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럼 이놈이 여자?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행동이나 말투가 완벽한 남자로 보였기 때문에 여자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너 여자였어?”
내 말에 그녀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게 뭐?!”
그때 박경민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야. 그러니 자제해주면 좋겠어.”
그제야 난 박경민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동그란 안경에 짧은 머리, 캐쥬얼한 정장을 입은 30대 중반 정도의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근데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어? 발목이…!
그의 양 발목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그래서 걷는 게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그는 내가 자신의 발을 보는 걸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건 사고를 좀 당해서…. 하하하…. 보기 흉한가?”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근데 아무리 봐도 나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를 감싸던 사람들을 봐도 그렇고.
이거 뭔가 찝찝한데….
아무래도 백두산 아래 있는 마을 사람들이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한 번 알아봐야겠어.
그때 박경민이 물었다.
“근데 난 왜 보자고 한 거야?”
박경민의 물음에 난 돌리지 않고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널 죽이러 왔지.”
허나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띄며 물었다.
“날? 왜?”
“누군가 널 죽여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 누군가는 날 왜 죽이라고 했는데?”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 말에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재밌는 친구네. 그럼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릴 좀 옮겨서 얘기할까?”
“좋지. 좋은 곳으로 안내해봐. 배가 고프니 기왕이면 먹을 것도 좀 준비해주면 고맙겠어.”
그는 내 요구에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그래 그러지.”
그리곤 도시 한편에 있는 2층짜리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화려한 신식 건물인데 반해 내가 들어간 건물은 족히 50년은 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내부는 더 낡아 보였다.
그들은 날 응접실에 있는 낡은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앉지. 영희는 간단한 음식 좀 내오고.”
영희라고 불린 복면을 쓴 이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날 한 번 노려보고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서 내게 말했다.
“자넨 자신감이 대단하군.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전혀 긴장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뭐, 그렇지. 이 세상에서 날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내 광오한 말에 그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엔 누구나 그만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지. 나도 그랬고 말이야.”
“그러다 뒤통수를 맞은 건가? 그 다리는 그때 그런 거고?”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인데 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찰력이 대단한걸! 자네 말대로 뒤통수를 제대로 세게 맞았지. 그 덕에 이 꼴이고 말이야.”
“힐러한테 고쳐달라고 하지 왜 그대로 있는 거지?”
“물론 힐러한테도 가봤지. 하지만 이건 힐로 고칠 수 없는 거라고 하더군. 뭔가가 힐을 막고 있다나 뭐라나.”
“그래?”
힐이 안 통하는 상처라…. 약을 쓴 건가?
마녀들이 만든 약에 당했을 때도 힐로는 회복이 안 됐다.
그건 해독제가 있어야지만 치료가 가능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영희라 불린 이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따뜻한 차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였다.
차랑 순대라….
난생처음 보는 조합이다.
난 눈앞에 놓인 순대와 차를 가만히 보다가 영희를 향해 말했다.
“혹시 독이나 이런 거 탄 건 아니지?”
“겁나?”
“그거야 먹어보면 알겠지.”
그리곤 순대를 하나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어디 차도 한 모금 마셔볼까!
찻잔을 들고 먼저 향을 맡아봤다.
은은한 꽃향기가 코를 즐겁게 했다.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었다.
난 이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후룩.
“우와! 이거 진짜 맛있네. 대체 뭐로 만든 거야?”
박경민은 내 반응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그건 이 지역에서만 나는 특별한 꽃을 이용해 만든 차야. 원하면 갈 때 조금 싸줄게.”
“그래주면 고맙지. 싸줄 때 청산가리도 꼭 같이 싸줘.”
“청산가리?”
난 태연히 말했지만 박경민은 급히 고개를 돌려 영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의 화난 얼굴에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저 자가 오빠를 죽인다고 하기에…….”
하지만 난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차가 청산가리랑 섞이니까 맛이 기가 막히더라구. 궁금하면 꼭 먹어봐. 그리고 이런 걸로는 날 절대 죽일 수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일단 미안하게 됐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미안해.”
그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됐고. 일단 본론부터 말할게. 널 죽이라고 시킨 사람은 백두산 밑에서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야. 그들은 계속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너흴 제거해 달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지?”
그제야 그는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들은 나 이전에 이 도시를 관리하던 간부들이야.”
“너 이전에? 근데 네가 그들을 쫓아낸 거야?”
“사실 나와 여기 있는 영희, 그리고 지금 내 밑에서 일하는 몇몇은 그들로부터 살인 훈련을 받으며 키워진 군인들이야.”
“군인?”
“그래. 우린 어려서부터 살인 훈련을 받으며 컸고 간부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했지. 뭐든지….”
