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그럼 행운을 비네.”
뒤를 돌아보던 석찬은 무언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뭔가?”
“그, 위에 층으로 올라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너무나도 예상 밖의 질문에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자네… 설마 모르고 있었나?”
“네. 몰랐는데요?”
“…….”
“1층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층의 클리어 조건이 분명 나왔을 텐데?”
알렉산더의 말에 석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전… 아, 그게 말이죠.”
석찬은 0층에서 1층으로 넘어올 때 초심자의 마을이 아닌 사냥터의 공중에서 소환되었었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알렉산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혜성이 자네였구만.”
“하하… 네.”
“그래, 그런 긴박한 상황이었으면 퀘스트를 못 봤을 수도 있겠군. 한 번 퀘스트 오픈이라고 생각해 보게나. 아마 그럼 그 퀘스트를 볼 수 있을 걸세.”
“퀘스트 오픈.”
그러자 퀘스트 창이 석찬의 눈앞에 나타났다.
[퀘스트 창]
[진행 중인 퀘스트 (1)]
[메인 퀘스트 –1층]
‘이건가?’
진행 중인 퀘스트에 있는 메인 퀘스트를 클릭하자, 퀘스트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인 퀘스트 – 1층 (플래티넘 전용)]
[문의 시험을 통과한 당신. 이제야말로 진정한 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탑을 올라라!]
[고블린 100마리 처치. (완료)]
[고블린 마법사 50마리 처치 (완료)]
[고블린 왕 처치. (히든)(완료)]
[보상 : 2층으로 이동]
[퀘스트 클리어라고 외치십시오.]
“어?”
“왜 그러나?”
“이미 클리어 조건을 만족했는데요?”
“그런가?”
“고블린 100마리랑 고블린 왕 처치라는데 이미 다 잡은지라.”
“그럼 잘됐군. 찰스한테 돈 받고 채비해서 바로 올라가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진현아, 너는 어떻게 됐냐?”
“…나도 클리어했어.”
“그래? 그럼….”
그때 진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응?”
평소에는 듣기 힘든 어두운 목소리에 석찬이 고개를 돌렸다.
“난 안 올라갈 거다, 석찬아.”
“뭐?”
진현은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너와 있으면서 깨달았어. 난 아직 약해. 이대로 너와 같이 있으면 민폐만 될 거야.”
“진현이 너….”
“난 여기서 실력을 조금 더 키울 생각이야.”
진현의 단호한 표정에 석찬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살펴보던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자넨 남아 있을 생각인가? 그럼 내 제자가 되는 게 어떤가?”
“예?”
“예?”
그 폭탄 발언에 진현과 석찬 둘 다 얼음이 되었다.
“왜? 비록 석찬이 자네 정도는 아니지만, 저 녀석만 해도 재능이 꽤 되는데. 뭐, 어차피 할 일도 별로 없는데 이정도야.”
그의 말에 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의 물음에 알렉산더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전에 질문이 하나 있네. 자네는 강해지려는 거지? 탑을 오르는 이유는 또 뭐고?”
“…지구에 놓고 온 가족이 있습니다.”
기습적인 알렉산더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진현은 침착하게 답을 이어갔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옆에 있는 저 새끼에게 뒤처지기 않기 위해서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단단한 진현의 눈빛에 알렉산더가 씩 웃었다.
“좋아, 맘에 드는 대답이었어. 부디 그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자네를 나 알렉산더 올가의 제자로 임명하지.”
그 말에 진현이 단박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결정이 빨라서 좋구만. 좋아. 대신 너무 진척이 안보이면 가차 없이 내쫓을 테니 그렇게 알게나.”
“알겠습니다.”
단숨에 이루어진 사제 관계. 그 모습에 얼떨떨해진 석찬이 입을 열었다.
“아니, 진현이한테 뭘 가르치실 겁니까? 마력 운용자셨으면 스킬도 없으실 텐데. 설마 체력 단련?”
“뭐, 그것도 시킬 거지만, 마력 운용도 조금 가르치려고.”
그 말에 석찬과 진현 둘 다 깜짝 놀랐다.
