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너무 놀라 말살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은 채 힘을 방출하고 있었다.
‘이익. 이…… 이거 몸은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당장 달려가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뿐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몸만이 스펀지처럼 대기 중에 떠있는 에너지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흡수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나중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마치 거대한 바다 위에 작은 스펀지가 하나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말살자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거대했고, 상대적으로 나란 존재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더는 받아들일 수 없어. 이대로 가다간 내가 오히려 힘에 먹히고 말거야!’
하지만 그 사이에도 내 몸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는데 이미 내 몸이 허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치를 넘어서 있었다.
근데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더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를 받아들인 그때 내 입에서 천부경의 구절들이 흘러나왔다.
아까는 입을 열고 싶어도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소리가 나왔다.
“하나에서 시작하나 시작함이 없는 하나이다. 삼극….”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말살자의 얼굴엔 더욱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는 모른다.
드디어 난 눈을 떴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나도 세상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게 말살자가 바라봤던 세상인 건가?
난 단순히 말살자의 힘만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가 가진 모든 걸 그대로 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눈에 보였고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도 알게됐다.
난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에 아까와 똑같이 서 있는 말살자를 바라봤다.
그의 힘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자신의 모든 걸 건네줬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눈앞에 서 있는 말살자는 아까와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건 껍데기만 그렇다는 걸 난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쌍하다거나 슬픈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그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인걸 알기 때문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런 것들을 알게됐다.
그때 말살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 같았다.
대견하다는 듯 날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드디어 입을 뗐다.
“정말 해냈구나. 너라면 해낼 거라 믿었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내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뭘 해야할지는 네 자유다. 난 네게 내가 가진 힘과 능력만을 줬을 뿐, 네 의지는 남겨뒀으니까!”
그리고는 한껏 홀가분한 얼굴로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드디어 제대로 쉴 수 있게 됐네. 그동안 제대로 된 휴가가 한 번도 없었거든. 이제부터 바빠질 너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이해해 달라고.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으니까.”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어떤 마음인지는 완벽히 이해됐다.
“좋아. 난 이쯤에서 퇴장하도록 할게! 너한테 큰 짐을 맡기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네겐 부하가 아닌 멋진 동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나처럼 외롭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서 다리부터 서서히 사라져갔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듯 사라지는 그를 보면서 말했다.
“고생했다. 휴가 맘껏 즐겨. 창조신을 만나면 고생시킨 창조신한테 욕 한바가지 퍼부어주고.”
내 말에 말살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하하하하. 그럴게.”
그러다 뭔갈 잊었다는 듯 급히 말했다.
“아! 내가 미처 말을 못했는데 아마 지금쯤 마인 세력과의 전투가 시작됐을 거야.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 공간은 현실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거든. 대충 너희 시간으로 이주쯤 지났을 테니 빨리 가서 수습해야 될 거야.”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말살자가 사라지는 걸 끝까지 봐야했다.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존재.
그런 그를 마지막까지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이제부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내 마음을 읽은 건지 눈에 고마움의 빛이 감돌았다.
어느새 그의 몸은 거의 지워져가고 있었다.
난 얼마 남지 않은 그를 보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잘 가라. 만나서 즐거웠다. 고생했고.”
내 마지막 인사를 들은 말살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웃기만 하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말살자가 사라지자 그가 만든 공간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말살자가 사라진 곳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 사이 나와 말살자가 머물던 공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날 막던 공간이 사라지자 더욱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있는 곳은 유럽의 어느 골목이었지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까지도 알 수 있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두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전세계의 모든 기를 느낄 수 있게 됐다는 게 정확하겠다.
역시 전투가 시작됐구나.
그리고 예상대로 한국에서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일단 저기부터 정리하자.
난 곧장 가장 전투가 치열한 한국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그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걸 이제는 너무나 쉽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공간을 열고 나타난 곳에는 예상대로 엄청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마인 세력의 정예와 그에 대항하는 연합의 핵심 세력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갑자기 내가 나타났다.
그냥 내가 나타났을 뿐인데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모두 날 쳐다봤다.
그만큼 내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엄청나다는 의미였다.
그때 날 알아본 이들 몇몇이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태준씨!!”
“형!”
“야, 이 새끼야!”
다양한 호칭으로 날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제야 내가 나인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말살자의 힘을 받은 다음에 내가 나 같지 않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아서 마음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는데 동료들이 날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늦어서 미안. 다행히 다들 무사했네.”
