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내가 알기로 말살자 조각은 말살자의 기운이 응축된 조각이다.
근데, 그걸 부수는 게 가능하다고?
“말살자라고 해서 무적의 존재는 아니다. 그가 강하다곤 하나 그 역시 피조물일 뿐이지.”
“그래서 말살자의 조각을 없애는 게 진짜 가능하다고?”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작은 조각일 때 없애는 게 더 편하지 않아? 작은 조각들을 부수는 게 더 편할 거 같은데!”
“그건 모르는 소리. 말살자의 조각을 부수기 위해서는 우리도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런 일을 여러 번 할 수는 없지.”
“희생?!”
허나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더 이상 입을 열거나 하진 않았다.
“얘기해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할 말은 끝난 거야?”
아무 말 없는 걸로 봐서 더이상 할 얘기는 없는 듯 했다.
“근데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이유가 뭐야?”
“그건 아직 니가 말살자 조각의 힘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각의 힘에 물든다고?”
“말살자의 조각들에는 말살자가 지니고 있던 그가 가진 고유의 힘이 들어가 있다. 허나 그건 현실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힘!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에 서서히 먹혀 들어가게 된다.”
“그럼 혹시 초월자들이 말살자 조각을 소유하면 어떻게 되지?”
그는 대답 대신 한동안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다그치듯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초월자들이 말살자 조각을 소유하면 어떻게 되냐고?!”
그제야 그는 내 질문에 대답을 했다.
“초월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초월자라는 건 너희가 강한 이에게 붙인 명칭일 뿐, 그들 역시 너희 인간과 똑같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말살자는 너희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지.”
“한 차원 높은 존재면 초월자들 중에 뛰어넘은 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아?”
그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으로 매워지는 갭이 아니다.”
“그래?”
“대신 말살자 조각이 초월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한다.”
“골치 아픈 일?”
“이미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말살자 조각까지 손에 넣게 되면 잡기가 더욱 어려워지지. 거기다 말살자 조각의 영향을 받아서 정신까지 약간 이상해지면 더욱 잡기가 힘들어진다.”
그때 내 머릿속에 탄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탄도 그래서 이상해진 건가?
무적자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니가 말살자 조각을 뺏은 탄이란 초월자도 그 조각 때문에 이상해진 것이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근데 왜 난 아무 이상이 없는 거야?”
“그건 니가 가진 힘이 워낙 미약했기 때문이지. 그러나 지금 다른 조각의 힘까지 흡수한 이상 너 역시 서서히 조각의 힘에 먹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지.”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뭔가 대비책을 세워야 해. 시간 내서 조각이 가진 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
“일단 그건 알겠는데…… 아직 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은 못 들었는데!”
“난 분명 니가 조각의 힘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게 끝이야? 좀 더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냐!”
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 말만 전해달라는 부탁을 들었을 뿐이다.”
“부탁을 들었다고? 누구한테?”
하지만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굳게 다물고는 묵묵히 날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가겠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난 그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남아 무적자가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무적자 말이 사실이라면 내 생각보다 말살자 조각을 소유한다는 게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겠어. 일단 히든 보스만 정리하면 이 힘을 꺼낼 방법을 알아봐야겠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난 얼른 조한희에게 연락을 했다.
“한희야. 다들 무사히 대피한 거야?”
[우린 괜찮아. 몽유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 그보다 그쪽은 정리가 끝난 거야?]
그녀의 질문에 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줬다.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정말 큰일인데…… 이번엔 민간인들 피해가 엄청날 수도 있겠어.]
“안 그래도 그래서 길드장들한테 최대한 몬스터를 잡아달라고 얘기해뒀어. 몽유도 무인들도 파견해놨고. 하지만 빠져나간 몬스터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야.”
[그래도 더 이상 게이트를 통해 나오는 몬스터는 없으니까 숫자만 줄이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닐 수도 있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키라가 있는 곳에 갔을 때 거기 있던 몬스터들이 엄청난 속도로 번식하는 걸 봤었어. 이것들도 빨리 잡지 않으면 번식해서 개체수를 늘릴 수도 있어. 그러기 전에 어서 씨를 말려야 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서 서둘러야겠네. 나도 다른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게.]
조한희와 전화를 끊고 난 뒤 난 곧바로 럭키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알린 후 즉시 몬스터들의 위치를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흠. 츤츤이도 불러야 하나?
지금 상황은 한 명이라도 손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츤츤이는 히든카드로 남겨둬야 돼. 앞으로 마인 세력 군사라는 놈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내 패를 다 까보일 순 없지.
