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왕궁 내부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화려하지 않은, 오히려 거대했던 왕궁의 외관치고는 소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겉모습처럼 투박하다고 할 수 있는 내부에는 가구 대신 검이나 창 같은 병장기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마치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그러게.”
가끔가다 고블린들이 습격할 때가 있었지만 석찬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5분 정도 왕궁 내부를 둘러본 석찬과 진현은 사람 키보다 약간 더 큰 문을 발견하고 그것에 다가갔다.
“여긴가?”
“그런 것 같은데?”
문 자체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나무였다. 하지만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손잡이를 잡은 손끝으로 엄청난 묵직함이 전해졌다.
“와씨. 야, 이거 안 열려.”
진현이 당겨보려고 노력했지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와봐.”
석찬은 자신의 머리 높이에 있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뭔 놈의 문이 이렇게 커?’
석찬은 손잡이를 쥔 손에 마력을 불어넣은 뒤, 힘껏 잡아당겼다.
“야, 이건 너라도 무리….”
쿠구궁-
하지만 진현의 걱정과는 무색하게 문은 잘만 열렸다.
“미친놈. 힘 스탯이 얼만 거냐?”
“90.”
그의 말에 진현이 크게 소리쳤다.
“90? 구라 치지 마!”
“맞아 구라야.”
“하하! 역시, 1층에서 스탯이 90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 끝까지 들어. 내 힘 스탯은 99야. 장비 효과 때문에.”
그의 대답에 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미친놈. 진짜 미친놈.”
“쨌든, 들어가기나 하자. 이제 고작 한 시간 10분밖에 안 남았어.”
“그래.”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가자, 공간 중앙에 놓인 거대한 왕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마치 트롤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고블린 한 마리가 턱을 괸 채 잠들어 있었다.
“저 녀석이 고블린 왕인가?”
띠링.
[보스 몬스터 출몰.]
[고블린 왕과 조우했습니다.]
[고블린 왕을 처치할 시 추가 포인트와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의.]
[도주를 강력 추천합니다.]
“거참 쫑알쫑알 시끄럽네.”
어쨌든 시스템 창을 보아하니 녀석이 왕이 맞는 듯했다.
왕좌에 앉아 있던 고블린이 입을 열었다.
“크르륵. 인간?”
순간, 진현과 석찬의 몸이 굳었다. 몬스터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다니?
“크륵, 분명 동족을 죽인 인간들은 모조리 죽었을 텐데? 설마 침입잔가?”
고블린 왕의 두 눈에서 거대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건….’
거대한 살기가 석찬의 몸을 짓눌렀다. 석찬은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려 살기를 상쇄시켰다.
“호오?”
자신의 살기를 한 번에 떨쳐내는 석찬의 모습에 고블린 왕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이번 침입자는 그래도 전보다는 낫구만. 켈켈.”
순간, 왕좌 뒤에서 네 마리의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저 녀석들이 호위들인가.’
녀석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만났던 몬스터들을 가볍게 뛰어넘는 거대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녀석들을 먼저 처리해 보거라, 침입자여.”
마치 약자를 보는 듯한 저 표정.
“고블린 주제에 건방지군.”
“건방진 건 너다, 침입자. 나의 호위들도 죽이지 못하면서 나한테 도전하려는 건 아니겠지? 켈켈.”
“켈켈켈켈!”
“켈켈켈!”
녀석이 웃자, 호위들도 따라서 석찬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래, 뭐 까짓것, 호위쯤이야.”
그때, 진현이 석찬의 팔을 붙잡았다.
“석찬아.”
“왜?”
“한 놈은 내가 상대할게.”
진현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그도 한때 석찬과 같은 무대를 밟던 권투 선수였다. 석찬에게 마냥 짐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괜찮겠냐?”
“그래, 일전의 싸움으로 나도 꽤 쓸 만해졌다고?”
진현을 지긋이 쳐다보던 석찬은 그의 눈에 담겨진 투지를 느꼈다.