아무렇지 않은 내 인사에 절망에 빠져있던 그들의 눈에 급격하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럼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부터 정리를 좀 해볼까!”
그리고는 그 자리에 모여있는 절대자급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들을 모두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해도 모든 것들이 내 뜻대로 이루어졌다.
동료들을 지키고 있던 키라와 호루스, 그리고 용의 탈을 쓴 남자와 군사, 그리고 처음 보는 이들 몇 명이 내 주변에 나타났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소환한 날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 보자. 이들 말고는 이제 절대자급 힘을 가진 사람은 없겠지?’
난 주변을 슥 한 번 둘러봤다.
이들 말고는 절대자급의 힘을 가진 이는 없었다.
힘을 숨긴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 힘이 절대자급에 미치진 못했다.
다시 한 번 확인까지 한 나는 큰 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절대자들은 내가 모두 데리고 가겠다. 이제부턴 너희들의 싸움이다!”
그리곤 절대자들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들을 위해 우린 자릴 좀 비켜주도록 하자.”
그 말과 동시에 난 절대자급 힘을 지닌 이들을 선계로 이동시켰다.
선계는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이 차원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장소는 없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이동이 가능했다.
그리고 예전 천룡의 기억에서 본 것처럼 선계는 폐허처럼 변해있었다.
그때 검은 액체에 의해 감염된 신선 한 명이 날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미 감염된 지 오래되어서 이성이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워어어어!”
난 그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달려오던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흠. 이미 완전히 저 검은 생명체랑 완전히 동화가 됐구나.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겠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그의 몸에 자리 잡은 검은 액체를 소멸시켜버렸다.
그러자 검은 액체에 의해 조종받던 신선도 그 자리에 시체처럼 무너져 내리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뒤에 있던 키라가 물었다.
“너, ……말살자의 힘을 모두 이어 받았구나…….”
그제야 난 뒤를 돌아 내가 데리고 온 절대자급 힘을 지닌 이들을 바라봤다.
“니 말이 맞아. 난 절대자의 힘을 모두 물려받았어.”
그때 공간이 열리며 리치킹을 선두로 이 차원에 있는 다른 절대자들이 모두 모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내뿜는 기운을 말살자라 느낀 모양이다.
리치킹은 말살자가 아닌 내가 있는 걸 보고는 흠칫하며 놀랐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정확한 얼굴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상당히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흠. 이제 모두 모인 것 같네. 그럼 일단 정리를 좀 해볼까!”
“정리라면 무슨 정리를 말하는 거지? 설마 너 말살자의 의지까지 이어받은 거야?”
키라의 말에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말살자의 의지는 받지 않았어. 지금부터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완전한 내 의지야.”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이미 그들은 전의를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완벽한 말살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 내게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차원이 다른 존재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공격을 하던 내게 별다른 위협을 줄 수 없었다.
예전처럼 말살자가 완벽한 힘을 되찾지 못했다면 힘을 합쳐 대항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완벽한 힘을 되찾은 상태다.
그걸 알기에 그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릴 이렇게 모은 이유가 뭐야?”
키라의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인간들 일은 인간들에게 맡겨두자는 거야. 그리고 너흰 원래 있던 차원으로 돌아갔으면 해.”
말은 정중해 보였지만 이미 그들에겐 내 말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돌아가라고? 하지만 난 여기가 좋은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키라와 호루스가 동시에 말했고 다른 절대자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희가 이곳에 있으면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져.”
내 말에 키라가 즉각 반발했다.
“우리가 아무 관여도 안하면 되지. 그럼 되는거 아니야?”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너흰 아무것도 안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오래전에 너희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려봐. 그때도 너흰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말살자의 눈치를 본다고 아무것도 못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너희가 가만히 있는다고 인간들도 가만히 있었어?”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너희도 잘 알다시피 어느 순간 인간들이 너희를 신처럼 떠받들기 시작했지. 그럼 너희로 인해 새로운 갈등이 생기게 될 거야. 난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떠나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난 키라가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 이미 결정했어. 너흰 돌아가야 돼. 다만 예전과 달리 너희가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길은 열어놓을게.”
“길을 열어놓는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엔 호루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말 그대로야. 난 너희가 돌아가도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는 열어둘 생각이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