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두 남자가 숲을 거닐고 있었다.
진현은 이전보다 한층 더 거대해진 짐 덩이를 등에 멘 채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젠장할. 저딴 새끼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건틀릿에 대한 고마움은 가신 지 오래. 이미 속에는 석찬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래, 왕궁 안에서 잡은 놈들 시체 운반까지는 이해가 됐다. 근데 도대체 왜.
“왜 잡몹 시체들까지 챙기냐고!!”
진현의 외침에 석찬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네가 그랬잖아? 강화된 몬스터는 마석을 뱉는다고. 저놈들 전부 뒤지면 돈 꽤 나올걸?”
“으아아아아!!”
울분을 못 이긴 진현이 괴성을 난사했다.
‘내가 좀 심했나?’
확실히 고블린의 시체로 가득 찬 거대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진현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보따리는 하나고… 그래. 나한테 넘겨라. 어차피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들지 뭐.”
그 말에 진현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오 형님!”
“이럴 때만 형님이지 아주 그냥. 그거 이리 내.”
쾅!
진현이 메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자 바닥이 살짝 울리며 금이 갔다. 그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우 씨,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뻐근한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진현을 제치며 석찬이 보따리 손잡이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진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훗, 아무리 너라도 그 정도 무게는….”
“흣차.”
하지만 진현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석찬은 너무나도 쉽게 보따리를 들어버렸다.
“뭐라 그랬어?”
“…아니다. 빨리 가자.”
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새 숲을 빠져나온 석찬과 진현.
어젯밤 일어난 사투 때문인지 오면서 몬스터를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평원을 지나 둘은 마침내 초심자의 마을 방벽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 누… 으아니?”
입구를 지키던 가드가 석찬과 진현을 귀신 본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 당신들은?”
몸까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요?”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어이 거기! 근무 시간에 뭐… 으아니?”
그도 똑같이 진현과 석찬을 보더니 놀란 듯 뒤로 자빠졌다. 그는 잠시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확인하더니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마을의 영웅이시여!”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전부 일로 와보시오들! 영웅께서 돌아오셨다!”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씩 석찬과 진현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앞선 두 사람처럼 처음엔 놀라 뒤로 자빠지더니 이내 석찬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영웅이시여!!”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더니 석찬을 향해 환호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그러세요들.”
당황한 석찬과 진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양복과 올백 머리가 인상적인 한 노인이 수많은 인파를 뚫고 석찬에게로 다가왔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석찬 님, 그리고 김진현 님.”
남자는 정중하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예… 뭔지는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영주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오시죠.”
“영주님이요?”
“아, 제 소개를 먼저 하죠. 영주님의 비서, 찰스 데이먼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간곡한 부탁에 석찬과 진현은 결국 남자를 따라갔다.
“저기, 근데 영주님이 뭐 하는 분이십니까?”
석찬의 물음에 남자는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정확히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영주님께서는 초심자의 마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오신 분입니다.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율하시곤 하죠.”
진현 또한 귓속말로 영주에 대한 정보를 말해 주었다.
“게다가 에브릭 아저씨 말로는 영주는 엄청 강하대. 자기도 전성기 시절에 한 번 개겼다가 단숨에 찌발렸었대.”
퀘스트 랭킹에서 막판에 진현에게 밀리기 전까지 2등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에드워드를 능가하는 힘을 지닌 에브릭을 찌바를 정도의 실력자라니.
석찬은 의구심이 들었다.
“영주님께서는 이번 돌발 퀘스트에 참여하시지 않은 듯했는데?”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모든 퀘스트에 일절 참여하지 못하십니다.”
“왜 그런 거죠?”
“저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힘을 쓰시는 데 제약이 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브릭을 이길 정도의 실력자가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라.’
그렇게 궁금증만 영주에 대한 궁금증만 점점 커져갔다. 어느새 세 사람은 거대한 영주 성 앞에 도착했다.
남자가 가드에게 몇 마디를 하니 영주성의 거대한 정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자, 들어오시죠.”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와 가구들. 그리고 깨끗한 벽과 바닥.
성 내부는 상당히 깔끔했다.
복도를 걷던 중, 남자는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이 안에 영주님께서 계십니다.”
문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석찬 앞을 가로섰다.
“뭐죠?”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고 계신 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고블린 놈들 시쳅니다.”
그 말에 남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게 주시지요. 최고의 도축업자에게 손질을 의뢰해 놓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석찬은 고마운 마음으로 지고 있던 보따리를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무거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예? 어엇?”
보따리를 받아 든 남자의 팔이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가뿐하네. 그럼 이제 들어가봐도 되죠?”
“아… 물론이죠. 들어가시죠.”
석찬과 진현이 방 안에 들어간 뒤, 혼자 남은 남자는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헥, 헥,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비록 자신은 전투 계열이 아니라고는 하나 영주성의 일원으로서 일반적인 1층 주민들 평균 이상의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따리를 고작해야 1분 남짓 들었음에도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저걸 숲에서부터 메고 오는데 땀 한 방울 안 흘리다니… 역시 저자는 영주님 말씀대로….”
