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그때 김지현과 최태산이 우릴 향해 걸어왔다.
걸어오는 그녀 걸음걸이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제대로 힘을 흡수한 모양이다.
“잘 해결된 모양이네. 잘 됐어.”
그녀는 흐뭇해하는 날 보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했다.
“도움 감사해요. 덕분에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아, 그런데 몸 안에 있던 그 힘은 어디서 얻은 거야? 보아하니 원래 가지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우연히 얻었어요. 출처는 말해드리기 곤란하네요.”
난 그녀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쓰러져 있던 짱짱 길드 길드장이 정신을 차렸는지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정신을 차린 그는 어찌된 일인지 잠시 사태를 파악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맞은 복부에 통증이 남아있는지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일어난 그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대뜸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오늘부터 대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기면 수하가 되는 조건이긴 했지만 막상 돌변한 그를 보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어…… 그래.”
내 승낙에 그는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 현승민이라고 합니다. 대장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뭔가 말투가 어색했지만, 딱딱한 표정과 어울려 괜찮아보였다.
“난 박태준이야.”
“그럼 오늘부터 박태준 대장이 저희 길드 길드장이십니다.”
갑작스런 전개에 난 급히 손사레를 쳤다.
“자…… 잠깐만! 그건 아니지!”
내가 급히 거부 의사를 내비치자 그가 약간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희 길드에 들어오기 위해 오신 거 아니십니까?”
“그건 맞는데 그렇다고 길드장이 되는 건 좀 아니지. 내가 너희 길드에 안 들어가도 니가 내 수하인 건 변함없는 거 아니야?”
그는 내 말을 듣고는 내 의중을 파악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시는 말씀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대장 말씀대로 길드는 계속 제가 이끌고 저희 짱짱 길드는 대장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건 저와의 승부에서 계속 이겨야지만 유지되는 조건입니다.”
생각보다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은걸! 쓸데가 많겠어.
“언제든지 도전해. 자신 있다면 말이야.”
그때 김신우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둘 사이 관계도 어느 정도 정리 된 것 같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나?”
“그러죠. 아까 듣지 못한 얘기들도 있으니까.”
회의를 한다고 하자 김지현은 수련을 한다며 다른 곳으로 갔고, 그녀를 뺀 나머지 인원은 한쪽에 마련된 컨테이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사무실처럼 잘 꾸며져 있었는데 밖에서 보던 것보다 공간이 훨씬 넓어보였다.
“저기, 질문이 하나 있는데 이 안은 어떻게 된 거죠? 밖에서 보던 곳보다 안이 훨씬 넓은 것 같은데요?”
내 질문에 김신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짱짱 길드에 공간 확장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있거든. 그녀의 능력을 빌려서 만든 거라네. 사실 이 광장도 실제론 이렇게 큰 공간은 아니야. 다 그녀의 능력 덕분이지.”
공간 확장 능력이라고? 그런 능력도 있었나?
난 신기해하며 사무실 안을 잠깐 둘러보고는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자 현승민이 말했다.
“대장.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선 대충 김신우에게 들었을 테니 궁금한 걸 먼저 물어보시죠.”
“좋지. 내가 제일 궁금한 건 너희가 라시나에서 나온 이유야. 힘의 논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라시나인데 절대자라는 최강자를 섬길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는 내 말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 인간이 사자나 호랑이가 강하다고 그 짐승들을 숭배합니까? 절대자들은 사냥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왜 라시나를 나왔는지 이해됐다.
“그건 알겠고 여기 숨어 있는 이유는 뭐야? 라시나 눈을 피해서 여기 숨어 있는 거야?”
“라시나도 라시나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마인을 따르는 십이지신입니다. 생각보다 그놈들이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보안상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임시 아지트를 마련한 겁니다.”
“흠……그럼 밖에서 훈련하고 있는 길드원들에 대한 조사도 다 끝난 거야?”
“네. 약간이라도 의심이 가는 이들은 모두 배제했고 신원과 그간의 행적이 확실한 이들만 추려서 데리고 온 거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나 말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그동안 나 혼자서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막을지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함께 갈 이들이 생겼다.
하지만 방심하면 절대로 안 된다.
지금까지 십이지신 무리의 행동을 봤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배신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나중에 한희랑 같이 얘길 해서,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확인해 봐야 겠어.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번 질문에는 김신우가 대답을 했다.
“가장 시급한 건 전 세계에 있는 다른 길드장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거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들을 한 곳에 모을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지. 혹시 무슨 방법이 없겠나?”