“예?”
“마력 운용을요?”
둘의 물음에 알렉산더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
“진현이가 잘 배울 수 있을까요?”
“너처럼 빠르진 않아도 다른 애들보단 나을 거라 보네. 그래서 가르치는 거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녀석들한테 알려주면, 죽는다.”
살기를 약간 담아서 하는 알렉산더의 말에 진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무… 물론이죠.”
“좋아. 이야기가 끝났으니 석찬이 자넨 빨리 올라가고. 진현이 자넨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수련을 시작함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얘기가 끝나고 찰스에게 45골드라는 거금을 받은 석찬은 부족한 장비를 맞췄다.
명패 같은 경우에는 탑을 오를 때마다 층에서 새로 발급받는다고 했다.
명패는 신분증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층에 있는 마을을 들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참고로 마을이 없고 사냥만 할 수 있는 층들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굳이 명패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알겠습니다.”
가장 좋다는 금색 명패를 만지작거리며, 석찬은 진현과 함께 말끔히 수리된 에브릭의 가게에 들어섰다.
“어? 벌써 수리가 됐어요?”
자리를 비운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헌데 2층짜리 건물이 벌써 부서지기 전의 제 모습을 되찾았다.
“하하! 마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지. 그보다 고블린 왕을 처치해 주어서 정말 고맙네! 마음껏 들게나! 돈은 받지 않겠네!”
그의 발언에 진현이 신나가지고 소리쳤다.
“좋아, 아저씨! 맥주 많이 주쇼!”
“너 말고 석찬이 얘기하는 거다 인석아.”
“에이씨….”
“하하. 농담이다. 맥주? 와인? 말만 해!”
“아저씨 대박!”
그렇게 먹고 마시며 화목하게 파티를 벌이던 와중 갑자기 누군가 가게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구시오? 미안한데 오늘은….”
“석찬 님!”
익숙한 목소리에 석찬이 밖을 내다보자 찰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뭡니까?”
“아, 석찬 님. 만찬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영주성으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죠?”
“영주님의 부탁입니다.”
간곡한 찰스의 부탁에 석찬은 에브릭과 진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게를 나섰다.
“감사합니다. 빠르게 이동하시죠.”
그렇게 영주성으로 돌아온 석찬은 곧바로 영주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알렉산더가 서 있었다.
“왜 부르셨죠?”
“그, 그게 말이네….”
그때, 알렉산더의 방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빠! 아, 석찬 씨!”
익숙한 여인, 이브는 석찬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갑자기 그에게 달려왔다.
덥석.
갑자기 석찬의 손을 꽉 움켜잡은 이브가 입을 열었다.
“석찬 씨!”
갑자기 일어난 돌발 상황에 석찬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옆을 살짝 보니 알렉산더의 얼굴도 완전히 붉어진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저도 석찬 씨와 같이 탑에 오르게 해주세요!”
“예?”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알렉산더가 한숨을 쉬며 어찌된 경황을 설명해주었다.
“하. 찰스가 네가 탑을 오른다고 이브한테 말했나보네. 녀석이 계속 너랑 탑을 오르겠다고 나한테 졸라대지 뭔가.”
‘그런 거였나.’
“그러니까 이브 좀 설득….”
하지만 알렉산더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저희 아버지 좀 설득해 주세요. 저는 꼭 석찬 씨와 함께 탑에 오르고 싶어요!”
“그걸 왜 저한테….”
굉장히 난감했지만, 정신을 차린 석찬은 이브에게 말을 건넸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죠?”
“왜 굳이 저랑 탑을 오르시고 싶은 거죠?”
가장 궁금하던 거다. 굳이 자신과 같이 탑을 올라야할 이유가 있을까?
그 말에 이브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석찬 씨는 강하시잖아요.”
강하기에 따라간다. 예상외의 단순한 대답에 석찬이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유예요?”
“네. 이전부터 계속 탑을 오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안 된다 하시고, 하지만 석찬 씨는 강하니까….”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석찬이 알렉산더를 바라보자 그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이브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무리 저 녀석이랑 함께해도….”
