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난 발끈하며 키라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왜 미끼야? 어?!”
하지만 키라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니가 말살자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이유만으로 나보고 미끼가 되라고?”
“그렇게 열 낼 필요 없어. 미끼라고 해도 지금과 달라지는 건 전혀 없으니까. 오히려 너한텐 더 좋은 일일 테니까.”
“좋은 일?”
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되묻자, 키라가 설명을 시작했다.
“어차피 그대로 있어도 언젠가는 말살자가 널 찾아오게 될 거야. 아무리 니가 대단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살자는 차원이 다른 존재. 너 정도 죽일 방법은 많겠지! 우린 그런 널 보호해주겠다는 거야.”
듣고 보니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얘기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말살자는 확실히 날 찾아올 것이다.
그땐 나 혼자 말살자를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내가 가진 모든 세력을 다 동원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절대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그녀는 내가 동의하자 손뼉을 짝하고 치며 기뻐했다.
“호호호. 니가 할 건 없어. 넌 그냥 평상시대로 지내면 돼. 내가 몇가지 마법을 걸어둘 거야.그걸로 말살자가 널 공격한다면 우리가 바로 알 수 있지.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기습 공격으로 단숨에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보호 마법도 좀 걸어둘게.”
그리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일사천리로 내 몸에 갖가지 마법을 시전했다.
“이…… 이게 무슨……?”
“그래야 갑자기 죽는 걸 막을 수 있지.”
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내 몸을 바라봤다.
빛은 잠시 후 사라졌지만, 내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이거 다른 적한테 공격받아서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허나 키라는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안해도 돼. 공격을 받아 파괴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겨날 테니까.”
“그래?”
난 신기한 얼굴로 내 몸 곳곳을 살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치킹이 나섰다.
“그럼 일단 저 인간이 말살자를 유인할 미끼가 되는 걸로 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다음 안건은 평화협정에 대한 내용이야.”
그가 제시한 다음 안건은 평화협정이었다.
“아무래도 말살자 문제가 처리될 때까지 되도록 우리끼리 전쟁은 피하는 게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야.”
하지만 그 의견에 대해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리치킹의 제안에 지금까지 입을 연 적 없는, 전신이 털로 뒤덮인 절대자가 바로 반박했다.
[굳이 그래야 하나? 혹시라도 말살자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을 텐데! 그럴 바에야 미리 우리끼리 서열을 확실히 정하고 세력을 구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전력은 적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면 말살자를 막기가 더 힘들어질 거야.”
[말살자를 막는 데는 우리 절대자들의 힘만이 필요할 뿐, 벌레 같은 부하들 도움은 전혀 필요 없어. 그러니 우리 세력싸움이 멈출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문제에 대해 또다시 절대자들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그리고 결국 지금까지처럼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다.
대신 말살자 문제가 처리되기 전까지, 절대자들끼리는 싸우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대충 마무리가 되자 리치킹이 마지막 안건을 꺼냈다.
“마지막 안건인데 말살자의 추종자들에 대한 처리다. 그들은 말살자가 죽건 죽지 않건, 어떤 이유에서건 이 차원으로 넘어오는 걸 멈추지 않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허나 이 안건에 대해선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의아한 눈빛을 호루스에게 보내자 그가 작게 설명을 해줬다.
“니가 알고 있는 플뤼톤 같은 말살자 추종자들은 여기 있는 개개인보다는 강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말살자 급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절대자 둘만 합쳐도 충분히 그들은 상대할 수 있거든.”
“그래서 다들 이렇게 시큰둥한 거야?”
“그렇지. 말살자가 없는 그들만으론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물론 그들이 한데 뭉쳐서 우릴 공격한다면 위협적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살자가 주는 위협에 비할 순 없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하더라도 인간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들을 막거나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돼. 차원의 벽이 뚫릴 때까지 2-3주 정도가 걸린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방법을 생각해 내야겠어! 안 그럼 인간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거야.’
호루스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말살자의 추종자들에 대한 대응은, 그들이 넘어오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반응하는 걸로 결론지어졌다.
“그럼 회의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다들 우리의 최우선 목적은 말살자를 제거하는 거라는 거 잊지 말고, 말살자가 나타나면 최우선적으로 모이는 걸로 하자구.”
리치킹의 말이 끝나자 대부분의 절대자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마,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리에 남은 건 호루스와 키라, 리치킹과 마인,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그때 나와 싸운 이후 아무 말이 없던 마인이 내게 다가왔다.
