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난 야구공만한 무의 정수를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해무율이 남긴 무의 정수라……. 대체 어떤 깨달음이 담겨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설랬다.
난 조심스레 노인의 손에 있는 무의 정수로 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잠시 망설이다 무의 정수를 덥썩 잡았다.
그러자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몸안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무의 정수가 손바닥 안으로 흡수됐다.
“헉!”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당황하며 헛바람을 집어삼켰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곧이어 일어났다.
갑자기 머릿속에 천의권이나 환영보와 관련된 새로운 구결들과 응용법들이 들어온 것이다.
그건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었다.
‘이……이게 무의 정수!’
해무율의 깨달음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흘러들어왔지만, 천룡때처럼 아프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머릿속에 깨달음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걸 다 이해하진 못했다는 거다.
‘역시 천재라는 건가? 어떤 부분들은 전혀 이해를 못하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 정수를 통해 내 실력이 한단계 이상 업그레이드 됐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가지 의문도 생겼다.
이정도 깨달음을 얻었다면 대체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인거지? 책에 쓰여 있기론 신기노인이 질투 때문에 제대로 안 가르쳐줬다고 했는데, 그 부족한 부분을 다 메꾸고도 이만큼이나 발전시키다니.
난 무의 정수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걸 다 받아들인 후 노인을 쳐다봤다.
근데 이상하게 노인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어? 어르신 몸이……!”
하지만 노인은 괜찮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괜찮네. 사실 내 몸은 아까 자네가 검무를 출 때 이미 사라졌었네.”
“네? 그게 무슨……?”
“허허허허.”
허나 노인은 웃기만 했다.
그때 물러나 있던 키라가 다가오며 말했다.
“저 인간은 대단하군. 마지막 순간에 저런 깨달음을 얻다니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다가오는 키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간단히 말해서 저 인간의 몸은 아까 니 마지막 기술에 사라졌어.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통해 진짜 자연과 하나가 돼버렸어.”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봐!”
그때 울고 있는 이혜나를 달래던 노인이 말했다.
“그분의 말대로라네. 자네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검무는 피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 난 모든 걸 내려놓고 자네가 추는 검무를 바라봤네. 자네의 검무는 너무 아름답더군? 그리고 바로 그때, 깨달음이 찾아왔네.”
“그 순간에요?”
“허허허! 깨달음이란 원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거라네.”
“그래서, 어떻게 되신 거에요?”
“내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자네의 검이 내 몸을 난자했네.”
노인은 내 검이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냈다는 말을 마치 다른 사람 얘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근데 어르신 기며, 존재감은 아까전과 똑같은데요?”
“말했다시피 자네 공격에 내 몸만 사라진 거라네.”
“그게 무슨……?”
“위대하신 분의 말씀대로 난 깨달음을 통해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됐네.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안 거지만, 내 육신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었던 거였지. 근데 그걸 자네가 없애줬으니, 난 이제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게 됐네.”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구요?”
“허허허. 그렇지.”
“그래서 이렇게 투명해 지고 계신 건가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울고 있던 이혜나가 노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이대로 가시면 어떻게 해요? 아직 할아버지랑 못해본 게 얼마나 많은데요.”
노인은 울고 있는 이혜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혜나야, 너는 알지 않느냐. 내가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걸. 그 말은, 내가 영원히 니 곁에 머물 수 있다는 말이란다.”
“흑…… 흑…….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이 모습은 다신 볼 수 없는 거잖아요!”
“모습은 중요한 게 아니란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혜나 너면서 그런 얘길 하는 게냐.”
“알아요. 알지만 할아버지가 사라지는 건 싫어요!”
“허허허. 말했듯이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란다. 니가 보고 숨쉬고 느끼는 모든 곳에 내가 함께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이제, 갈 때가 됐구나.”
노인은 이혜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내게 말했다.
“해무율 님의 뜻을 잘 이어받아주게나. 부탁하네! 그리고 혜나도 잘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노인은 내 말에 미소를 짓고는 마지막으로 이혜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엉……엉……할아버지……엉엉…….”
난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혜나를 달래주려다 그만뒀다.
그녀의 할아버지 육신을 없앤 게 나기 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키라가 말했다.
“정말 대단해. 그 정도 깨달음을 얻다니 말이야.”
“넌 어르신이 어떻게 된 건지, 완벽히 이해한 거야?”
“그 인간은 완벽히 자연과 하나가 됐어.”
“그럼 정령같은게 된 건가?”
허나 키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말 그대로 자연 자체가 되어버린 거야. 사실 나도, 실제로 저 정도 수준의 깨달음은 본 적이 없어.”