남자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이내 힘겹게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고 무거워라. 여봐라, 가드들보고 이것 좀 도축업자들한테 가져다주라고 전하거라!”
* * *
똑똑.
“들어오시게나.”
허가가 떨어지자 문을 열었다.
벌컥.
방 내부는 깔끔했다. 책상과 종이더미. 훈련 기구. 그리고 창과 베란다가 전부인 방이었다.
“어서 오시게나들! 내가 이 마을의 영주, 알렉산더 올가라네.”
자신을 영주라고 소개한 남자는 에브릭처럼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적발에 오른쪽 뺨에 긴 흉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하, 고블린 왕을 죽였다는 메시지를 보았네. 보고받은 바로는 남들은 전부 몸을 사릴 때 자네 둘만이 용감하게 고블린 왕 무리와 싸웠다고?”
“예. 저는 강석찬이라고 합니다. 옆의 제 친구는 김진현이라고 하고요.”
고개를 끄덕인 알렉산더는 석찬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흠. 강석찬, 자네가 이레귤러인가?”
“예?”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알렉산더.
석찬의 눈매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레귤러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의 말에 알렉산더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마력 운용도 익혔으면서 모른 척하지 말게나.”
‘뭣?’
마력 운용을 언급하는 알렉산더. 석찬은 긴장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하! 자네를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긴장하지 말게.”
알렉산더는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너무 약해 보이는데? 옆에 쭉정이는 도대체 왜….”
알렉산더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마력이 실린 주먹이 알렉산더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너무나도 가볍게 그 주먹을 손으로 잡아챘다.
“어이쿠, 무서워라. 그래도 주황 등급의 마력 저장소를 가지고 있다 이건가? 주먹이 꽤 맵구먼.”
“…….”
석찬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나.”
알렉산더가 손에 힘을 풀자 석찬은 빠르게 주먹을 빼 뒤로 물러섰다.
잡혔던 주먹이 시큰거렸다.
‘무서운 파워다.’
“너도 주황 등급의 마력 저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석찬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뭐,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알렉산더는 아주 살짝 붉어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난 자네와 같은 자들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다네.”
“그래서?”
“궁금하지 않나?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다네.”
석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준다는데 굳이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다만?”
“나와 겨뤄서 이기는 것. 그게 조건이네.”
알렉산더의 말에 석찬의 눈살이 좁혀졌다.
“분명 당신 비서라는 사람은 당신이 힘을 못 쓴다고….”
“하하!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자네를 상대하는 데는 문제없네.”
알렉산더는 어느새 당장이라도 한판 붙겠다는 듯 짙은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 안이 그가 내뿜은 살기로 가득 찼다.
“크흑.”
진현이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석찬은 빠르게 마력으로 자신과 진현에게 몰려드는 살기를 걷어냈다.
“호오, 내 살기를 걷어 내다니. 주황 등급을 봉으로 달성한 게 아니었군?”
알렉산더가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로 도발하기 시작했다. 석찬은 도발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야, 야. 정신 차려.”
“미… 친….”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정신을 잃은 진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호오. 그 녀석은 별로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군. 이레귤러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놈이 내 살기에 맞고도 짧게나마 정신을 유지하다니.”
“입 닥쳐.”
석찬의 몸에서 한층 짙어진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싸울 마음이 든 건가?”
석찬은 그저 가만히 알렉산더를 주시했다.
“싸울 생각이면 지하로 이동하도록 하지. 여기서 싸운다면 건물이 무너질 테니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석찬은 알렉산더를 따라 영주성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그저 강철로 덮여진 거대한 공간 하나만이 존재했다.
“하하, 여기가 바로 영주성의 훈련 및 대련장일세.”
“훈련 및 대련장?”
“그래. 주로 가드들의 훈련이나 등급 싸움에 쓰이지. 가끔씩 나도 몸을 풀기도 하고.”
알렉산더는 무기가 가득 채워진 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몸집만 한 대검 하나를 꺼내왔다.
“자네는 특별히 자네의 장비를 쓰게 해주겠네. 하하하!”
빠직.
석찬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하지만 터지려는 화를 꾹 참으며 알렉산더를 따라 대련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자, 룰은 간단하네. 먼저 의식을 잃는 쪽이 지는 것이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당신 걱정이나 하셔.”
석찬은 알렉산더에게서 약 10m 가량을 떨어져 선 뒤, 자세를 잡았다.
“원할 때 시작해도 되네!”
장난스럽게 외치는 알렉산더의 모습에 석찬이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알렉산더는 강했다. 마력은 몰라도 육체적인 스펙만은 확실히 석찬 본인을 뛰어넘었다.
‘그래도 녀석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제대로 자세를 잡고 공격을 준비하는 석찬과 다르게 알렉산더는 태연하게 대검을 든 채 서 있었을 뿐이다.
“간다.”
순간, 눈앞에서 알렉산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뭣?’
“까꿍!”
그의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
“잘 가게나.”
그의 주먹이 석찬의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이건, 못 피해.’
석찬은 빠르게 가드를 올렸고, 곧이어 알렉산더의 주먹과 그의 가드가 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