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탄이 미친놈인 건 맞다.
근데 그걸 이시스가 어떻게 알고 있지?
이번엔 이시스가 내 생각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탄의 이름을 듣고 난 후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자자! 진정하고 탄을 어떻게 아는지부터 얘기해봐.”
그제야 이시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표정이었다.
[탄…. 그 미치광이는 얼마 전까지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단지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한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한 건지 모르지만 그걸 정제해서 검까지 만들었지. 그리고 그걸로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비정상적인 실험을 했다.]
“잠깐만! 차원을 넘나들었다고? 그건 말살자만 가능한 거 아니었어?”
[그렇지. 하지만 말살자의 조각을 정제해 만든 검은 차원의 벽을 가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수많은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말도 안 되는 실험들을 했지. 그 과정에서 많은 차원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제야 난 탄이 어떻게 차원을 넘나들었는지 이해했다.
“근데 왜 그렇게 탄한테 적대감을 내비친 거야? 탄이 너한테도 무슨 짓을 했어?”
내 질문에 이시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미치광이가 내가 살던 차원에 와서는 실험을 한다며 잠들었던 정령왕에게 시비를 걸었다.]
“정령왕? 그런 것도 있어?”
[만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고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지.]
“그럼 이곳에도 정령이 있단 거야?”
그녀는 내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정령은 세상 모든 자연만물에 깃들어 있으니 당연히 여기도 존재하지.]
처음 듣는 얘기여서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일단 탄의 얘기부터 마저 듣기로 했다.
“정령에 대한 건 조금 있다 물어볼 테니 일단은 탄이 한 일부터 얘기해봐!”
이야기하면서 조금 마음이 진정됐는지, 이시스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왕에게 시비를 걸어서 싸우던 탄은 결국 도망을 갔지. 하지만 탄과의 싸움을 마무리 못 한 때문인지 정령왕은 터지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해버렸다. 그로 인해 내가 살던 곳의 대부분이 죽고…. 그곳은 더는 생명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됐지.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제야 그가 왜 그렇게 탄에게 분노하는지 이해가 됐다.
“근데 정령왕이 그렇게 강해? 탄도 거의 절대자급에 가깝게 강하던데.”
[강하지. 허나 정령왕 개인적인 강함은 탄과 비슷한 정도다. 그러나 그는 정령왕! 수많은 정령이 정령왕을 도와서 탄을 공격했고 결국 탄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다.]
“네 말대로면 탄이 수많은 차원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미친 짓거리를 수없이 했다는 거지?”
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나 말고도 수많은 절대자가 탄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근데 왜 탄을 안 죽인 거야? 힘만으로 보면 각 차원들의 절대자들이 더 강하지 않나?”
[더 강하긴 하지만 압도적이진 않지. 그래서 탄은 절대자들과 시비가 붙을 때면 조금 싸우다 다른 차원으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탄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앞으로 탄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에 대해 감이 조금 왔다.
여전히 탄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차원에 균열을 일으켰는지는 모르지만 탄과 절대자들의 관계를 잘만 이용하면 그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차차 생각해 보자. 그럼 아까 나온 정령에 대한 걸 좀 더 물어볼까?
이번엔 이시스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정령에 대해 뭐가 궁금하지?]
“정령이 자연 안에 깃들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령왕은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어?”
[정령왕은 한 장소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쉽게 만날 수가 없지. 나도 그 난리가 아니었다면 정령왕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방법은 없는 거야?”
내가 정령왕에 대해 물어보는 이유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절대자급 강함을 지닌 정령왕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는 파악해두고 있어야 만일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써먹거나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정령왕을 만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먼저 정령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첫 번째 조건이지. 그 후는 정령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흠, 결국 제대로 알진 못 한다는 거네…?”
그녀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충 물어볼 건 다 물어본 것 같고…. 쟤는 어떻게 할 거야?”
대충 궁금한 게 다 풀리고 나자 난 뒤에 있는 소매치기를 가리켰다.
이시스는 내 뒤에 있는 소매치기를 한 번 바라보곤 내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간단하지. 기억을 지우면 된다.]
“기억을 지운다고?”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기억을 지운다는 말에 소매치기 역시 상당히 놀란 듯했다.
[이곳에서의 일과 너를 만난 모든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바로 지워줄까?]
하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잠깐만! 얘랑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조금만 이따가.”
그리곤 소매치기를 돌아봤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진짜, 내 기억을 지울 거야…?”
“왜? 싫어?”
내 질문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소리쳤다.
