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난 갑작스러운 전음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자리에 앉아있는 공격력을 측정한 측정관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난 아직 전음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육성으로 물었다.
“날 부른 게 당신이야?”
그러자 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전음을 사용 못 하나 보군요. 그럼 여기선 얘기하기 어려우니 내일 낮 12시에 시청 광장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할 얘기가 있으니까 꼭 나와야 해요.]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전음이라니. 그녀도 그럼 무공을 익힌 사람이란 소린데…. 아까 그 노인도 그렇고 무슨 일인 거지?!
궁금하지만 내일이면 알게 될 일.
난 앞에 주어진 상황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은 여기 상황부터 정리하고 지하 격투장부터 들어가 보자.
간단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난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태훈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난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내가 꺼지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이태훈은 약간 움찔했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준 씨 성격 화끈하네요. 태준 씨랑 잘 어울리는 길드가 하나 생각났는데 거기 면접 한 번 보는 건 어떠세요?”
이런 날 봤는데도 추천할 길드가 있다고?
아마도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깽판을 친 건 아니기 때문이리라.
저런 모습을 보였는데도 추천할 길드가 있다는 게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디지?”
내 질문에 그가 즉시 대답했다.
“짱짱 길드라고 혹시 들어보셨어요?”
그는 내가 반말을 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짱짱 길드? 그런 곳도 있나?”
“그럼요. 근데 자세한 건 장소를 옮겨서 얘기하면 어떨까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를 보곤 피식하고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러지. 괜찮은 데가 있으면 안내해.”
“마침 딱 좋은 곳이 있어요. 그리로 가죠.”
그리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그사이 아무도 우릴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란 듯이 더 깽판을 치려고 했는데 예상과 달리 너무 조용했다.
아마도 누군가 손을 써서 심사위원들과 측정관의 입을 막은 듯했다.
흠. 그녀가 한 짓인가?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전음을 보낸 측정관밖에 없다.
아마도 그녀가 확실할 것이다.
아쉽네. 좀 더 진상을 부리고 싶었는데!
그때 로비를 지나가는 우리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가로막은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부진 몸을 한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누구더라…?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이태훈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어? 당신 정기범 매니저 아닌가요?”
그는 이태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아까 정기범이랑 같이 있던 사람이구나!
“근데 우리한테 볼일 있어?”
그러자 나한테 아이즈로 메시지가 왔다.
[정기범님께서 당신과 잠깐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하하. 정기범님? 이거 웃기는 놈이네. 그놈이 그렇게 하라고 교육한 거야?”
하지만 이 질문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아. 어디로 가면 되지?”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는 앞장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가며 이태훈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혹시 정기범이 보자고 한 건가요?”
“그래. 잠깐 보자고 하네.”
“분명 해코지하려고 하는 걸 텐데 이대로 가도 괜찮아요?”
이태훈이 작게 속삭였지만 난 오히려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아까 날 보고도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정기범 뒤엔 미르 길드가 있다고 해서….”
“하하하.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그보다 넌 왜 따라오는 거야?”
그는 살짝 움찔했지만 언제나처럼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거야 아직 우리 얘기가 안 끝났으니까 그렇죠.”
“그게 끝이야?”
“그리고 태준 씨가 정기범한테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그가 슬쩍 본심을 말했다.
난 그런 그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끈기.
욕을 해도 웃으며 넘기는 참을성과 능글맞음.
그리고 호감 가는 성격.
이 정도면 정보원으로 키우면 딱 인데…. 일단 나중에 한 번 떠보기라도 해야겠다.
그 사이 정기범이 보낸 남자는 근처에 있는 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단층이었는데 입구에 각성자 전용 체육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기범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도망가지 않고 용케 따라왔네.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말에 난 이태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개소리가 자꾸 들려서 시끄럽네. 안 그래?”
정기범은 그 소리에 다시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언제까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보자! 오늘은 S등급을 받은 기분 좋은 날이니 팔다리 하나 정도만 병신으로 만들고 살려는 줄게.”
그는 은근슬쩍 자기가 S등급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보아하니 내가 받은 등급을 모르는 모양이다.
난 어떻게 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이태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눈치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정기범은 특급 연예인이다 보니 일반인들과 같이 등급 측정을 받지 않고 다른 장소에서 따로 측정을 받아요. 그래서 태준 씨한테 일어난 일을 모르는 모양이에요.”
그제야 그가 저렇게 행동한 게 이해가 됐다.
“모르면 알려줘야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이태훈의 경고가 들려왔다.
“태준 씨. 저 매니저를 조심하세요. 듣기로는 SS급 각성자라고 하니까요. 매니저이기도 하지만 경호원 역할도 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매니저를 한 번 쳐다봤다.
