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난 검게 변한 오른팔을 바라봤다.
말살자가 이걸 가지고 왔었다고? 왜지?
표정을 보고 내 생각을 알아챈 키라가 먼저 말했다.
“말살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걸 가지고 온 건지는 몰라. 하지만 그 당시 말살자도 저건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뤘었지. 자칫하다간 자신조차 먹힐 수 있다면서.”
“말살자도 먹힐 수 있다고 했다고? 이게 그 정도의 존재인 거야?”
내가 놀라서 묻자 키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당시 말살자를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없었을 거야. 말살자가 했던 말의 의미는 힘을 키우면 자신도 잡아 먹힐 수 있다는 의미였겠지.”
난 그녀의 말을 듣자 의문이 생겼다.
“근데 보기만 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이걸 경계하는 거야? 아무리 말살자가 겁을 줬다고 해도, 니가 이 정도로 겁을 먹는 건 뭔갈 본거야?”
“봤지. 너무도 끔찍한 걸 봐버렸지.”
“대체 뭘 봤는데?”
“그날 말살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겁 없이 저것에게 접근한 이가 있었어. 정말 단순한 호기심에 살짝 만져본 것뿐이었는데, 순식간에 저것에게 잡아먹혔어. 그리고 새로운 숙주를 찾은 저 존재는 엄청난 위력으로 우릴 공격했지.”
“절대자를 숙주로 삼았단 말이야?”
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맞아. 그때 그 놈은 지금 너처럼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어. 그냥 저 존재의 꼭두각시가 돼서 닥치는 대로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을 공격했지. 어찌나 강했던지,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의 다른 절대자들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어. 결국 나중에 돌아온 말살자에 의해 숙주는 소멸됐지.”
“그럼 이 놈은 그 후 어떻게 됐는데?”
“숙주가 죽자 다시 검은 덩어리로 돌아간 저놈은 말살자에 의해 어딘가로 옮겨졌어. 그리고 다시는 못봤어. 방금 전까진 말이지!”
그렇다 해도 아직 키라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너무 거부반응이 심한데…… 혹시 다른 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내 질문에 키라가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숙주가 된 절대자와 싸우던 중, 저 존재의 파편이 내게 침투하려고 했었어.”
“그래?”
“아마 새로운 숙주를 찾으려했던 모양이야. 다행히 파편은 힘이 약했기 때문에 막아낼 수 있었지. 하지만 그때 파편을 통해 전해졌던 그 욕망은 너무나 끔찍했어!”
말을 하면서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키라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그걸 보고 완전히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왜 이 존재를 두려워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존재를 어떻게 없애는지는 모르는 거야?”
내 질문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없앤다고? 그건 없앨 수 없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건데 어떻게 없앤다는 거지?”
“그런가? 근데 검은 덩어리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냥 이름없는 원념들이 모여있는 것뿐이야. 아, 몰라몰라. 나도 이 이상 자세한 건 모르니까 그렇게 알고! 난 이만 갈게.”
“벌써 간다고?”
그녀는 다시 내 오른팔을 힐끔 쳐다본 다음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한순간도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저걸 보기만 해도 그때의 그 감정이 떠오른단 말이야!”
“알겠어. 그럼 가봐.”
키라는 공간의 틈을 열고 가려고 하다 날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내가 있는 곳으론 오지 마라! 그 팔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니까!”
그리곤 홱 하니 돌아서 공간의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키라가 저 정도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위험한 건가?
위험하단 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지만 저 정도로 반응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재 내 몸안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키라가 저 상태면 호루스도 별반 다를 거 없겠는데…… 그래도 한 번 가볼까?
난 일단 해진우에게 전화해서 현재 있는 곳의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 그들은 내가 지옥에 가기 전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난 즉시 아이즈로 그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있는 이동 포탈의 위치를 찾아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동료들은 다시 찾아온 날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호루스만이 날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너…… 너, 대체 어떻게……?”
난 그가 말을 다 끝내지 않았음에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했다.
“지옥에서 여러 일들이 있었어. 그래서 말인데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호루스는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키라처럼 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호루스와 얘기해본 결과 그도 이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이시스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본인의 기억이 아니다보니 키라만큼의 거부 반응은 일으키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걸 혹시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 말에 호루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안 떠올라. 이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미안함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난 오히려 괜찮다고 그를 위로했다.
