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공간을 열고 거대한 눈이 나타나자 한치현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주, 주님이시여….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거대한 눈에서 환한 빛이 나오며 그의 전신을 감쌌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나자 거대한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한치현만이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 ‘대격변의 영웅’ 칭호 효과로 인해 절대자 라우라의 살기가 무효화 됩니다.
난 그가 내뿜는 살기보다 메시지에 나온 절대자 라우라란 이름에 깜짝 놀랐다.
설마 진짜 절대자가 나타난 거야?!
그가 내뿜는 기운과 메시지에 나타난 이름을 보니 진짜 같았다.
젠장. 이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노력이 다 쓸모없어지잖아!
혼자 고민하며 방법을 찾고 있을 때 한치현이 입을 열었다.
아니, 이젠 절대자 라우라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가 날 향해 말을 했다.
“놀랍구나. 놀라워. 역시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한 자답구나!”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욱 놀랐다.
말살자의 조각을 알고 있다고?! 그럼 설마 그걸 노리고 날 불러들인 건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런 듯싶다.
난 확실히 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너 혹시 날 불러들인 이유가 말살자의 조각 때문이야?”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지금처럼 나약한 존재에게 말살자의 조각이 넘어간 일은 일찍이 없었거든. 이거야말로 내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근데 말살자의 조각을 얻어도 특별히 힘이 강해지거나 하는 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기를 쓰고 얻으려고 하는 거야?”
그는 내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웃으면서 술술 얘기해줬다.
“하하하. 말살자의 조각이 있으면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 그걸 통해 난 내 완벽한 육신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절대자들을 하나씩 굴복시킬 것이야.”
“야망이 대단하셔! 근데 육신이라면 지금도 있잖아. 굳이 네 몸을 가지고 와야겠어? 아! 혹시 그 몸이 못생겨서 그런 거야?”
내가 장난치듯 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웃었다.
“이딴 몸뚱이는 내 전력을 받아들일 수 없지. 다른 절대자들과 싸우려면 필히 진짜 육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고!”
그 말을 듣자 난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그 말은 지금 완전한 힘을 낼 수 없다는 말이네. 맞지?”
내 질문에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건 맞는 말이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버러지 같은 인간 따위가 날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해볼 생각인데!”
“좋아좋아. 어디 한 번 발악을 해봐라! 버러지의 발악을 지켜봐 주지!”
그때 옆에 있던 한아름이 끼어들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뜻대로 육체를 만들었습니다. 약속대로 어머니와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라우라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대는 내 뜻을 잘 따라 주었다. 약속대로 그대의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겠다. 죽어서 말이다.”
“네…?”
허나 그녀는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새하얀 불꽃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녀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걸 보고 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약속을 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막 죽여도 되는 거야?”
그러나 그는 능청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가 죽은 어머니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해 준 것뿐이다. 물론 만나는 곳이 현실이 아니란 게 문제겠지만! 하하하하.”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어댔다.
보아하니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격인 것 같네. 다행히 완전한 힘을 찾은 것 아닌 것 같으니 어떻게든 여기서 죽여야 돼!
그러나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 죽이겠단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아무리 내 힘이 온전치 않다고 해도 너 따위가 어쩔 수 있는 상대는 아니란 것 정도는 잘 알 텐데.”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가히 신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기운이다.
하지만 난 이미 키라나 이시스 같은 절대자들과도 마주한 적이 있다.
절대자라고 해도 힘이 온전치 못한 상대에게 쫄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알지.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근데 말이야….”
“뭐가 궁금하지? 내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그럼 사양 안 하고 물어볼게. 왜 이 건물을 선택한 거지? 다른 한적한 곳도 많을 텐데 말이지”
그는 내 질문이 웃긴지 피식하고 실소한 다음 말했다.
“고작 물어본다는 게 그건가? 그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날 따르는 이들이 선택한 거지.”
“네가 여길 선택한 게 아니라고?”
“그래. 자세한 건 나도 모르니 나중에 그들을 본다면 물어보도록 해. 죽어서 말이지!”
그리곤 아까처럼 새하얀 불꽃이 내 몸 전체를 휘감았다.
하지만 난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너 양아치야? 질문하라고 해놓고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날 보고는 살짝 놀란 듯했다.
“어떻게 내 불꽃을 견디는 거지?”
“이걸 지금 불꽃이라고 사용한 거야? 불꽃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난 곧바로 초열의 불꽃을 온몸에 둘렀다.
그러자 라우라가 시전한 불꽃이 초열의 불꽃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걸 본 라우라는 더욱 깜짝 놀랐다.