난 다가오는 그를 보고 살짝 긴장하며 쳐다봤다.
내 앞까지 걸어온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넌 천의문과 어떤 관계지?”
그의 입에서 뜬금없이 천의문이란 이름이 튀어나오자, 난 깜짝 놀랐다.
“니가 천의문을 어떻게 알아?”
“잔말 말고, 어떤 관계인지나 말해.”
뭔가 있나보네.
질문을 하는 마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과 승부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난 천의문 4대 계승잔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내 말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천의문을 만든 자와 싸운 적이 있지.”
“천의문을 만든 자와 싸웠다고? 그럼 신기노인을 만난 적이 있단 거야?”
그는 신기 노인이란 이름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신기노인…… 그런 이름이었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세상에 나오게 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신기노인 때문에 세상에 나오게 됐다고?”
“난 사실 세상을 정복하고 하는 것엔 별 관심이 없어. 나이를 잊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그런 것들엔 욕심이 없어졌지.”
“근데 마도천하는 뭐야? 듣기론 니가 마도천하를 외치며 모든 이종족들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던데?”
마인은 내 말을 듣고는 한참을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마도천하라. 그건 내가 만든 말이 아니야.”
“니가 만든 말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그건 모두 군사의 작품이지.”
“군사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군사는 합류한지 얼마 안됐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역사를 조작할 수가 있는 거지? 글로 써진 내용이야 조작할 수 있다 쳐도 대마녀의 기억까지 조작할 수는 없을 텐데!”
마인은 이번에도 한참을 웃다가 말을 했다.
“군사가 합류한지 얼마 안 됐다고?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틀린 말이라고?”
“군사가 나와 함께 한지는 벌써 이천년 가까이 되지.”
“이천년이라고? 대체 그자는 정체가 뭐길래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거지?”
“군사의 정체는 나도 정확히 몰라. 하지만 내가 마도천하를 외치고 이종족들을 통일하려고 했던 것도 모두 군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힘을 가진 건 그인데 왜 군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거지?
그는 내 생각을 간파했는지 곧바로 내 궁금증을 풀어줬다.
“말했듯이 난 정복 전쟁엔 전혀 관심이 없어. 내 목적은 오직 하나. 천의문과의 승부뿐이지.”
“그러니까 천의문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내 질문에 마인은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천 년 전 산 속 깊은 곳에 살던 내게 낯선 이가 찾아왔지. 그는 자신을 신기노인이라 칭하며 천의문의 창시자라고 했다. 그리곤 내게 대뜸 대련을 신청했지.”
“아무 이유도 없이?”
“나도 이유가 궁금해 물었지만 그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며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했지. 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그의 공격에 대응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10분도 되지 않아 패배했지.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다시 그에게 대련을 하자고 말했지. 하지만 다시 도전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어. 난 믿을 수 없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그때 그가 내게 말했어.”
“뭐라고?”
난 신기노인이 뭐라고 했을지 너무 궁금해서 얼른 그를 재촉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싸워본 이들 중 가장 강한 존재군. 그대가 더 강해진 후 꼭 다시 싸워봤으면 좋겠네.’라고 말이지.”
“그럼 설마 그 약속 때문에 그를 찾으려고 세상을 휘젓고 다닌 거야?”
“그 약속은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약속이다.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이 살아가던 내게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준 게 그의 그 말이니까.”
마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
“난 신기노인에게 패한 후 수백 년을 더 수련하고 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와 신기노인을 찾았다.”
“잠깐! 신기노인은 인간인데 수백 년 후에 나와서 그를 찾는다는 게 말이 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하하하하, 신기노인을 설마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는 이미 날 만나던 시점에도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었어. 노화 정도야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지.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할 수 없을 리 없으니까.”
노화까지 조절한다고? 그럼 완전 신이랑 다를 바 없는 거잖아!
내가 그 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신기노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지. 혹시나 그의 후계자를 만나면 사정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찾아봤지만, 그마저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어. 그러던 어느날 군사가 날 찾아왔다.”
“널 찾아왔다고? 아무 활동도 안 했는데?”
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인간이나 다른 이종족들과 마찰이 있긴 했지만 큰 소란이 일 정도는 아니었고 그들을 죽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지.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군사는 날 찾아와서는 신기 노인을 찾아 줄 테니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했어.”
“그런 걸 군사라는 놈은 어떻게 안 거지?”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신기노인을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니 날 만나게 된 거라고 말이야.”
“뭐? 그 군사라는 놈도 신기노인을 알고 있다고?”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