김신우의 말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야. 라시나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다른 나라에 있는 길드들도 이 사실을 알긴 해야 돼.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도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걸 거야. 근데 지금 전쟁 중인 곳도 있기 때문에 다들 모이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나도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나도 별다른 수가 없는 듯 보이자 김신우가 다른 안건을 꺼냈다.
“그 문제에 대해선 다들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하고 일단 다른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다른 일이라면 어떤……?”
“그 전에 자넨 우리와 함께 할 건가?”
“같이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일단 목적은 같으니 함께 한다고 봐야겠죠. 사실 저도 마인 세력에 대해선 예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알고 있었다고?!”
김신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건 정찬호도 마찬가지였다.
“네. 사실 전 마인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는 건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곤 그간 만난 십이지신과의 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길 해줬다.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들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갔다.
“여기까지가 제가 지금까지 겪은 일이에요.”
“그럼 자네는 앞으로 어쩔 생각이었나?”
“원래 제 생각은 절대자들의 균형을 맞추면서 마인 세력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강한 세력을 키우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세력을 이용해 마인을 제거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라시나가 절대자들과 손을 잡고 그 사이에 마인이 끼어 있는 복잡한 상황이라면,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겠네요.”
“그런 생각이었다면 생각보다 얘기가 쉽겠군. 그 세력을 만드는데 우리도 힘을 합치겠네. 대신…….”
“대신……?”
그는 민망한 듯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대신 자금을 좀 대줬으면 하는데…….”
그제야 그들이 왜 여기까지 날 보러 온 건지가 분명해졌다.
결국 마인을 견제하는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날 만나러 온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난 쿨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마인이나 히든 보스와 대항할 세력을 키워야 하는데 저들이 도와준다면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김신우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승낙을 하자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정말인가?”
“그럼요. 어차피 저도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으니까 자금 지원하는 거야 문제 될 게 없죠. 다만…….”
“다만……?”
“다만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보고를 정기적으로 받았으면 해요. 그리고 모인 세력들의 훈련은 제가 맡았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는 내가 대단한 조건을 내걸까봐 조마조마하다가 내 말을 다 듣고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당연히 괜찮지. 매일 진행된 상황을 정리해 자네에게 메시지로 보내라고 하겠네. 그리고 각성자들 훈련은 안 그래도 자네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었네. 우리 중 가장 강한 사람이 자네니 그건 당연한거지.”
김신우의 말을 듣고 놀란건 옆에 있던 최태산이었다.
“너처럼 자존심 강한 놈이 약한 걸 인정한다고?!”
“흥. 그건 니가 조금 전 대결을 못 봐서 그래. 하긴 넌 그걸 알아볼 눈이 없으니 봐도 몰랐겠지만…….”
“뭐?!”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던 현승민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그는 내 질문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는 답했다.
“원래 전 김신우, 최태산과 힘을 합쳐 라시나 세력을 조금씩 조금씩 무너뜨릴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대장을 만나기 전의 생각이고 지금은 생각이 좀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다면 어떻게……?”
“지금 대장 실력이라면 우리나라에 있는 라시나는 절대로 대장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찍어 눌러서 인간 중에도 절대자와 버금가는 실력자가 있다는 걸 알려주면, 어쩌면 쉽게 이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현승민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애초에 라시나가 절대자들 밑에 들어가려는 이유도, 그들의 힘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중에도 그만한 힘을 가진 이가 존재한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된다면 자연스레 절대자를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은 둔화될 것이다.
어쩌면 그로 인해 절대자 밑으로 들어가려는 계획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문제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내 존재가 드러나게 될 텐데…… 어떻게 하지?
지금까지 난 존재 자체를 완벽히 숨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히든 보스 세력이 날 견제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현승민은 내 표정을 가만히 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대장이 뭘 고민하는지는 알겠습니다. 대장의 존재가 알려진 후의 상황을 고민하는 거겠죠?”
“그렇지. 내가 전면으로 나서서 내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마인 세력들이 날 집중적으로 견제하게 될 거야.”
“그래서 대장이 더 전면으로 나서줘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대장을 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는 차분히 내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
“대장이 마인 세력이나 라시나의 견제를 받는 동안, 뒤에서 우린 그들이 모르는 세력을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뒤통수를 치는 거죠.”
“난 그 반대로 생각했는데… 그게 더 효율적일까?”
“라시나가 절대자들 밑으로 들어갈 계획이 없던 상황이라면 대장 생각대로 해도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대장 계획대로 한다면 라시나의 움직임을 막기가 어려울 겁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럼,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질문에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지금 바로 라시나 한국 총단으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뭐?! 지금 바로?”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