난 키라의 표정에서 그녀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울고 있던 이혜나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괜히 미안해서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혜나 씨.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하지만 이혜나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준 씨가 왜 미안해요. 그건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더 좋은 곳으로 가신 거기 때문에 괜찮아요. 제가 운건 더 이상 할아버지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니까…… 태준 씨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진짜 괜찮아요. 그보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요? 우리 할 일이 엄청 많은 걸로 아는데요!”
“……그렇죠…….”
“그럼 바로 가죠. 일단 여기 오셨으니 사람들한테 태준 씨부터 소개하기로 해요.”
하지만 난 그녀가 일부러 밝게 행동하려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해결해줬다.
이혜나는 할아버지를 잊기 위함인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내 존재에 대해 알리고, 내가 이끌고 있는 세력과의 연합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연합의 리더로 나를 추천했다.
그 말을 들은 이들 중 몇몇이 반대를 했지만 그녀가 할아버지가 적극 추천하셨다고 말하자 반대하던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다음 난 몽유도 사람들과 조한희에게 연합에 대해 얘기했다.
그들도 연합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내가 연합의 리더라고 하자 그들은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나서 연합의 핵심 인력들만 추려서 수차례 회의를 했다.
몇차례 회의를 거치며 의견을 조율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철저하게 세웠다.
일단 연합은 힘을 합쳐 최대한 마인 세력을 견제하기로 했다.
어차피 말살자 문제는 절대자들 수준의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각성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일반 각성자들은 마인 세력을 막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덕분에 내가 할 일이 많이 줄었다.
내가 공식적으론 연합의 리더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이혜나가 맡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난 그녀에게 루크레이지에 가있는 츤츤이와 짱짱 길드원들에 대한 정보도 넘겨서 그들도 계획을 짜는데 집어넣도록 했다.
이번 연합 일에는 조한희도 합류를 했다.
회사도 완벽히 자리를 잡았고 마인 세력을 막지 못하면 피앤씨 컴퍼니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외로 조한희와 이혜나는 합이 잘 맞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둘에게 일을 맡기고 난 말살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난 경기 인근에 있는 인적없는 산속으로 갔다.
다행히 키라는 진실의 눈을 더 관찰하고 싶다면서 이혜나 곁에 남았다.
산속을 조금 올라가자 꽤 넓은 크기의 공터가 나왔다.
미리 알아보고 온 곳이기 때문에 길을 헤매거나 하진 않았다.
난 화룡도를 소환해서는 망설임없이 단월을 사용해 차월의 벽을 갈라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게이트를 루크레이지와 연결했다.
벌써 츤츤이와 약속한 기간이 된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열린 게이트를 통해 제일 먼저 김신우와 최태산이 뛰쳐나왔다.
그리곤 둘은 앞에 있는 날 보곤 동시에 달려와서는 내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 새끼야! 그런 곳이면 진작 얘길 했어야지! 죽을 뻔 했잖아!”
“이 미친 새끼야! 그딴 곳으로 우릴 보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그들의 행색만 봐도 알 수 있다.
꾀죄죄한 몰골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살도 많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맑아져 있었다.
“하하하. 그래도 실력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야! 거긴 지옥이었어.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실력은 가지고 있어야지!”
“으으…… 상상도 하기 싫은 곳이었어!”
흠……그 정돈가? 이 정도 반응이 나올 정도로 이상한 곳은 아니었는데……
그때 짱짱 길드의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승민과 츤츤이가 동시에 게이트를 통해 돌아왔다.
현승민은 앞에 있는 날 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장.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역시도 엄청난 발전을 이뤘는지 느껴지는 기세가 엄청났다.
흐뭇하게 그를 보고 웃고 있는데 츤츤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냐.”
그제야 난 츤츤이를 돌아봤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어?! 왜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츤츤이를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전 이혜나의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 노인의 존재감은 자연과 동화되어 있어 잘 느낄 수 없었던 거라면 지금 츤츤이는 아예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눈앞에 서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몰래 뒤에서 다가온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그냥 별거 아니야. 거기 있다보니 재밌는 기술을 쓰는 놈들이 많더라구. 그 중에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지우는 기술을 쓰는 놈이 있길래 훔쳐 배워봤지. 어때? 꽤 괜찮지?”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이걸 만약 전투 중에도 유지할 수 있다면 활용도가 엄청나겠어. 나도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그게 뭐 어렵겠어. 대신 약속이 지켜지고 난 다음에 가르쳐 줄게.”
“약속? 아! 그거라면 나도 기대하고 있지. 지금 당장 할까!”
“그 전에, 일단 저 게이트부터 닫는게 어때?”
“아! 잠깐만!”
난 그의 말대로 열려 있는 게이트부터 닫았다.
그 사이 짱짱 길드원들과 김신우, 최태산은 나와 츤츤이가 싸운다는 걸 알고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공간을 만들어줬다.
게이트를 닫은 난 츤츤이 앞에 서서 화룡도를 소환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