그의 말에 이브가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탑에서 아버지께 상처를 입혔던 사람이 몇이나 되죠?”
갑자기 훅 들어는 묵직한 질문에 알렉산더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크흠. 그건 내가 마력을….”
“그걸 감안해도. 저번에 석찬 씨가 잠들었을 때는 간만에 탑에 괴물이 들어왔다면서 완전 칭찬하더니만.”
“크, 크흠.”
그렇게 잠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알렉산더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에이, 그래! 알았다. 허락하마!”
“진짜요?”
“그래.”
“꺄! 아빠 사랑해요!”
그제야 이브는 불만이던 표정을 풀고 활짝 웃으며 알렉산더에게 달려가 안겼다.
“석찬이 녀석은 내일 올라갈 예정이라 하니, 너도 갈 거면 빨리 준비해야 할 거야.”
“네!”
이브가 탑을 오를 채비를 하러 방을 나갔다.
해일이 한바탕 휩쓴 듯한 방 안에는 석찬과 알렉산더 둘만이 남아 있었다.
“에휴.”
알렉산더의 깊은 한숨에 석찬이 몸을 움찔했다.
“석찬이 자네한테 이브를 좀 설득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만, 오히려 도움만 주었군….”
알렉산더는 품 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 피가 흐르는 놈인데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잠시 연초를 태우던 알렉산더는 이내 우울해졌던 표정을 풀고 진지하게 석찬을 바라보았다.
“석찬이.”
“예.”
“나한테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나.”
“뭡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브를 보호해 주게. 저 애가 저렇게 밝아 보여도 어미도 없이 불쌍하게 자란 놈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게나. 뒤풀이 중이었다는데, 방해해서 미안했네.”
“예.”
알렉산더의 쓸쓸한 모습을 바라보며 석찬은 그의 방을 나섰다.
다시 가게로 돌아온 석찬을 반기는 건 만취한 상태의 에브릭과 진현이었다.
혀가 배배 꼬인 진현은 헤벌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 석찬! 스승님이 뭐라… 셔? 딸꾹!”
몇 시간 전에 진지했던 진현은 어디 갔는가.
“별거 아니야. 오늘은 맘껏 마시자.”
“그래! 그런 의미로… 딸꾹! 맥주 한 잔 원 샷!”
그렇게 웃고 떠들며 행복한 밤이 지나갔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숙취 때문에 머리를 움켜잡은 진현과 함께 영주성 앞으로 이동한 석찬을 알렉산더와 이브가 반겼다.
“미리 나와 계실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오는 거였는데.”
“괜찮네. 우리도 방금 나왔어. 그나저나 1층에서의 마지막 밤은 잘 보냈나? 뭐, 진현이 녀석 상태를 보니 잘 지낸 것 같군.”
“그렇죠, 뭐.”
“좋아. 그렇다면, 이제 작별이군.”
“예.”
“우리 딸 눈에서 물 한 방울이라도 나오는 날엔 내가 다른 놈들한테 적발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넬 죽일 테니 명심하고.”
“아빠!”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알렉산더와 얼굴을 붉히는 이브를 보며 석찬도 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약속은 지키죠.”
“알겠네. 위층으로 가는 법은 간단하다네. 위층으로 올라간다는 생각과 함께 ‘이동’이라고 말하면 이동이 될 걸세.”
“알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나도 간만에 즐거웠어. 올라가다 가끔씩 들르게나. 나와의 대련은 언제나 열려 있어.”
“하하, 가끔씩 들르죠.”
진현 또한 입을 열었다.
“나도 곧 올라갈 테니 너무 게을리 하지 마라. 나한테 따라잡히는 수가 있어.”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그렇게 친우와도 작별을 마친 석찬은 완전 무장을 한 채 긴장한 이브를 바라보았다.
“가시죠.”
“네.”
“어, 잠만. 너….”
“이동!”
당황하는 진현을 무시한 채 석찬과 이브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렇게 이쁜 아가씨와 함께라니… 부러운 새끼….”
“자, 진현이 너도 쉬면 안 되지. 따라 와라. 당장 수련을 시작하지!”
“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