허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일단 그는 무시하고 정기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씨익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불구로 만들어줄 건데?”
내 말에 정기범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소환했는지 정기범의 손에는 푸른 기운을 뿜어내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높은 등급의 아이템 같았다.
“어떡하긴, 이렇게 해야지!”
서걱.
정기범의 단검이 내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난 멀쩡히 웃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하하하. 지금 뭐 한 거야?”
그는 잠시 당황하며 자신이 든 단검과 날 번갈아 쳐다봤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한 건지 모르지만 운이 좋았네. 이번엔 그렇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검이 내 손목을 베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멀쩡히 내가 웃고 있자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는 내 온몸을 베기 시작했다.
“야야.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공격을 해봐. 지루하잖아.”
그제야 정기범은 공격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정체가 뭐야…?!” “좀 더 놀아주고 싶긴 한데 내가 시간이 얼마 없네. 이만 끝내자. 그 전에 이것부터…!”
난 환영보를 사용해 순식간에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을 뺏어왔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단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까드득. 까득
그걸 본 정기범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자신의 단검을 뺏어가 씹어 먹으니 놀랄 수밖에.
공포에 질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장기범을 보며 한마디 했다.
“내 신조가 뭔지 알아?”
“뭐, 뭔데?!”
“싸가지 없는 놈들은 맞아야 된다는 거!”
그리곤 여지없이 불꽃 싸다구를 날렸다.
하지만 그는 육체강화가 각성한 능력인지 쓰러지지 않고 제법 버텼다.
중간에 계속 맞지 않기 위해 반격을 했지만 내겐 아무 소용없었다.
“호오. 꼴에 S급 능력자라 이건가. 제법 버티네. 그럼 어디 좀 더 힘을 줘볼까.”
그 말에 겨우 버티고 있던 정기범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난 손바닥에 더 많은 내공을 불어 넣은 다음 내려쳤다.
짝.
한 방의 그의 몸이 날아가며 체육관에 있던 기구들 사이에 처박혔다.
하지만 곧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 이 새끼가….”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내가 그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는 걸 안 것이다.
“에이, 좀 더 투지를 불태워보라고. 그래야 때리는 재미가 있지.”
난 다시 정기범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뺨을 후려치려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와 그 사이를 매니저가 가로막으며 후려치는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아이즈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제 그만하시죠. 정기범님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어쭈. 내 팔을 잡아!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난 강력한 강기를 두른 주먹을 매니저를 향해 내질렀다.
그 모습에 그는 급히 잡았던 손을 놓고 팔을 교차해 공격을 막았다.
콰콰쾅.
주먹을 막은 매니저는 몇 걸음 물러나긴 했지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호오! 너 재밌네. 나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널 봐서 오늘은 이쯤 할게.”
그리곤 매니저 뒤에 숨어 있는 정기범을 향해 말했다.
“이 새끼야. 너도 똑바로 살아. 다음에 만났을 때도 계속 이렇게 싸가지 없는 모습이면 이 정도로 안 끝난다.”
나오기 전에 매니저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체육관을 나왔다.
생각보다 각성자 중에도 숨은 강자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까 그 매니저만 해도 일권까지는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른다.
좀 더 분발해야겠어. 일단은 천의권부터 완벽히 구사할 수 있게 하자!
의지를 불태우는데 이태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준 씨. 그럼 커피숍으로 안내할까요?”
“그러지 뭐. 얘기라도 한 번 들어볼까.”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신이 나서는 근처에 있는 조용한 커피숍으로 날 안내했다.
“그래서 나한테 추천하고 싶다던 길드는 뭐 하는 곳이야? 짱짱 길드라고 했었나?”
자리에 앉자마자 난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네. 이 길드가 좀 특이한데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대로만 움직여요.”
“그건 각성자 세계가 다 그렇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여긴 완벽히 힘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곳이에요. 나이가 많고 적건, 길드에 먼저 들어왔건 나중에 들어왔건 다 소용없고, 무조건 힘으로만 움직이는 곳이에요.”
“그 말은 내가 들어가서 길드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모두를 이길 수 있다면 가능하죠.”
재밌는 곳이네.
“근데 그거에 대한 반발은 없어? 아무리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움직이더라도 사람이 자존심이란 게 있을 텐데.”
“그게 이 짱짱 길드의 재밌는 점이에요. 그 길드의 구성원들은 자존심보다도 강자에 대한 선망이 더 강하거든요. 그래서 나이가 많건 적건 무조건 강한 사람을 따라요. 거의 맹목적으로 말이죠.”
“그래?”
짱짱 길드라…. 이거 어쩌면 써먹을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