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아까 전에 들었을 때도 의아했지만, 다시 확실히 그의 제안을 듣고 나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왜? 혹시 이게 필요한 거야?”
내 말에 말살자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하며 웃었다.
“하하하. 그게 필요하냐고? 너 그게 뭔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세상에 그게 필요한 존재는 없어.”
“근데 왜 내게서 이걸 떼내주겠다는 거지?”
“그냥 호의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그의 말에 난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허! 호의? 너랑 난 적인데 적인 니가 나한테 호의를 베푼다고? 이건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 아니야?”
“하하하! 역시 쉽게는 안 넘어가네. 좋아. 네 말대로, 난 네 오른팔에 있는 그것들이 필요해.”
“이게 왜 필요한거지? 듣기론 이게 너무 위험해서 니가 직접 어딘가에 폐기했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그는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곤 말했다.
“그럴 때도 있었지. 말하다 보니 그때가 그립네…….”
잠시 그렇게 추억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리곤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그땐 그것들의 힘이 너무 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그럼 지금은?”
“그것들은 숙주를 잃게 되면 가지고 있던 힘을 소비해서 존재하게 돼. 그래서 숙주만 없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가진 힘이 약해지지.”
“흠…… 그래? 그리고 지금 그 힘이 충분히 약해진 상태라는 거야?”
내 말에 말살자가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니 말이 맞아. 지금은 그 힘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지. 그래서 내가 분리해 낼 수 있는거구 말이야.”
“그럼 이것들은 분리해서 뭐에 쓸건데?”
하지만 말살자는 유도심문에 말려들거나 하진 않았다.
“하하하. 그것까진 말해줄 수 없지. 근데 내가 뭘하든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니야? 넌 그저 그 오른팔에 기생하는 것만 없애면 되니까 말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말살자와 대면하고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좋아. 대신 몇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
내 말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뭐가 궁금한데?”
“먼저 니가 히든 보스야?”
난 단도직입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히든 보스가 뭐지?”
아! 그렇게 얘기하면 모르겠구나. 다른 걸 물어야겠어.
“니가 마인 세력에 있는 군사한테 지시를 하고 있는 거야?”
“맞아. 내가 그에게 지시를 하고 있어! 그는 나와 뜻이 맞는 사람이거든.”
“근데 왜 굳이 마인 세력을 조종하는 거지? 너 정도면 그냥 예전처럼 차원들을 합쳐도 되는 거잖아.”
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해.”
“곤란하다고? 왜? 혹시 아직 힘을 다 찾지 못해서 그런 거야?”
“힘이라…… 물론 힘도 중요하지. 그리고 지금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도 맞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곤란한 건 아니야.”
“그럼 뭣 때문인데?”
그는 대답 대신, 날 지그시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한테?”
“넌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던 거지?”
난 말살자의 시덥지 않은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열심히 하냐고? 그거야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죽음이라…… 그래…… 죽음은 두렵지.”
그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져서는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계속 기다리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다그쳤다.
“야! 생각은 나중에 니네 집에 가서 하고 곤란한 이유나 말하라고!”
그제야 말살자는 상념에서 깨어나 다시 날 바라봤다.
그의 눈은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좋아. 얘기해줄게. 근데 내가 너한테 진실을 말하면 죽음에 더 가까워질 텐데 괜찮겠어?”
“지금도 죽음이랑은 베프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내 걱정은 말고 얘기나 해.”
“니 결심이 그렇다면 말해줄게.”
말살자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한 걸 보고 나도 덩달아 긴장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넌 내가 누구라고 알고 있어?”
“너? 말살자잖아. 창조신이 최초로 만든 생명체.”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창조신이 최초로 만든 생명체지. 하지만 그건 나 혼자가 아니야.”
“혼자가 아니라고? 그 말은 너 말고 최초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더 있다는 말이야?”
“그렇지.”
역시 지난번에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었네.
난 지난 번 중국에서 키라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도 키라가 소문이지만, 말살자 말고 다른 최초의 생명체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었다.
“몇 명이나 더 있는데?”
“날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야.”
“그럼 널 빼도 네 명이나 더 있다는 말이야?”
“그래.”
말살자급의 존재가 네 명이나 더 있다는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근데 왜 세상엔 너만 알려진 거지?”
“다른 놈들은 나서길 귀찮아하거든.”
그의 말에서 약간의 적대감이 느껴졌다.
“어째 말에 가시가 있는데?” “그럴 수밖에. 내가 예전에 전 차원을 통합하지 못한 것도 그 놈들 때문이거든.”
“뭐?! 그럼 니가 그때 갑자기 사라진 게 다른 최초의 생명체들 때문인 거야?”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 나서지 않는 놈들인데 내 계획이 완성되기 직전에 그 놈들 때문에 좌절됐지.”
“그럼 말살자 조각이란건 대체 뭐야?”
“그때 그 놈들이 힘을 모아 내가 가진 힘과 능력을 조각조각 내서 전 차원에 뿌려버렸어. 그리고 내 몸은 봉인해버렸지.”
“봉인됐었다고? 근데 어떻게 봉인을 깨고 나온 거야?”
내 질문에 말살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러고보니 그것도 너랑 연관이 있네.”
“나랑 연관이 있다고? 그게 무슨……?”
“내 봉인을 깨준 게 바로 신기 노인이거든.”
