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여긴 어딜까?
벌판인 것 같은데 자라난 풀들이 내 키보다 높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내 팔을 잡고 있던 조한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 태준 씨! 뭔가가 와!”
그녀의 말대로 거대한 기운을 가진 것들이 우릴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좋겠어! 잠깐만 실례할게.”
그리곤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녀의 허리를 안고는 최대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하늘에 올라선 뒤에야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였다.
내가 있는 곳은 거대한 초원이었고,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뭔가가 풀들을 헤치고 우리가 있던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 좋은 의도로 오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아래쪽에서 뭔가가 번쩍하더니 허공에 있는 우릴 향해 날아왔다.
“이크!”
난 급히 오른발 끝으로 왼발 등을 차서 더 위로 도약했다.
우릴 향해 날아온 것은 아슬아슬하게 내 발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저거 부메랑 아냐?!
발끝을 스치고 지나간 건 부메랑이었다.
잠깐! 부메랑이면 설마?
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내 발밑을 스쳐 갔던 부메랑이 선회해서 다시 우릴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조한희를 안고 있기 때문에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즉시 몸을 틀어 등으로 날아오는 부메랑에 맞았다.
콰직.
요상한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부메랑이 구겨졌고 그 충격으로 내 몸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시 위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났기 때문에 굳이 그러진 않았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해볼까!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수풀 사이에서 뭔가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내 몸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조한희를 안고 있긴 했지만 속도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즉시 수풀 사이에서 날 공격한 뭔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쾅.
막아?!
별거 아닌 공격을 하기에 내 공격을 못 막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상대는 너무 쉽게 공격을 막아냈다.
호기심이 생긴 난 즉시 몇 차례 공격을 더 퍼부었다.
그때마다 상대는 내 공격을 완벽하게 막았다.
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 공격을 막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공격이 별 볼 일 없더라도 방어에만 집중해 능력을 키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놈은 그 갭이 너무 컸다.
각성자 등급을 기준으로 봤을 때 공격력은 잘해야 E급 수준이지만 방어는 최소 S급 수준이다.
그사이 우릴 향해 접근하던 다른 존재가 근처까지 다가온 게 느껴졌다.
당연히 공격하리란 내 예상과 달리 5미터 정도 앞에 멈춰 서서는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일단 이놈부터 처리할까!
아무리 상대가 S급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S급이다.
난 즉시 상대를 향해 일권을 날렸다.
푸와악!
강기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지더니 상대의 몸을 휩쓸었다.
“게르르르륵!!”
한동안 버티던 상대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몸이 찢겨져 죽었다.
일단 시야 확보부터 하자!
난 즉시 화룡도를 소환해서 내공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날카로운 도기가 화룡도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그걸로 별다른 기술 없이 주변에 있는 풀들을 잘라버렸다.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지름 10미터 정도의 공터가 생겨났다.
그제야 난 화룡도를 집어넣고 전방을 주시했다.
방금 전 풀을 자를 때 전방에 있던 상대가 급히 뒤로 5미터 정도 더 물러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태준 씨! 발밑!”
그때 조한희의 외침과 함께 발밑 땅이 들썩이더니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내 가랑이를 찔러왔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몸을 숙여 땅밑을 향해 주먹을 찔러넣었다.
콰콰쾅.
엄청난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사이 난 땅 밑에 있던 적을 죽였다.
잠시 후 모래 먼지가 걷힌 다음 죽은 적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외모가 특이했다.
“두더지?”
방금 전 내게 죽은 적은 두더지처럼 생겨있었다.
물론 진짜 두더지보다는 훨씬 커서 전체 몸길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는 돼 보였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조한희에게서 들린 대답은 예상외였다.
“태준 씨. 아무래도 우리 던전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뭐? 던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여기로 온 후부터 줄곧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그러다 좀 전에야 그게 던전 안에서 늘 느끼던 거란 걸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던전이라니…. 확실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서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린 역소환 마법진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왔다.
근데 그곳이 던전이라고?
“내가 늘 태준 씨를 믿었듯이 이번엔 날 한 번 믿어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진짜 던전 안이 확실해. 일반 던전과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던전인 건 확실해.”
여기가 진짜 던전 안이라고? 그럼 던전만 클리어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풀이 열리며 앞에서 우릴 주시하고만 있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를 본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건 또 뭐야?!”
“토, 토끼?”
모습을 드러낸 건 토끼다.
기감으로 작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토끼였을 줄이야…. 근데 무슨 토끼가 저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토끼 안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었다.
대략 A급 각성자 정도는 될 것 같은 힘이다.
그때 머릿속에 토끼의 말이 들려왔다.
[너흰 인간이군.]
“어? 전음?!”
아니야. 전음과는 달라. 텔레파시 같은 건가?
처음엔 전음이라 생각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보아하니 실력은 괜찮은 것 같은데, 이번엔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군.]
“그게 무슨 소리지? 가다니 어딜?”
[이곳은 루크레이지. 그리고 난 이곳 처음의 땅에서 새로운 이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지.]