“당연한 거 아니야?! 기억이 지워진다는 데 누가 좋아하겠어?!”
그녀의 말에 난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마치 이제 생각난 듯,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래? 그럼 나랑 같이 일할 수 있어?”
“일…? 너랑?”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내 제안에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럼 어쩔 수 없지. 기억을 지우는 수밖에.”
그러자 그녀가 급히 날 제지했다.
“자, 잠깐만!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난 하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 못 한다고!”
“그래? 무슨 사정?”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길 시작했다.
“난 각성자가 되기 전부터 소매치기였어. 주로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털었지.”
“그거라면 말 안 해도 잘 알아. 솜씨가 제법이던데?”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내 주머니를 털었던 게 생각나는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그러다 각성을 했는데 소매치기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첩이 수치가 엄청 높더라고. 난 잘됐다고 생각하며 민첩만 계속 키웠지. 점점 자신감이 붙어서 서서히 각성자들을 상대로 소매치기를 시작했어.”
“일부러 각성자들을 노렸단 거야?”
“그래. 각성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데다 그만큼 내 스피드에 자신이 있었거든. 거기다 스킬로 얻은 은신술은 내가 봐도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고!”
그 말엔 나도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문제는 내가 너무 많이 훔치고 다녔단 거지. 결국 소매치기를 당한 각성자들이 함정을 파고 날 붙잡았어. 그리곤 내 신상을 알아낸 다음 내 동생들을 붙잡고 협박을 했지.”
“협박을 했다고?”
“그래. 각성자들을 모은 리더격의 남자가 있는데 그가 매일 일정량의 상납금을 갖다 바치라고 했어. 그러면 놔 주겠다고.”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당연히 한다고 했지. 그건 나한테 쉬운 일이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자 상납금 말고 도둑질을 시키기 시작했어.”
“도둑질?”
난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지!
“하지만 동생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럼 그놈들 때문에 나랑 같이 일을 못 하겠단 거야?”
“그래. 그놈들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아. 내가 그놈들을 처리해줄게.”
“정말?!”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내 제안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놈들 아지트가 어디야?”
“알 아즈하르 모스크 앞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이야.”
“오케이. 그럼 일단 기억부터 지우자!”
“뭐?! 자, 잠깐만…. 기억은 왜?”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날 제지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 이시스가 한 얘기가 혹시라도 세어나가면 안 되니까. 그래도 걱정 마. 내가 확실히 그 놈들은 처리해 줄게.”
그리곤 이시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 여자 기억을 지워줘.”
[언제까지의 기억을 지우면 되지?]
“넉넉히 이틀 정도만 지워주고, 잠깐 재워줄 수도 있지?”
그녀는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그럼 그대의 바람대로 해주겠다.]
그리곤 이시스는 손바닥을 펼치며 그 위에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곧바로 소매치기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난 그녀를 들쳐 매고는 이시스에게 말했다.
“그럼 출산 후의 행보는 자식이 알아서 하겠네?”
[그렇지. 난 사라질 테니까.]
“그럼 이게 마지막이겠네. 애 잘 낳고….”
그녀는 내 인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자한 미소만 지었다.
“참! 나 카이로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지?”
[성 밖으로 나가면 모래바람이 그대를 안내할 것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리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좋은 곳으로 가라….
이시스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아마 내 생각을 읽었으리라.
난 그대로 미련 없이 성을 나왔다.
그러자 이시스 말대로 발아래 모래바람이 생겨났다.
한참을 날아가자 드디어 카이로가 보였다.
난 아이즈를 통해 확인한 장소에 내려선 다음 소매치기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근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그녀를 관찰했다.
그로부터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소매치기가 깨어났다.
그녀는 한동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어딘가로 이동했다.
난 조심스럽게 그녀를 따라갔다.
다행히 그녀는 은신술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하게 걸어서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층인 걸 보니 저기가 맞는 거 같은데!
기감을 확장하자 건물 안에 다수의 각성자가 느껴졌다.
그중 세 명은 상당한 수준의 기가 느껴지는 거로 봐서 등급이 꽤 높은 각성자 같았다.
“그럼 나도 들어 가볼까?!”
난 그녀가 들어간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밤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경비로 보이는 남자 날 제지했다.
“어이! 거기 뭐야? 누군데 거길 들어가는 거야?!”
난 경비를 바라보고 씨익하고 한 번 웃은 다음 주먹을 날려 앞에 있던 문을 박살 내버렸다.
콰쾅.
그리곤 너무 놀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경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 너희들 다 죽일 사람!”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