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풀이 무성하게 자란 초원 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한 남녀를 토해냈다.
“끄윽.”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쥐는 석찬. 이브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이게 텔레포트? 우웁.”
그녀 또한 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헛구역질을 연발했다.
“으윽. 죄송합니다.”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숙이는 이브.
“아닙니다, 저도 뭐, 처음에는 그랬는걸요.”
처음에는 아예 정신을 잃기도 했었으니… 치부라고 하면 치부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좀 진정이 되셨나요?”
“네, 와아….”
삼 분 정도가 지난 후,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이브는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과 숲의 모습에 넋을 잃은 듯 입을 벌렸다.
‘하긴, 1층을 벗어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날 때부터 쭉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이브한테 다른 지역은 생소하다 못해 경악할 환경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살던 곳과 비슷한 곳이라도 말이다.
석찬도 2층은 처음이었지만, 지구에 있다가 탑에 들어온 것보다 놀랍지는 않았다.
“…….”
“…….”
‘그래서,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무래도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고 하다 보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둘은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기운을 깨보고자 석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그나저나, 사람이 별로 없네요.”
게다가 1층처럼 마을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의문에 이브가 입을 열었다.
“아, 탑 안에는 공식적으로 10개의 마을이 존재해요.”
이브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10개밖에 없나요?”
“네, 그중 하나가 바로 1층의 초심자 마을이고요. 그 이후로는 10층, 20층, 이렇게 해서 90층까지 있어요.”
“그렇군요.”
“가끔 사람들이 결속해서 작게 만든 마을도 발견된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저도 아버지께 들은 거라.”
“설명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퀘스트 먼저 확인해 보시죠.”
이브의 말에 퀘스트 창을 열자, 거대한 네모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2층 (플래티넘 전용)]
[고블린 200마리 처치. (미완료)]
[고블린 마법사 100마리 처치 (미완료)]
[고블린 전사 10마리 처치 (미완료)]
[고블린 샤먼 처치. (미완료)]
[보상 : 3층으로 이동]
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몬스터 처치 요구량.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고블린 샤먼?”
“고블린 마법사의 상위종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실 거예요. 왜요? 고블린 샤먼이라도 잡아야 해요?”
“네.”
“네?”
석찬의 대답에 이브가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고블린 샤먼이라면… 고블린 왕보다는 못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면 절대 못 잡는다고 알려진 몬스턴데….”
“하지만, 뭐 어떡하겠습니까. 탑에서 잡으라는데. 까라면 까야죠.”
“아무리 석찬 씨가 고블린 왕을 혼자 잡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저도 옆에서 힘이 되는대로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뭔가요?”
“이브 씨는 탑에서 나고 자라셨다고 들었는데,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한 3살 때부터였던가? 이상한 창들이 보여서 아버지께 여쭤봤는데 이 탑의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고요.”
이후로 사소한 대화로 어색함을 해소한 석찬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럼,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요?”
“예.”
마력을 옅게 퍼뜨린 석찬은 주변에 뭉쳐 있는 고블린들을 감지했고,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숲을 거닌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석찬이 신호했다.
“제 기준 북서쪽으로 약 90m 앞에 고블린 7마리 있습니다.”
“확인했어요.”
순간, 이브의 등 뒤에서 네 개의 화염구가 동시에 소환되었다.
‘빠, 빠르다.’
게다가 화염구 하나하나가 내포하고 있는 기운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역시 초록색의 마력 저장소.’
그렇다.
탑에서 태어난 이브는 알렉산더의 아래에서 걸음마를 떼었을 때부터 마력 운용을 배워왔다.
때문에 이브는 석찬보다 2살이나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것보다 두 단계나 높은 초록 단계의 마력 저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신체 능력치라면 몰라도, 마력의 절대량 하나만큼은 석찬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후웅- 콰앙!
‘크윽.’
짧은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폭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앞으로 143마리만 더 잡으면 되네요.”
무덤덤하게 퀘스트 창을 확인하는 이브를 바라보며 석찬이 멋쩍게 웃었다.
‘굉장한데?’
굉장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이브의 힘은 굉장했다.
아래층에서는 마치 치트키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강함.
알렉산더가 조용히 길러온 이브라는 존재였다.
* * *
이틀이 흘렀다.
‘오늘은 고작 40마리 정도인가.’
마력 감지를 활용해 몬스터를 찾는 것에는 그리 큰 지장이 없었지만, 문제라고 한다면 바로 몬스터의 수였다.
‘너무 적어.’
1층에서는 돌발 퀘스트라는 것이 있어 몬스터를 한 번에 많이 잡을 수 있었지만, 2층에는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부락이 있긴 하지만.’
거리도 거리였고, 모여 있는 몬스터의 수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마력 날개를 쓸 수 있다면 좋으련만.’
1층에 진입할 때 성공하긴 했다만, 그 이후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뭐,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천천히 생각하기로 다짐한 석찬은 적당히 안전한 장소를 물색해 노숙을 준비했다.
이브도 옆에서 능숙하게 장작을 모으고 천막을 펼쳤다.
‘지금 봐도 놀랍네.’
처음 이브가 노숙 준비를 도울 때까지만 해도 석찬은 솔직히 그녀가 별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영주의 딸이었고, 때문에 노숙 같은 것은 경험해 본 적도 없을 것만 같았다.