“루크레이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일단 안내자라고 했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들어볼까!
조한희도 나랑 같은 생각인지 별말 없이 토끼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의 이름은 루크레이지. 여기 오게 되는 모든 이들은 자동적으로 참가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무슨 참가자?”
[저기 보이는 산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참가 자격이지.]
“뭐? 산에 오른다고?”
[그렇다. 여러 역경을 헤치고 저 산의 정상에 오른다면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지. 만약 정상에 오르기 전에 죽게 된다면 너흰 그때부터 참가자가 아닌 루크레이지의 주민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근데 듣다 보니 이상한 말이 있었다.
“잠깐만! 방금 전에 죽으면 주민이 된다고? 어떻게 죽었는데 주민이 되는 거지?”
[루크레이지에 들어온 이들은 모두 불멸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 하지만 완전한 불멸을 얻기 위해선 한 번은 죽어야 한다. 한 번도 죽지 않은 이들은 아직 완전한 루크레이지의 주민이라고 보긴 어렵지. 그러나 죽고 나면 그때부터 루크레이지에 완전히 귀속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산을 오르다 죽으면 주민이 된다는 거네. 근데 안 죽고 정상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질문에 토끼가 동그란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날 빤히 쳐다봤다.
[그건 일단 산을 오르고 나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혹시 정상을 오르게 된다면 날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토끼는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버렸다.
“한희야. 여기가 던전이 맞기 한 거야?”
질문에 조한희가 뭔가를 한동안 생각하더니 한참 후에 대답했다.
“이곳이 하나의 거대한 던전인 건 확실해. 가설이긴 하지만 그래서 아까 토끼 말처럼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게 되는 걸 거야. 더 자세한 건 토끼 말대로 정상으로 가면서 알아봐야겠지.”
“오케이. 그럼 그건 한희 네가 자세히 알아봐 줘. 네가 던전 파악하는 데는 전문가니까!”
난 조한희와 이곳에 떨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회사 일로 바빠서 던전을 돌지 않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길잡이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조한희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변을 탐색하고 올바른 길을 찾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지난번 익시온의 무덤에서 얻은 활까지 있어서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실력자다.
“그럼 슬슬 가볼까!”
우린 가면서 각자의 역할을 나눴다.
난 전투에만 집중하고 조한희는 주변에서 다가오는 이가 없는지 감시하기로 했다.
적이 나타나면 조한희가 미리 감지해서 내게 알려줬고, 난 그들이 내게 다가오기 전에 먼저 가서 적들을 없앴다.
토끼 말대로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고 했기 때문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진행을 하다 보니 죽인 적들에게서 아이템도 떨어졌다.
어떻게 아이템인 줄 알았냐고?
그거야 먹어보면 안다.
먹을 수 있으면 아이템이고 못 먹으면 아이템이 아닌 거니까.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산 밑에 도착을 했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산 밑에 도착을 하고 보니 산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제 여기만 올라가면 되네. 안 쉬고 바로 가도 되겠어?”
조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싸운 것도 아닌데 뭘. 태준 씨가 괜찮다면 바로 가도 돼.”
“좋아. 그럼 바로 가보자.”
우린 즉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별다른 적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적들이 없지? 혹시 어디 숨어 있거나 한 거 아니야?”
하지만 조한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계속 살피고 있는데 정상까지 적들은 하나도 없어.”
“그래? 이건 너무 쉬운데….”
생각보다 너무 쉬운 것이 뭔가 불안했다.
그래도 올라가는 발걸음을 쉬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린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거기에 토끼가 서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정상에 올랐군. 축하해. 드디어 1지역을 통과했어.]
“1지역?”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게 끝이 아닌 거야?
[그래. 이곳은 수많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지. 그리고 참가자는 자신이 죽은 지역의 주민이 되는 거고. 너희가 방금 지나온 지역은 가장 약한 존재들이 죽고 머무는 지역. 다음부터가 본격적인 도전이 될 거야. 자! 계속 나아가라구!]
그리곤 또다시 토끼는 사라졌다.
“자, 잠깐!”
하지만 토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상에 오르면 보상이 있을 거라더니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조한희가 허공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날 불렀다.
“태준 씨. 여기 좀 봐! 이게 보상 같은데?”
보상이란 말에 급히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어? 옷?”
거기엔 옷이 한 벌 놓여있었다.
펼치자 그 모양이 꼭 우비처럼 보였다.
가슴에 큰 번개 모양이 그려진 걸로 봐서 번개와 관련된 아이템인 것 같았다.
“이건 뭐지? 그리고 사람은 두 명인데 왜 아이템은 한 개밖에 안 주는 건데?!”
난 허공을 향해 또다시 크게 소리쳤다.
그때 또다시 조한희가 날 불렀다.
“태준 씨. 이거 아무래도 저기서 쓰라고 준 거 같은데…!”
“어디?”
그리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들짝 놀랐다.
“저, 저게 대체 뭐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