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마치 아마존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숲속.
한 남녀가 거대한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멧돼지 형상의 머리, 2m 50cm에 다다르는 거대한 체격. 거기에 짙은 녹색의 피부까지.
몬스터의 정체는 바로 하이오크였다.
“쿠어어어!”
“망할 돼지 녀석! 목청만 더럽게 크네!”
석찬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하이오크 전사의 거대한 몸뚱이를 가볍게 제치며 손을 뻗었다.
6개월 동안 많이 익숙해진 마력 컨트롤이 금세 손바닥 앞에 거대한 불구덩이를 생성해냈다.
“우선 한 방.”
쾅!
“꾸어어어어!”
불구덩이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은 하이오크 전사가 오른쪽 뺨을 부여잡으며 크게 울부짖었다.
“덩치도 산만 한 놈이 꼴사납게 시리.”
순식간에 석찬의 주먹에 짙은 마력이 맺혔다.
“죽어라.”
콰광!
순식간에 하이오크 전사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며 그 잔해가 주위로 흩날렸다.
[하이오크 전사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0층의 클리어 조건을 하나 완수하셨습니다.]
“후, 드디어 끝났네. 이브, 이것 좀 닦아줘.”
그 말에 이브가 한숨을 쉬며 지팡이를 들었다.
“네, 근데 조금만 덜 과격하게 싸우시면 안 돼요? 어떻게 매번 그래요?”
이브의 지팡이에서 녹색 빛이 일자, 석찬의 몸을 뒤덮고 있던 하이오크 전사의 피와 살점들이 말끔히 제거되었다.
“미안, 미안. 앞으로 주의할게.”
그 말에 이브가 살며시 이마를 짚었다.
“또, 또, 그런다. 오빠가 지금까지 앞으로 주의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알기나 해요?”
“하하… 미안.”
‘윽, 시작했군.’
이브의 잔소리 폭풍에 석찬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미안해, 이브!”
결국 견디다 못한 석찬이 두 손을 맞대며 사과했다.
“다음에도 그러면 두고 봐요. 저 디버프 마법도 쓸 수 있답니다?”
이브의 지팡이가 보랏빛으로 빛나는 것을 본 석찬이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주의할게.”
“에효. 이리 와봐요.”
석찬은 한숨을 쉬면서도 자신의 몸에 쌓인 피로까지 말끔하게 해소해주는 이브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브랑 이렇게 같이 다니게 될 줄이야.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구만.’
석찬은 이브와 함께하며 6개월간 무려 탑의 10층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동안 서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아가고 친해지며 둘은 어느새 말을 놓는 관계까지 이르렀다.
“드디어 레벨이 올랐어.”
조금 전의 레벨업으로 석찬의 레벨은 어느덧 93에 다다랐다.
1층에서의 돌발 퀘스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경험치 보너스 같은 것이나 추가 보상이 없었기에, 레벨이 오르는 속도는 더디다 못해 거의 안 오르다시피 했다.
석찬의 레벨업 소식에 이브 또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레벨이 오르셨어요? 진짜 곧 저 따라 잡으시겠는데요?”
“맞아, 내가 좀 잘나지.”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디 보자. 퀘스트 창.”
[메인 퀘스트 – 10층(플래티넘 전용)]
[하이오크 1,000마리 처치(완료)]
[하이오크 전사 100마리 처치(완료)]
[하이오크 킹 처치(미완료)]
“하이오크 킹을 처치해야 하긴 하는데.”
하지만 약 한 달간 주야장천 오크들만 때려잡다 보니 몸에 누적된 피로도 상당했다.
“마을이라도 한 번 들를까?”
“진짜요?”
석찬의 말에 이브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러려고.”
그의 확답에 이브가 빠르게 짐을 싸 들었다.
“마을에 가실 거면 빨리빨리 움직여요. 지금 출발해도 적어도 사흘은 걸릴 건데 중간중간 수련도 하실 거잖아요!”
“그래.”
석찬의 어깻죽지에서 천천히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개 한 쌍이 펼쳐졌다.
마력 날개.
1층에서는 정신을 극한까지 집중해 겨우 불완전하게나마 만들어낸 기술이었지만, 꾸준한 연습과 함께 주황 등급의 막바지에 오른 석찬은 이제 어느 정도 빠르게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석찬에 이어 이브의 등에서도 곧바로 녹색 날개가 펼쳐졌다.
