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보험이라는 마재형의 말에 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네. 박태준 씨가 지금 죽인 사람들만 스물두 명입니다. 아무리 현재 공권력이 약해졌다 해도 이런 대량 살인이 일어나면 공권력이 움직일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날 살인범으로 만들어서 배신하지 못하게 하겠다. 뭐 이런 거야?”
“하하하. 맞습니다. 보기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시네요. 이해가 다 끝나셨으면 실제 경기장으로 이동할까요?”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들…! 그런 이유로 사람을 저렇게나 죽인다고?
물론 죽인 사람은 나기 때문에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뻔히 죽을 걸 알면서 사지로 몰아넣은 저 새끼는 더 나쁜 새끼다.
그는 분노에 찬 표정을 한 내 모습을 재밌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박태준 씨. 세상은 이제 완전히 변했습니다. 약육강식. 그게 지금의 세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죠. 저들은 약해서 먹혀버린 것뿐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화가 났지만 참았다.
난 화를 참기 위해 들고 있던 검을 마저 입에 넣고는 맹렬히 씹었다.
까득. 오도독. 오독.
약육강식! 말 잘했다. 그 말 그대로 넌 내가 죽여줄게. 네가 말한 약육강식의 원리대로!
내가 가만히 있자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가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대충 이해하신 거 같으니까 이제 그만 이동하죠.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죠.”
“누가 기다린다는 거지?”
“그야 소중한 관객분들이죠. 어서 오세요.”
그리곤 뒤편에 있는 다른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앞서 들어갔던 폐공장과 다르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어? 여긴 폐공장이 아니네?”
아니나 다를까 안으로 들어가자 공장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곳에선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작은 부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졌고, 많은 직원이 그걸 검수한 후 한곳에 모아서 포장을 했다.
“이런 곳에 격투장이 있다고?”
내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왜 이름이 지하 격투장이겠어요?”
“지하에 있으니까?”
“하하하. 바로 그거죠.”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재형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하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주변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일만 했다.
사람들을 지나쳐 공장 안에 있는 작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컨테이너 바닥이 엘리베이터 마냥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꽁꽁 감춰놨다니….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인지 한 번 볼까?!
한참을 내려간 컨테이너는 드디어 도착했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리곤 문이 열렸는데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휘황찬란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소파와 가구들.
전체적으로 고급 호텔 로비와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곳곳에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종업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한 명씩 붙어서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여기가 지하 격투장이라고?”
“그래요. 여긴 시합이 열리기 전 선수들이 대기하는 대기실이에요.”
“대기실이라고? 그럼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선수들이야?”
내 말에 그는 여유 있는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맞아요. 저들은 선수들이죠.”
“그럼 오늘 싸울 사람들끼리 같은 곳에서 대기하는 거야?”
“하하하. 그건 아니죠. 저희에게 마련된 대기실은 총 세 곳이에요. 오늘 싸울 상대 선수는 다른 대기실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럼 남은 한 곳은? 대기실은 총 세 개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내 질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대기실은 챔피언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곳이에요. 언젠가 태준 씨가 챔피언이 된다면 이용해 볼 수 있겠죠.”
그리곤 시간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
“아직 시합 시작까지 1시간이나 있으니까 잠깐 앉아서 쉬세요. 그 피 묻은 옷도 좀 갈아입고. 옷은 직원에게 말하면 가져다줄 거예요.”
그리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난 근처에 보이는 빈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대기하던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박태준 님이시죠? 뭘 도와 드릴까요?”
“일단 여기선 뭐가 되지? 뭐가 되는지 알아야 뭘 시킬지 알지.”
퉁명스러운 내 말에도 직원은 친절히 웃으며 대답했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옷, 술, 음식, 여자, 남자, 마약 등 원하는 건 모두입니다.”
“그럼 옷부터 갈아입게 가져다줘.”
“원하는 사이즈와 색상, 스타일을 말씀해주시면 그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난 간단하게 입을 수 있는 검정색 트레이닝 복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직원이 옷을 준비하러 간 사이 난 소파에 앉아 대기실을 둘러봤다.
나 말고도 선수로 보이는 남자들이 세 명이 더 있었다.
다들 상당히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거로 봐서 꽤 실력 있는 각성자들 같았다.
그때 직원이 내가 말한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말씀하신 트레이닝복 준비했습니다. 탈의실은 저쪽에 준비돼 있습니다.”
“탈의실은 무슨….”
난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돌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흠. 교육을 잘 받았나 보네.