진현도 프로였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알겠다.”
“고맙다.”
석찬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고블린 왕을 쳐다보았다.
“대화는 끝난 것이냐?”
“그래.”
고블린 왕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좋다, 그럼… 시작하지!”
순간, 호위 넷이 일제히 석찬과 진현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딜.”
석찬이 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네 마리의 호위 중 셋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옴짝달싹 못 했다.
“켁, 케겍.”
녀석들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찌된 것이 일어나려고 하면 몸이 자석처럼 땅에 달라붙었다.
“케겍!”
“시끄러워.”
손을 확 내리자, 호위 고블린들의 몸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그 모습에 고블린 왕이 벌떡 일어섰다.
“뭐냐, 침입자.”
고블린 왕의 물음에 석찬이 씽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뭣?”
“적한데 내 기술을 굳이 까발릴 이유가 있나?”
그렇다. 물어본다고 알려주는 놈이 바보인 것이다.
‘뭐, 그래 봤자 마력으로 찍어 누른 게 다지만. 알려줄 이유 따윈 없지.’
“한 놈은 진현이 녀석 거니까 내비 둔 거다. 진현아, 알아서 처리해.”
“고맙다.”
“케륵?”
남은 호위 녀석이 진현을 보더니 엉거주춤 무기를 들었다.
‘지금의 나라면….’
“케… 키에에엑!”
“흐아아압!”
진현의 건틀릿과 호위 고블린의 검이 맞부딪쳤다.
쾅!
강한 충격에 뒤로 밀려난 진현은 손목을 한 번 털어낸 뒤, 다시금 고블린에게 달려들었다.
“키에에엑!”
고블린 녀석도 방금 전의 합으로 진현의 힘을 파악한 것인지 이번엔 쫄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둘의 치열한 공방이 지속되는 동안 석찬은 여전히 왕좌에 앉은 채 미동도 안하는 고블린 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 이제 우리도 한판 해야지?”
“그래. 보아하니 그래야겠구나, 침입자여.”
왕좌에 앉아 있던 고블린 왕이 서서히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의 머리에 씌워진 황금 왕관이 유독 빛나 보였다.
“침입자는 오랜만이구나. 몇 년 전에도 겁도 없이 나에게 도전한 멍청한 녀석이 있었지.”
‘에드워드를 말하는 건가.’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아나? 내 애완견에게 물린 채 처절한 표정으로 달아났다.”
“애완견?”
“그렇군. 너에겐 소개를 안 했지. 칼! 이리 오너라!”
순간, 땅이 울리더니 집채만 한 늑대 한 마리가 달려왔다. 하얗게 드러낸 이빨이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내 애완견 칼이라네. 켈켈.”
침을 질질 흘리던 칼이 석찬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이쿠야, 조심하게. 이 녀석이 지금 한 사흘쯤 먹이를 안 줬더니 난폭해져서 말이야. 켈켈.”
“크롸아앙!”
칼은 순식간에 석찬에게로 달려가 한 입에 그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텅!
하지만 석찬은 가볍게 손으로 칼의 공격을 막은 뒤, 남은 주먹으로 녀석의 턱에다 강한 어퍼컷을 날렸다.
쾅!
“깨갱!”
큰 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에 쓰러졌다. 뇌에 충격이 간 것인지.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다가도 계속해서 쓰러지길 반복했다.
“얌전히 죽어라.”
마찬가지로 마력을 이용해 압력을 가했다.
“케, 케겡!”
칼의 몸이 마력에 점점 짓눌리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자 이제….”
“칼!!”
그때, 고블린 왕이 칼의 시체에게로 달려와 울부짖었다.
“큭.”
그 목청이 얼마나 큰지,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칼!! 네 이놈, 감히 칼을!”
흥분한 녀석이 석찬에게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큭….”
녀석의 주먹은 엄청났다.
재빨리 허리를 돌려 피해내기는 했지만 녀석의 주먹에 스친 뺨이 저릿했다.