이브의 말로는 마력을 형상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컨트롤을 요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그녀가 처음 마력 날개에 관해 들었을 때 지은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2주 만에 어느 정도 마력이 형상을 갖추었었다고요?’
‘위급 상황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거래도.’
‘그래도 그건 대단한 거예요. 아버지에 버금가는 재능을 가진 저조차도 마력을 완전히 형상화시키는 데 7-8년에 가까이 되는 시간이 걸렸는데… 게다가 날개라니. 저도 그건 몇 년 전에야 겨우 완성했는데.’
‘그때는 참 난감했었지.’
둘은 하이오크 전사의 시체와 전리품들을 챙기고 마을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난 지 몇 시간. 휴식을 위해 석찬과 이브는 잠시 지상으로 내려갔다.
“휴, 역시 마력 날개는 유지하는 게 힘드네요. 이럴 때마다 석찬 오빠의 경이로운 마력 회복 속도가 진짜 부러워요.”
이브 또한 몇 개월간 가까이에서 석찬을 지켜봐 왔기에, 무한까지는 몰라도 그의 마력 회복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나도 힘들어. 그나저나 이브도 굉장하네. 마력 날개를 몇 시간씩이나.”
“이래 봬도 초록 등급이랍니다. 무시하지 마세요.”
“그, 그래.”
“저는 마력을 좀 회복할 테니, 오빠는 몬스터들 좀 오면 잡아주세요.”
“오야. 빨랑 회복이나 해라.”
“네.”
곧이어 이브는 마력 운용에 들어갔다. 석찬은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 또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태창.”
[이름 : 강석찬]
[레벨 : 93]
[HP : 16,830/16,830]
[MP : 1870/1870]
[힘 : 155 + 15.5]
[민첩 : 154 + 15.4]
[체력 : 153 + 15.3]
[내구 : 153 + 15.3]
[마력 : 170 + 17.0]
[잔여 포인트 : 5]
[잠재력 : 무한]
마력 스탯은 마력 운용으로 획득이 가능했다.
남들이 5개의 포인트를 5개의 스탯에 투자할 때 석찬은 오로지 4개의 스탯만 투자했다.
처음에는 페널티로 보였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은 페널티가 아닌 축복이었다.
이미 모든 스탯이 100을 넘어간 지 오래. 이제는 150을 넘어가고 있었다.
남은 포인트를 배분해 모든 육체 스탯을 155로 맞춘 뒤, 석찬은 마력 저장소를 관조해 보았다.
‘주황색도 이제 작별할 때가 가까워지는군.’
며칠 전부터 성장이 뜸해진 마력 저장소는 어느덧 다시 한계에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조만간 노랑 등급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데?’
이브의 말로는 마력 저장소의 색이 바뀌는 것을 ‘돌파’라고 부른다고 했다.
‘좋아.’
그렇게 마력 운용을 하던 석찬에게 갑자기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뭐지?’
이브는 아직 마력 운용 중이었다.
석찬은 그녀의 곁에 보호막을 두른 채 조심히 인기척이 난 풀숲을 향해 다가가 보았다.
그때, 풀숲 너머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혼비백산한 채로 풀숲을 지나서 사라졌다.
“흐음?”
석찬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두렵게 했는지 호기심이 생겨 그들이 도망친 방향으로 다가가 보았다.
“크르르륵.”
석찬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동안 신명나게 잡아왔던 하이오크들이었다.
“뭐야, 고작 하이오크였어?”
하지만 그 하이오크는 자신이 평소에 봐왔던 다른 하이오크들과는 무언가 많이 달라 보였다.
온몸에 돋아난 굵은 핏줄과 붉게 출혈된 눈.
‘뭔가 익숙한데.’
설마 하며 하늘을 바라보니,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비치는 둥근 달이 보였다.
‘보름달이라.’
“쿠어엉?”
석찬을 발견한 하이오크는 침을 질질 흘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보름달 떴더니, 조금 강해졌다고 정신이 어떻게 됐나봐?”
10층의 클리어 조건들을 완수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수의 하이오크를 잡아왔던가.
오죽하면 하이오크들이 알아서 석찬을 피해갈 정도였다.
하지만 보름달의 영향인지, 눈앞의 하이오크는 두려움의 기색 하나 없이 석찬에게로 다가왔다.
“쿠어어엉!”
후웅-
하이오크의 거대한 주먹이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상체를 젖혀 주먹을 피한 석찬이 순식간에 녀석의 옆으로 이동했다.
“느리다, 느려.”
“쿠, 쿠엉?”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석찬이 옆에서 나타나자 하이오크는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건 정당방위다.”