“뭐? 신기 노인? 천의문을 만든 그 신기 노인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가 어떻게 내가 봉인 된 곳에 오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 그가 내 앞에 나타났지. 그리곤 몇 마디 얘길 나누다 갑자기 내 봉인을 풀어줬어.”
하지만 난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살자 급의 존재들이 만든 봉인을 일개 인간이 풀 수도 있는 건가?
“그 봉인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거야? 널 봉인할 정도면 엄청난 봉인인거잖아. 안 그래?”
“맞아. 내가 힘을 빼앗겼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난 존재자체로도 너희가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들을 뛰어넘으니까.”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그런 널 봉인한 봉인을 어떻게 한낱 인간이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냐 이 말이야!”
그때 내 말을 다 들은 말살자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한낱 인간이라고? 하하하하,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뭐지? 뭐가 더 있는 건가?
말살자는 내 표정을 보고 한동안 더 웃다가 말했다.
“그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야. 아니지! 애초에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고 봐야겠지.”
“뭐?!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고? 그럼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그는 조율자야.”
“조율자?”
이건 무슨 자가 이렇게 많아! 절대자, 말살자, 조율자. 헷갈려 죽겠네.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살자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조율자가 왜 생겨나는지 모르지만, 알려져 있기론 절대신인 창조주의 의지가 개입된 존재라고 알려져 있어.”
“창조주의 의지라고? 창조주는 전혀 개입을 안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아닌 거야?”
말살자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창조신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지. 내가 그 난리를 피웠을 때도 개입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조율자는 뭔데? 자꾸 헷갈리게 하지 말고 핵심만 말해!”
왠지 내가 놀라는 게 재밌어서 말살자가 말을 빙 돌려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 말에 말살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태초에 창조신에 의해 전 차원이 창조된 후 자신의 의지 일부분을 자신이 만든 세상에 남겼다고 해. 그리고 그 의지가 가끔 생명체 안에 깃들게 되는 거야. 우린 그렇게 신의 의지가 깃든 생명체를 조율자라고 해.”
“그럼 신기 노인의 몸에 신의 의지가 깃들었단 거야?”
“맞아.”
“근데 고작 의지가 깃들었을 뿐인데 그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치부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그는 또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의지라고? 하하하하. 내가 요 근래 들었던 말들 중 가장 재밌는 말이네.”
“그럼 의지가 들어가면 뭐가 달라져?”
“그건 다른 이의 의지도 아닌 창조신의 의지야. 그 의지는 모든 걸 가능하게 하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고?!”
무슨 초능력이라도 쓸 수 있다는 말이야 뭐야?
“창조신의 의지가 깃든 생명체가 지금까지 몇 있었지. 매번 그들이 원하는 건 달랐어. 어떤 생명체는 지혜를 원했고, 어떤 생명체는 권력을 원하기도 했지.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건 모두 다 이루어졌어.”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걸 창조신의 의지가 이루게 해줬다는 말이지?”
“맞아.”
“근데 그들을 조율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뭐야?”
“그건 그들 모두 결국 세상을 조율하는데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지.”
“잠깐 잠깐. 세상을 조율했다고? 어떻게?”
말살자는 잠깐 텀을 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의 의지가 생명체 안에 들어갔을 때는 언제나 그 차원에 엄청난 환란이 왔을 때였어. 그리고 그때마다 신의 의지가 깃든 생명체가 그 문제를 해결했지.”
“아! 그럼 그걸 조율이라고 부르는 거구나. 맞지?”
“맞아. 그리고 이번에 신의 의지가 깃든 생명체는 처음으로 힘을 추구했어.”
그건 내가 그의 무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말살자의 말을 통해 그가 어떻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천의권이라는 무공을 만들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게 모두 신기 노인의 안에 깃들어 있다는 창조신의 의지 때문인 것이다.
“그럼 니 말대로 신기 노인이 조율자라서 니 봉인을 깰 수 있었다는 거지?”
“그래. 일반적인 절대자들이었다면 절대로 그 봉인은 깰 수 없었을 거야.”
“그럼 신기 노인이 너희 최초의 생명체들보다 더 강하다는 거야?”
허나 말살자는 그 질문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내가 당시에 그를 봤을 때 강하긴 했지만, 딱 절대자 정도 수준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 창조신의 의지가 함께하고 있으니 그가 마음만 먹으면 끊임없이 강해질 테니까.”
난 말살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다른 걸 물었다.
“그럼 신기 노인은 널 풀어주고 나서는 어디로 간 거야?”
“난 그를 보자마자 그가 조율자라는 걸 알았지. 그래서 내 봉인을 풀어준 후 그에게 그가 조율자라는 사실을 알려줬어. 그는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후 사라졌어.”
“어디로 간다곤 얘기 안했어?”
말살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없었어.”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게 누군가를 찾아간다고 했는데…… 누구였더라…….”
“잘 좀 생각해봐. 그게 누군데?”
말살자는 한동안 끙끙거리다 기억난 몇마디를 내뱉었다.
“해…… 뭐였는데…… 해……해모……였나?”
“설마 해모수 말하는 거야?”
내가 놀라서 묻자 그가 손뼉을 짝하고 치며 말했다.
“맞다. 바로 그거야. 해모수. 그는 해모수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
신기 노인이 해모수를 찾아갔다고? 왜지?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