‘빠르고, 강하다.’
“호위쯤이야 동족 중에서 아무나 강한 녀석으로 뽑으면 된다. 하지만! 칼은 아니다! 녀석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녀석이었다고!”
석찬은 즉시 온몸에 얇은 마력 층을 만들었다.
‘유지하려면 정신력 소모가 크겠지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것조차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가능한 저 무식하게 강한 주먹에 맞지 않으면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어라 인간!”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연격에 마력 층이 벗겨지고 씌워지길 반복했다.
‘제길, 뭐 이리 빨라?’
분노한 고블린 왕은 강했다. 만약 마력 저장소 등급이 빨강인 채로 왔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이런 흥분감은.’
선수가 되고 나서는 워낙 압도적인 재능과 힘을 바탕으로 모든 경기에서 이겨왔다. 대등하거나, 더 강력한 상대와의 싸움은 오히려 석찬에게 격한 흥분감을 가져다주었다.
‘집중하고, 침착. 패턴을 읽는다.’
고블린 왕은 현재 분노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그저 석찬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릴 뿐이었다.
페이크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오히려 피하기가 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주먹에 맞는 횟수가 줄더니, 어느덧 고블린 왕의 주먹은 석찬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좋아.’
석찬은 하반신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석찬이 순식간에 고블린 왕의 등으로 이동했다.
“크윽, 언제…?”
고블린 왕이 빠르게 허리를 돌려 팔을 휘둘렀지만, 석찬은 자세를 낮춰 가볍게 팔을 피해냈다.
“크륵.”
“넌 공격이 너무 뻔해.”
석찬은 주먹에 마력을 꾹꾹 눌러 담아 훅을 날렸다.
뻑!
“케륵…!”
훅이라고 해봤자, 석찬의 키는 고블린 왕의 가슴 높이. 하지만 그렇기에 석찬은 정확하게 녀석의 간을 때릴 수 있었다.
리버 플로우.
아무리 강한 인간, 심지어 수많은 경기를 겪은 베테랑 운동선수들도 리버 플로우를 잘못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수도 있다.
인간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가진 고블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야 고블린다운 소리가 나오는군.”
석찬의 비웃음에 고블린 왕의 이마에 거대한 핏줄이 돋아났다.
“네 이놈!”
자신이 누구던가?
고블린의 자랑! 고블린의 희망!
자신은 최강 아니던가?
동족 중 아무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더 강한 놈과 싸우기 위해 왕이 됐다.
왕이 되고 많은 싸움을 했지만 아무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인간들이 몇 번 쳐들어 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당히 녀석들을 물리쳤다. 그렇게 깨달았다.
본인이야말로 신이 창조해낸 최강의 생명체라고.
자신이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자가 분명하다고.
그래서 평소라면 별 상관없이 내버려 뒀을 것을 문제 삼아 인간들의 마을에 침략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이런 터무니없는 인간이 존재할 거라고 알았겠는가?
“아니다!”
고블린 왕이 석찬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최강이다! 최강이란 말이다!”
분노에 가득 차 눈앞의 인간을 공격했지만 주먹을 휘두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등 뒤에서 가증스러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했지. 뻔하다고.”
뻑!
“크헉!”
한순간에 무릎이 꿇렸다.
“이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군. 그동안 고개 드느라 힘들었어?”
이후로 석찬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퍽, 퍽!
“케르르….”
고블린 왕의 얼굴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광대뼈가 부서져 볼이 움푹 파여 있었고, 날카롭던 어금니는 반 토막이 난 지 오래였다.
의식을 잃은 눈동자도 이미 흰자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석찬은 마지막 일격을 위해 주먹에 마력을 축적했다.
밀도가 짙어지며 마력의 색도 덩달아 같이 짙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싸움은 오랜만이었다.”
석찬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잘 가라.”
콰앙!
압축돼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풀려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잠시 후, 석찬은 유유히 연기를 뚫으며 걸어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