난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자라며 그들의 명령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걸 바꿀 힘이 우리에겐 없었어. 몇 번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반항했던 선배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근데 대격변이 일어난 거야. 그리고 힘이 생겼지.”
“그래서 간부들을 내쫓고 네가 여길 먹었다. 뭐 이 말이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쯤 맞는 말이야.”
“반만?”
“그래. 대격변으로 더욱 강해진 후에도 우린 간부들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근데 우리 힘이 강해지자 간부들은 불안했는지 우리 모두를 독살하려 했어.”
“독살? 그럼 그 다리도 그때?”
그는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간부들은 우리가 마시는 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을 탔어. 그 독 때문에 몇몇은 죽고 몇몇은 살아남았지. 물론 멀쩡한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서 간부들을 내쫓은 거야?”
“그래. 독살하려고까지 하자 우린 더 참지 못하고 폭발했지. 하지만 그들은 이미 도주한 후였어. 그 후 그들을 쫓아 거의 다 잡았지만 백두산 아래에서 불꽃 괴물을 만나 많은 이가 죽었지. 그 후로 그들은 보지 못했어. 근데 그놈들이 백두산 아래에 살고 있다고?”
흠. 그렇게 된 거구만. 그 마을 새끼들이 나쁜 새끼들이네.
“좋아.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걸 증명할 방법이 있어?”
내 말에 옆에 있던 영희가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복면 속 영희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전체가 심한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져 있었고, 피부 곳곳에서는 진물이 나오고 있었다.
“너……. 그 얼굴도 약 때문에 그런 거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뿐이 아니야. 나와 함께 일하는 동생들도 모두 마찬가지야. 걔들도 증상은 다르지만 독약으로 많이 고생했지.”
“그럼 이 도시는 어떻게 된 거야? 간부들이 관리하던 걸 너희가 이어받은 거야?”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 그래서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야.”
저 말이 사실일까?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럴 땐 삼자대면이 최고의 방법이다.
“내가 들은 얘기랑은 정반대 얘기라서 약간 혼란스럽네. 이럴 땐 삼자대면이 짱이지. 혹시 마을 사람들이랑 만날 의향이 있어?”
“마을 사람들과 만난다고?”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당장 만나게 해줄게. 가서 과연 누구 말이 맞는지 보자구.”
하지만 그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내가 자릴 비우면 이 도시가 위험해져.”
“도시가 위험하다고? 왜?”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도시는 지금 전쟁 중이야.”
“전쟁? 어디랑?”
“중국.”
“뭐? 중국?!”
생각지도 못한 나라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게 뭔 개소리야?! 이 도시가 중국이랑 왜 싸워?”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몇몇 강력한 각성자들이 북한의 대도시들을 관리하기 시작했어. 근데 중국놈들이 북한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말도 안 되지.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며 도시들을 하나씩 굴복시켰어. 몇몇 도시들은 연합을 해서 저항했지만 중국의 거대한 힘 앞에 얼마 버티질 못했지.”
그 말을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근데 이 도시는 어떻게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이 도시를 다스리던 이들이 중국 편에 붙었었거든. 그 대가로 이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받은 거지. 그래서 우리가 각성자가 됐음에도 처음에 그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한 거야. 그들 뒤에는 중국이 있으니까! 근데 그놈들이 쫓겨나고 나니까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온 거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박경민의 말대로라면 백두산 밑에서 살던 이들은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중국 밑에 들어가 그들에게 협력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 도시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박경민 등의 힘을 경계해서 독살을 시도했고, 거기서 살아남은 박경민 등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자 이제 중국에서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이고.
원래라면 중국이 북한을 차지하게 주변국들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전세계는 한창 절대자들과 싸우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체제가 무너진 북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름만 남은 한국 정부가 중국을 견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중국 놈들 지금 어딨어?!”
내가 비록 애국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북한이 중국놈들 손에 들어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죄다 죽여 버려야겠어.
“아마 지금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을 치고 있을 거야. 뭐하게?”
“뭐하게라니? 다 죽여 버려야지!”
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정말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만한 전력이 안 돼. 그나마 지금도 게릴라전을 통해 근근이 버티고 있는 거야.”
“그거라면 걱정 말고 위치나 말해. 내가 다 없애버리고 올 테니까!”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마도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모양이다.
그러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위치는 알려줄게. 영희야, 이 사람을 중국군이 보이는 곳까지 안내해줘.”
그리곤 다시 날 보고 말했다.
“내가 순순히 알려주는 건 가서 직접 보라는 거야. 가서 중국군의 규모를 보고 나면 포기하게 될 테니까!”
“그건 걱정 말고 어서 안내해!”
내 말에 박경민이 영희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난 그녀를 따라 중국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