“하하하, 그런 얼굴 안해도 돼. 난 멀쩡하니까. 혹시나 방법이 없을까하고 물어본 거야!”
그때 골목 끝 어둠 속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법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데. ……알려줄까?”
목소리가 들리자 나와 호루스가 동시에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골목 끝이 아니라 우리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보는 거야? 여기야 여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와 호루스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양쪽으로 거리를 두고 갈라지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하하하!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없애는지 알고 있다니까.”
갑자기 나타난 이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는 30대 후반 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살이 쪄서 배가 적당히 나와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외모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힘은 결코 평범한 게 아니었다.
“말……살자…….”
호루스의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에 난 호루스와 낯선 남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뒤늦게 놀라서 소리쳤다.
“말살자라고? 저 아저씨가?”
그때 낯선 남자가 호루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넌 이시스 아들이구나. 걔가 자식 농사는 잘 지었네. 날 아는 걸 보니, 이시스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지?”
말살자의 말에 호루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잠깐만! 니가 말살자라고? 진짜 말살자?”
내 놀란 외침에 말살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진짜 말살자야. 근데 왜 그렇게 놀라? 날 만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태연하게 말하는 말살자를 보며 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니가 진짜 말살자라는 거야? 말살자의 힘과 의지를 이은 존재가 아니고?”
그에 대한 대답은 호루스가 대신해줬다.
“저 자가 진짜 말살자야. 내 기억 속에 있던 얼굴과 완전히 똑같아.”
호루스의 말에 말살자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호루스 말이 맞아. 내가 진짜 말살자야. 니가 그토록 찾던 말살자.”
젠장.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말살자가 나오는 거야!
그때 내 뒤 공간의 틈이 열리며 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말살자를 보곤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역시…… 살아있었네.”
말살자는 키라를 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하지만 키라는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말살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절대자들도 말살자가 나타난 걸 알았는지, 내 주위에 하나 둘 나타났다.
곧 이 차원에 있는 절대자들이 모두 모였고 말살자를 에워싸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말살자는 그들을 보고 오히려 반가운지 하나하나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서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좋네. 근데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니들이랑은 다음에 회포를 풀어야겠다. 괜찮지?”
말살자는 웃으며 말했지만 거기 있는 누구도 그처럼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리치킹이 말살자에게 말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든 상관없다. 오늘, 우린 널 소멸시킬 것이다.”
중저음의 멋들어진 목소리로 선언하는 리치킹을 향해 말살자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린데 그런 험악한 말을 해야겠어?”
“험악? 니가 우리한테 한 일을 생각해봐! 그딴 소리가 나오나!”
하지만 그는 리치킹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다른 소릴 했다.
“어쨌든 얘는 내가 데리고 갈게. 급하게 헤어져서 아쉽긴 하지만, 우린 또 만날 자리가 있을 거야. 조만간 말이지. 그땐 찐하게 회포 한 번 풀어보자구!”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꼈다.
‘어? 왜 이러지?’
잠시 후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사라진 후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절대자들도 보이지 않았고, 동료들도 없었다.
그저 빛과 어둠이 섞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공간만이 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옆에서 말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락도 없이 이런 곳으로 끌고 와서 미안하군. 반가운 친구들이 저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좀 더 준비를 하고 만나는 건데 말이야.”
난 고개를 돌려 말살자를 바라봤다.
말살자의 모습은 아까와 그대로였지만, 전신에서 후광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자 말살자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하며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고 말했다.
“미안. 이건 이해 좀 해줘. 이 공간을 유지하려면 이런 식으로 내가 힘을 어느 정도 방출해줘야 되거든.”
“그건 됐고, 날 여기 부른 이유나 말해.”
“하하하. 듣던 대로 시원시원한 친구네.”
“듣던 대로? 나에 대해 누군한테 들은거지?”
내가 잔뜩 경계하며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이 공간에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너에 대한 건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었지. 너 몰래 여러번 와서 직접 보기도 했고.”
‘나 몰래 직접 봤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그런 쪽 취향은 아니니까. 그리고 스토커는 더더욱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을 보러 온 건데, 거기 니가 같이 있었던 것뿐이니까. 물론 한 번은 널 보러 간 건 맞지만 말이야.”
“시답잖은 소리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날 왜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니 오른팔에 있는 그거. 그거 내가 없애줄 수 있는데, 어때? 없애줄까?”
“뭐? 진짜로 니가 이걸 없애줄 수 있다고?!”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