제일 높은 등급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사냥꾼’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1급 사냥꾼 위에는 한 개의 등급이 더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테랑 등급이다.
‘베테랑 사냥꾼이라.’
1급 사냥꾼이 베테랑 사냥꾼이 되는 것은 5급 사냥꾼이 1급이 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베테랑 사냥꾼이 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10층 전역에서도 베테랑 사냥꾼은 오직 여섯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10층에 온 이후로 그들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전부 숙지한 석찬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 누구의 데이터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명패를 위조한 건 아닐 테고. 새로운 베테랑 사냥꾼인 건가?’
명패의 위조는 중죄다. 마을 내에서 명패를 위조한 행위가 적발되면 마을의 출입이 제한될 정도이다.
눈앞의 남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베테랑 사냥꾼이시라고요?”
“그래! 이 명패 안보이냐?”
그는 자신의 황금 명패를 가리키며 실실 웃어댔다.
“저 자신감을 보면 맞는 거 같은데?”
주위 사람들은 더욱 큰 소리로 수군거렸고, 의기양양해진 사내는 더욱 크게 호통쳤다.
“알량한 재주로 뜬 놈들이 말야. 너희들, 하이오크 전사나 제대로 잡을 수 있냐?”
하이오크 전사.
일반적인 하이오크보다 덩치나 힘이 월등히 강한 개체다. 10층의 베테랑 사냥꾼의 진급 테스트 중 하나가 바로 이 하이오크 전사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찬에게 있어서 하이오크 전사나 하이오크나 거기서 거기였다.
하이오크 전사도 다섯이서 달려드는 것을 막아본 적이 있었다.
이브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오크 전사요?”
“그래!”
“걔들 엄청 약하던데?”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수군거림을 멈췄다.
‘아뿔싸.’
이브의 자리를 보니 커다란 맥주잔이 이미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술도 못하는 녀석이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방금 뭐라 그랬냐?”
남자의 이마가 꿈틀거렸지만 이미 술에 취한 이브의 입은 브레이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우리 석찬 오빠는 걔네들 막 서너 마리가 와도 거뜬히 막던데?”
‘제발 멈춰 이브….’
남자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계집년이 어디 감히 뚫린 입으로….”
“마잔아요!! 구리고 욕하지 마세요!”
이젠 혀까지 꼬인 이브였다.
이대로 놔두면 일이 더 커질 것을 직감한 석찬은 서둘러 그녀를 만류했다.
“이브. 많이 취했어.”
“놔여!”
석찬은 옆에서 서성이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 계산이요. 잔돈은 가지시고.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석찬은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동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생떼를 피우는 이브를 붙잡고 가게를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뭐야, 튀는 거냐? 천하의 올킬러 님께서?”
올킬러.
떠올리고 싶지 않은 별명의 재등장에 석찬이 걸음을 멈췄다.
‘참자.’
“역시 다 허풍이었어! 하긴, 베테랑도 아닌 녀석이 무슨 ‘올킬러’라는 거창….”
그때, 말을 하던 베테랑 사냥꾼이 멈칫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말소리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고오오오.
석찬의 몸에서는 짙은 마력의 오라(Aura)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뒤지기 싫으면 그 입 닥쳐.”
평소였으면 그냥 참고 넘어갔을 만한 도발이다. 하지만 약간의 취기와 분노가 석찬의 판단력과 자제력을 흩트렸다.
“뭐… 뭐냐? 꼬와? 꼬우면 덤비든가!”
베테랑 사냥꾼은 석찬이 내뿜는 기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도발을 이어갔다.
“붙읍시다.”
“뭐?”
“붙자고.”
“오오오오!”
석찬의 화끈한 발언에 주위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넉넉하게 일주일 뒤. 어떻습니까?”
“일주일 뒤?”
“예. 이런 조그만 주점 말고, 화끈하게 마을 광장에서 붙죠.”
그 말에 베테랑 사냥꾼은 오히려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증인이니 발뺌 같은 건 하지 않겠지?”
“당신이나 그러지 마셔.”
“좋아. 일주일 뒤에 보자고! 하하하!”
건물을 뒤흔들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주점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