마력으로 둘러싸인 석찬의 주먹이 하이오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쾅!
“꾸엥!”
석찬은 그대로 절명한 하이오크의 시체를 끌고 이브에게로 돌아갔다.
이브는 아직도 마력을 운용 중이었다.
그때, 잠시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석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출출한데 고기나 좀 구워 놓을까?”
석찬은 가방 안에서 거대한 도축용 칼을 하나 꺼냈다.
6개월간 탑을 오르거나 수련을 하는 것 외에도 도축 또한 틈틈이 배워 놨다. 전문가만큼은 아니어도 웬만한 수준으로 도축이 가능했다.
쓱-쓰슥-
능숙하게 뼈와 살을 분리한 석찬은 적당히 먹을 만큼의 살덩이를 떼어내 꼬챙이에 꽂아 바닥에 세워 놓았다.
“역시 꼬치는 직화로 구워야지.”
손에서 생겨난 불꽃이 하이오크의 고기를 서서히 익혀갔다.
고소한 냄새가 주변 가득히 퍼져나갔다.
“으음?”
이브 또한 그 냄새를 맡았는지 석찬에게 다가왔다.
“일어났어?”
“오늘은 꼬치인가요?”
“엉. 지금 굽고 있으니까 익으면 먹어.”
잠시 쪼그려서 익어가던 고기를 지켜보던 이브는 곧 다 익은 꼬치를 석찬에게 건네받았다.
“여기.”
“고마워요.”
석찬 또한 잘 익은 꼬치구이를 가져다 고기 하나를 베어 물었다.
하이오크의 고기.
10층의 특산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고기는 비록 저 위층에 나오는 트롤보다는 덜하지만 하이오크 특유의 재생력 덕분인지, 그 육즙의 양과 질이 엄청나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지금 먹는 것은 무려 갓 잡은 싱싱한 하이오크 고기!
‘우음~’
입 안 가득 넘쳐흐르는 육즙을 느끼며 석찬은 말을 열었다.
“아 맞다, 이브.”
“왜요?”
“나 곧 노랑 등급 될 거 같아.”
이브가 먹던 꼬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뭐… 라고요?”
“곧 노랑 등급 된다고.”
무덤덤한 석찬의 대답에 이브가 경악 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오빠는 미쳤네요. 고작 7개월 만에 노란색이라니. 저는 천재라고 명함도 못 내밀겠네요.”
“…하하.”
우물우물.
어색한 정적 사이로 고기를 씹는 소리만이 얕게 흘렀다.
‘분위기가 너무 어색한데.’
석찬은 분위기도 풀 겸 이브에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브.”
“왜요?”
“넌 왜 나랑 같이 탑을 오르는 거야?”
“그거라면 분명….”
맞다. 분명 2층에서 들은 답이다. 하지만 석찬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 어중간한 대답 말고, 너도 탑을 오르고 싶은 진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
말없이 모닥불만 지켜보는 이브.
‘내가 말을 잘못했나?’
살짝 안절부절못할 때 쯤, 이브가 입을 열었다.
“6층에서 있던 일, 기억해요?”
“6, 6층?”
석찬은 빠르게 6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6층이라면… 아.’
‘그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비가 엄청 내렸었죠?”
“억수로 내렸었지.”
석찬은 그날을 회상했다.
장대처럼 내리는 비에 연속된 전투로 지친 석찬과 이브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한 동굴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벽화를 발견했다.
화가를 데려와서 그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잘 그려진 벽화.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으니.
“아버지 젊었을 적의 모습은 저도 처음 봤었죠.”
그것은 바로 방긋 웃고 있는 알렉산더의 얼굴.
“어렸을 적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탑에는 탑을 오르던 중 남긴 흔적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것들을 하나둘 찾아보고 싶어요. 물론, 복수를 먼저 하고 나서요.”
“복수라….”
동굴에 그려졌던 벽화에는 알렉산더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알렉산더 옆에 꼭 붙어 있던 아름다운 여인, 이브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얼굴을 처음 본다고 했던가.’
이브의 어머니는 이브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범인은.
‘사냥꾼 길드라고 했던가.’
“큰아… 아니, 알프레드 올가랑 그 동료들. 절대 용서 못 해요.”
이브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석찬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땐 나도 도와주마.”
“고마워요.”
“별말씀을.”
잠시 후, 배불리 먹은 석찬과 이브는 자리를 치운 다음 다시금 마을을 향해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