‘노숙 자주 해보셨나 봐요? 준비하시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신 걸요?’
‘탑은 못 올라도 아버지가 사냥이랑 수련은 계속 시키셔서요. 이런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이브의 노숙 경험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됐고, 석찬에게 야생에서 살아남는 데 중요한 것도 여러 개 알려주었다.
‘아마 이브 씨가 나보다 야생 경험이 더 많지 않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석찬은 식사를 준비했다.
깔끔하게 도축된 자칼 고기를 꺼낸 석찬은 미리 달궈놓은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모닥불 위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자칼의 뱃살을 바라보며 석찬이 생각에 잠겼다.
‘이브 씨는 도대체 왜 나랑 탑을 오른다고 했을까?’
이틀 동안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동안 본 결과, 이브의 힘은 엄청나다 못해 파멸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레벨도 100에 가깝다고 했으니.’
이제 겨우 49레벨을 달성한 자신과 비교해 레벨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초록 등급의 마력 저장소까지. 아마 20층, 아니 30층까지도 적수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석찬이 무한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플래티넘 테스트까지 거쳤다곤 해도, 지금 당장 이브와 비비기는 힘들었다.
‘그런 사람이 왜 나 같은 놈이랑.’
이제 어색함도 많이 사라졌으니 조금 있다 식사하면서라도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그였다.
식사 시간.
“흐음, 제가 석찬 씨와 같이 탑을 오르는 이유요?”
자칼 고기로 재현한 삼겹살 구이를 입에 문 이브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20년 넘게 있으면서 저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닐 테고, 영주님 성격 보니까 이브 씨가 부탁만 하시면 뭐든지 들어주실 거 같던데.”
“맞는 말이죠. 음, 뭐라고 해야 될까… 석찬 씨는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고요?”
“제가 감각이 조금 민감해서요. 뭔가 석찬 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같이 탑을 올라도 안전할 거 같다는 느낌이 팍 들더라고요.”
“그런가요?”
“믿기 힘드시죠? 아무래도 느낌이다 보니까….”
그녀의 말에 석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알렉산더 밑에서 나고 자란 이브다 보니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겠구나 싶었다.
“아뇨. 믿기 힘들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또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여쭤보세요.”
“예.”
* * *
다섯 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거대한 천막 안.
석찬은 천막을 정확히 절반을 가른 마력 칸막이를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누워 있었다.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천막 밖으로 몸을 옮겼다.
“시원하네.”
밖의 공기는 쌀쌀하지도 덥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잠시 잔디를 베개 삼아 누운 석찬은 별이 수놓아져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건 과연 진짜 하늘일까?’
이곳이 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바라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의 여유를 즐기는 사이였다.
캉. 캉.
어디선가 들리는 파열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블린 한 마리가 보였다.
“고블린이라.”
녀석은 이브가 쳐놓은 방어막을 넘지 못하고 석찬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키에엑.”
콰직!
가벼운 주먹질로 녀석을 잠재운 석찬은 잠시 더 밖에서 머물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여전히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수련이나 할까?’
열심히 해서 빨리 마력 저장소도 노란색으로 만들어야지.
마력.
이 세계의 마력이란 어떤 힘일까.
신체를 복구시켜 주고, 인간 이상의 힘을 내게 해주는 마력.
가부좌를 튼 석찬의 정신이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번쩍.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짐을 챙기고 있는 이브의 모습이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석찬의 물음에 이브가 고민하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제가 일어나고 나서 한… 두 시간 정도 지났어요.”
“두 시간이나요?”
“네,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시길래 집중하시게 그냥 내버려 뒀는데 제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죠?”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죠.”
“다행이네요. 아침밥은 차려 놓았으니까 나오세요.”
이브를 따라 밖으로 나서자 어제 먹다 남은 자칼 고기가 나왔다.
“고기가 맛있어서 양념을 조금만 쳐도 괜찮더라고요.”
불그스름한 것이 마치 한국의 양념갈비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의 고기.
‘이브 씨가 한 음식을 먹는 건 이게 처음인가?’
노숙 경험이 다분한 이브였기에 음식도 맛있지 않겠는가?
기대와 함께 석찬은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 *
그 시각. 영주성.
알렉산더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딱 쳤다.
“아, 맞다. 석찬이 녀석한테 그걸 말해주는 걸 까먹었네.”
그 모습에 옆에서 죽어라 체력을 단련하던 진현이 질문했다.
“헉. 뭐가요? 헉.”
“이브가 하는 음식은 어지간하면 피하라고.”
“왜요?”
“녀석이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요리 솜씨가 영 그래. 나도 한 번 먹었다가….”
마치 악몽을 떠올렸다는 듯 미간을 짚는 알렉산더.
“그렇게, 헉, 맛없어요?”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분명 안사람이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럼, 사부한테 물려받은 거겠죠, 뭐.”
“이 새끼가?”
난데없는 극딜에 알렉산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초 체력 단련 200개씩 추가.”
“에? 200개요?”
“멈추지 마라.”
“아니, 사부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제야 200개 할당량 다 채워 가는데 200개를 더 하라니요!”
진현의 반박에 알렉산더의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쓰으바아알!”
“그러게 누가 사부한테 개기래?”
진현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영주성을 가득 메웠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 어느새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