“그, 그건 초열의 불꽃…? 그걸 네가 어떻게?” “이게 진짜 불꽃이지. 그나저나 이게 끝은 아니지?”
“너 플뤼톤 님과는 무슨 관계지?”
“어? 네가 플뤼톤을 어떻게 알아?”
난 그가 뜬금없이 지옥의 대마신 중 하나인 플뤼톤에 대해 언급하자 깜짝 놀랐다.
“불꽃을 다루는 이들 중 플뤼톤 님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분이야 말로 모든 불꽃의 정점에 존재하는 분이니까! 근데 방금 전 보인 불꽃은 분명히 플뤼톤 님이 사용하는 초열의 불꽃인데 네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그럼 지옥의 대마신도 절대자들 중 한 명인 건가?
난 그가 한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절대자들 중에도 서열 같은 게 있어?”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레 질문하는 날 가만히 노려보다 말했다.
“서열이라 하긴 그렇지만 절대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에 있는 분들은 있지. 그중 한 분이 바로 플뤼톤 님이시다.”
플뤼톤이 그만큼 대단한 놈이었던 거야? 근데 절대자들은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해 있었는데 어떻게 서로 그렇게 잘 아는 거지?
“근데 내가 알기로 절대자들은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플뤼톤을 아는 거지?”
그는 이번에도 내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나 말고 다른 절대자를 만난 적이 있구나?!”
“뭐 어쩌다 보니!”
“근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지? 분명 네 놈 안에 말살자의 조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네놈 같이 탐욕스럽진 않더라구. 그래서 어떻게 아는 거냐고?!”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지?”
그의 말에 난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그가 내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그럼 넌 내가 어떻게 초열의 불꽃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안 궁금한 거야?”
“그건 궁금하지.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초열의 불꽃을 다룰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먼저 플뤼톤을 어떻게 아는 건지 말해주면 나도 초열의 불꽃을 어떻게 다루게 된 건지 얘기해 줄게.”
그 말에 라우라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 말을 날 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고 안 믿고는 네가 판단해야지.”
어차피 나는 길드연합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
그래서 괜히 배짱을 부렸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날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좋다. 말해주지. 내가 어떻게 플뤼톤 님을 알고 있는지 말이야. 그런데 만약 네놈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찢어 죽일 것이야!”
그리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다 말을 시작했다.
“내가 플뤼톤 님을 처음 만난 건 그분이 말살자와 함께 움직일 때였다.”
“뭐? 플뤼톤이 말살자와 함께 움직였다고?”
“플뤼톤 님뿐 아니라 그 당시 말살자와 뜻을 함께한 분들이 몇 분 더 계셨지.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말살자가 사라지고 나서 그와 뜻을 같이 했단 이유로 모두 너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차원으로 쫓겨나셨지.”
“그 말은 지옥에 있는 대마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모두 말살자와 함께 움직인 이들이란 거야?”
“대마신이 뭔지 모르지만 플뤼톤 님이 대마신이라고 불린다면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말을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겨났다.
“근데 듣기로 창조주는 세상일에 절대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누가 그들을 거기로 쫓아낸 거지?”
“그거야 그분들만 알겠지. 누가 그들을 거기로 쫓아냈는지 말이야.”
그럼 플뤼톤이나 다른 지옥의 대마신들을 만난다면 말살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 있겠는걸.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기감을 확장한 상태로 계속 건물 밖을 살폈지만 아직 길드 연합 측의 각성자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는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확장된 기감에 몇몇 각성자들이 포착됐다.
그리고 잠시 뒤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이 건물을 향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왔구나!
난 속으로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 그럼 플뤼톤을 아는 건 말살자와 함께 차원을 넘나들었기 때문인 거야?”
“그렇지. 난 말살자와 함께 온 플뤼톤 님의 힘을 보고 그분을 존경하게 됐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 불꽃도 연습한 거고 말이야. 근데 네깟 놈이 감히 플뤼톤 님의 초열의 불꽃을 사용해?! 이제 네가 말할 차례다. 어떻게 초열의 불꽃을 사용할 수 있는지 얘기해라!”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밖이 조금 시끄러운 것 같은데 안 내려가 봐도 되겠어?”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역시 버러지들은 믿을 수가 없군! 그냥 그대로 죽어라!”
그러자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조여 왔다.
허나 난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공격이 소용없자 당황했지만 이어서 다양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떤 공격도 내겐 소용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너 대체 정체가 뭐지?!”
그렇게 라우라가 당황해서 소리치고 있을 때 내가 들어왔던 문이 활짝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과 여성이었는데 그들은 나와 라우라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 거기까지!”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