그 후 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모두 동원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몬스터들을 잡아 죽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을 모아보면 꽤 많은 몬스터를 잡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몬스터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수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에서는 연일 몬스터에 의해 사망한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덕분에 치안은 땅에 떨어졌고, 길드들에 대한 신뢰도 역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문제는 죽인 몬스터들 중 랭커는 하나도 없단 사실이다.
아마도 그 놈들은 지옥의 대마신들이 오기 전까지 숨어있을 생각인 것 같았다.
“어서 그 놈들을 찾아야 되는데…… 대체 어디서 찾지?”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끙끙대고 있는데 조한희한테 연락이 왔다.
“어, 한희야. 어쩐 일이야?”
[태준 씨. 지금 뉴스 봤어?]
“뉴스? 아니, 안봤는데. 무슨 일 있어?”
[어서 뉴스 한 번 봐봐.]
“알았어. 일단 끊어봐.”
난 즉시 아이즈로 뉴스 채널에 접속했다.
뉴스에선 처음 보는 이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파란 눈에 숏커트 한 금발 머리를 가진 지적으로 보이는 서양 여자였다.
[……말씀을 들어보면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의미인데 어떤 식으로 안전을 보장해 주실 건가요?]
[저희 엠아이(MI)와 계약을 체결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 순간부터 저희 엠아이가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계약만 체결하면 되는 건가요? 안 그래도 요즘 몬스터로 인한 사건사고가 많은데 이렇게 치안이 불안한 상황에서 좋은 대안이 될 것 같긴 하네요. 그럼 어느 정도 등급 몬스터까지 케어가 가능한가요?]
[기본 S등급 몬스터까지는 모두 케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불안하시다면 서비스 등급을 높이시면 됩니다. 그럼 최대 SSS등급 몬스터까지 케어가 가능합니다.]
그녀의 말에 질문을 하던 앵커는 과장되게 놀란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SSS등급까지 케어가 가능하다니 정말 놀랍네요. 대신 비용이 엄청나겠는데요?]
앵커의 질문에 금발의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비용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길드에 지불하고 계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까요.]
[네? 그 비용보다 저렴하다구요?]
[네. 그리고 저흰 한 달간 무료 체험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그거 정말 놀랍네요. 저도 당장 엠아이(MI) 무료체험을 신청해봐야겠어요.]
그리곤 인터뷰가 끝났다.
난 다시 조한희에게 전활 걸었다.
[태준 씨. 인터뷰 봤어?]
“어. 보긴 했는데 저거 그냥 보안 회사 아니야? 길드들로 보안이 케어가 안 되니까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온 거 같은데?”
[인터뷰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응? 그게 다가 아니라고?”
[아무래도 저 엠아이라는 회사가 마인 세력과 연관돼 있는 것 같애.]
“뭐? 마인 세력이라고? 근거는 있어?”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거지만 저 엠아이라는 회사의 전신은 사이비 종교야.]
난 뜬금없이 사이비 종교란 얘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사이비 종교?”
[그래. 그리고 그 종교가 믿고 있는 신이 마인과 굉장히 닮아있었어.]
“잠깐잠깐! 넌 그런 걸 언제 다 조사한 거야?”
내가 알지 못한 정보가 갑자기 들어오자 난 살짝 당황해서 그녀에게 급히 물었다.
[사실 태준씨한테 도움이 좀 될까 싶어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했거든. 물론 럭키한테 부탁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다양한 채널로 조사하는 게 정확도를 더 높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아! 그러다가 알게 된 거야?”
[응. 내가 처음 그 사이비 종교를 접했을 때는 신도도 얼마 없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 근데 우연한 기회에 정보를 얻고 조사를 하다보니 그들이 믿는 신이 마인과 너무 흡사한 거야. 그들이 경전으로 사용하는 책의 내용도 내가 알고 있던 마인의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했고 말이야.]
“근데 왜 갑자기 사이비 종교가 보안회사가 된 거야?”
[그것까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어. 계속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야. 중요한 건 이 사이비 종교의 세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했어.]
“갑자기?”
[응. 그리고 뜬금없이 보안회사를 차리고는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하는데 내가 안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그러니까 나보고 거길 좀 알아봐 달라는 거구나. 그치?”
[호호호.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보안이 철저해서 더 자세한 것까지는 알아내기 어렵더라구.]
“좋아, 그건 나한테 맡겨둬. 근데 지금은 그것보다 몬스터들부터 정리하는 게 우선이야.”
그리고 나와 조한희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한참 동안 이야길 나눴다.
하지만 결론은 지금으로선 이렇다 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흠…… 최소한 랭커들이 숨어있는 곳만 알아내도 대충 사건이 마무리가 될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나도 좀 더 알아볼게. 태준 씨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너도 몸 조심하고.”
조한희와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난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난 무심코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곤 깜짝 놀라 소리쳤다.
“탄?!”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