“혹시 다른 선수들과의 접촉은 금지야?”
“그건 아닙니다. 편하게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원은 말끝을 살짝 흐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가 시합 전이기 때문에 상당히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난 직원의 말과 표정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다른데! 여기선 선수들끼리 대화하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는구나. 잠깐! 그럼 왜 굳이 선수들끼리 한 공간에 있게 한 거지?
분위기로 봐서는 선수들끼리의 대화를 원치 않아 보였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선수들끼리 오픈해 놨다.
길게 생각할 거 없지. 그냥 들이대 보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그나마 순한 기운을 가진 사람 앞으로 갔다.
기감이 예민해지면서 안 사실인데 사람마다 지니는 기의 성질이 달랐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성격이 온순한 사람과 공격적인 사람의 기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달랐다.
마침 이곳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나마 온순한 성질의 기를 가지고 있었다.
난 그가 있는 자리로 곧바로 걸어가서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뭐지?”
스테이크를 먹던 그는 갑자기 난입한 날 보며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오늘 여기 처음 왔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해서 말이야.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자고 왔지.”
“하하하. 통성명? 이거 웃기는 놈이네.”
그리곤 다시 맹렬히 스테이크를 먹어댔다.
그 옆에는 빈 접시가 이미 3개나 쌓여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접시 위의 고기를 다 먹고는 다시 하나를 새로 주문했다.
“뭔 고기를 그렇게 먹어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말이야!”
내 말에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여기가 처음이라니까 몇 가지만 알려줄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여기서 다해!”
“여기서 다하라고? 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흥! 네가 뭘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여기 왔다는 건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단 소리겠지? 안 그래?”
“뭐, 그렇지.”
“나도 그랬지. 여기 왔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고.”
저건 무슨 소리지? 뭘 상대하는지 모른다고? 그럼 설마 상대가 같은 각성자가 아닌 건가?
그의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엔 대한 그룹에서 하고 있다는 실험이 떠올랐다.
설마 실험체들을 대상으로 싸우는 거야?
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했다.
“뭘 상대하는지 모른다니? 그 말은 우리가 상대하는 게 다른 각성자가 아니란 소리야?”
내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새롭게 가져온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어서 입에 넣고는 씹었다.
우걱. 우걱.
그리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최소한 내가 상대한 놈은 각성자라고 말할 수 없어. 아니, 인간이라고 말할 수나 있을까? 내가 상대한 게 정말 인간이었을까…?”
갑자기 말을 하던 그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잃어갔다.
이 상황은 뭐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왜 저래?!
그때 옆에 있던 직원이 침착하게 품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내더니 그의 팔에 꽂았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눈에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저건 뭐지? 각성제 같은 건가?
뭔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가 정상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직원은 그림자처럼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날 감시하듯이 말이다.
잠시 그 상태로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데 마재형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선수 여러분. 오늘의 시합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 분씩 옆에 있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다들 직원을 따라 각기 다른 출구로 나갔다.
내 옆에 있던 직원도 마재형의 말이 끝나자 친절히 말했다.
“박태준 님. 이제 경기장으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오케이. 한 번 가보자구. 대체 어떤 새끼가 내 상댄지.”
직원이 안내한 곳은 케이지였다.
근데 그 크기가 엄청났다.
이 정도 크기면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는 되겠는데!
케이지는 운동장만큼 넓었다.
게다가 사방은 거대한 철벽으로 막혀 있었다.
여기가 경기장인가 보구나. 근데 여기서 갇히면 나가기 어렵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케이지 안을 둘러보는데 하늘 위에 십여 대의 촬영용 드론이 보였다.
보아하니 저걸로 싸움을 생중계하는 모양이다.
아이즈가 보급화 된 이후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완전히 변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고 증강현실로 결제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상 시청도 아이즈로 가능했다.
아이즈에 있는 영상 감상 기능을 작동시키면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에 있는 것처럼 눈앞에서 영상이 재생됐다.
지금 이곳 경기장의 영상을 관람하는 이들도 아이즈를 통해 편하게 원하는 장소에서 영화처럼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나저나 내 상대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때 반대편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저 사람이 내 상댄가?
문을 나와 날 향해 걸어오는 이는 평범하게 생긴 내 또래 남자였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를 가진.
유일하게 특이한 건 그가 가진 기운이었다.
이런 기를 가진 인간이 있다고?
그에게선 각성한 인간의 기운 말고도 몬스터의 기운까지 함께 느껴졌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