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자이언트 웜은 이름대로 몸길이가 15미터가 넘는 거대한 벌레다.
생긴 건 꼭 애벌레처럼 생겼는데 머리에 거대한 입이 달려있어서 모든 걸 집어삼킨다고 알려져 있다.
눈이나 코가 없기 때문에 시각이나 후각 대신 미세한 진동으로 먹이의 위치를 파악한다.
개체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행동한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자이언트 웜을 이끄는 자이언트 웜이 생겼다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표정을 보아하니 자이언트 웜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 같군. 그럼 얘기하기 편하겠어. 자이언트 웜은 무리를 짓지 않지만 몇 달 전 붉은 달이 뜨고 난 후로 무리를 짓기 시작했네.”
“붉은 달이요?”
“그래. 그다음 날부터 자이언트 웜이 무리를 짓더니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네.”
붉은 달이면 ‘선택의 밤’을 얘기하는 건데…. 그럼 각성한 자이언트 웜이 나왔다는 소리야?!
아무래도 럭키처럼 자이언트 웜 중에서도 각성한 개체가 있는 모양이다.
그때 개들이 럭키한테 모여든 것처럼 자이언트 웜도 각성한 개체를 향해 모여들어 무리를 이룬 거로 추측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금 그 자이언트 웜들이 여길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거죠?”
“그렇지. 그러니 자넨 어서 여기서 도망가게!”
“어르신은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최대한 그놈들의 방향을 틀어봐야지.”
말을 하는 노인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돌았다.
흠. 그냥 가기는 좀 그렇고 도와줘야겠다. 이 마을에도 흥미가 좀 생겼고, 무엇보다 자이언트 웜 근처에 있다는 보물들도 찾아봐야 하고 말이야.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뭐? 자네가?”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하하하. 그렇게 쳐다보실 필요 없습니다. 안 그래도 자이언트 웜들한테 볼일이 좀 있거든요. 겸사겸사해서 도와드리는 거니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야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하지만 상당히 위험할 텐데 괜찮겠나?”
그는 내 말에 약간 누그러진 분위기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디로 가면 되죠?”
“정 도와주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네. 이리로 오게나.”
그를 따라 마을 끝으로 가자, 이미 소식을 들은 성인 남자의 모습을 한 모래인간들이 몇 명 보였다.
라루힘은 그들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했다.
“이 이방인이 카라잔을 막는 데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네.”
그의 말에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모래인간이 투덜거렸다.
“라루힘! 저 정도는 저희끼리도 충분합니다. 굳이 이방인 손을 빌릴 필요 없습니다.”
그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루힘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 생각은 모르는 바가 아니네만 상대는 카라잔이네. 카라잔을 상대하는 데 우리만으론 어렵다는 걸 알지 않나!”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라루힘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나도 되도록이면 이방인의 손을 빌리지 않았으면 하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주게나.”
난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하자 라루힘에게 물었다.
“근데 카라잔은 뭐죠? 아까부터 계속 카라잔이라고 말씀하시던데…. 혹시 자이언트 웜을 통솔하는 놈 이름인가요?”
“정확하네. 카라잔은 자이언트 웜을 통솔하는 자이언트 웜 이름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막으면 되죠? 그냥 죽이면 되는 건가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죽이면 되냐고? 자네 카라잔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나? 카라잔은 일반 자이언트 웜보다 몸집이 1.5배나 크고 매우 높은 지능을 가졌다네. 거기다 돌처럼 딱딱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이긴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그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각성하면서 지능도 높아지고 몸집도 커진 모양이다.
거기다 몸이 돌처럼 단단하단 거로 봐서 육체 강화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듯싶다.
“그럼 어떻게…?”
“우린 선두에서 달리고 있을 카라잔의 방향을 틀 거네. 자이언트 웜은 한 번 방향을 틀면 돌아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에 마을을 이동하면 되는 거지.”
“마을을 이동한다고요?”
그가 한 말 중 마을을 이동시킨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아. 자넨 우릴 처음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구먼. 우리는 보다시피 육체가 모래로 구성되어 있네. 그래서인지 모래 속에서도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네. 그건 우리가 지은 마을 역시 마찬가지지.”
“그럼 마을도 모래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그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나도 할 수가 없네. 그냥 그렇게 할 수 있다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당장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허나 라루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네. 마을을 움직이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거든. 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몰라도 지금은 시간이 없어 불가능하다네.”
그사이 제법 많은 인원이 모여 자이언트 웜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4층 건물 옥상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카라잔이 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3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 소릴 들은 라루힘은 큰소리로 모두를 향해 외쳤다.
“다들 전투 준비!! 내가 외치면 모두 카라잔 앞에 모래 방벽을 치도록 하게나!!”
라루힘의 말에 모두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흠. 모래 방벽이라고? 일단 어떤 식으로 막는지 한 번 봐볼까!
잠시 후…. 전방에서 모래 먼지와 함께 거대한 자이언트 웜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라루힘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모래 방벽을 치게!!”
그의 외침과 동시에 선두에서 달려오던 거대한 자이언트 웜인 카라잔 앞에 모래로 만들어진 방벽이 나타났다.
호오. 저렇게 막는다는 거구나! 딱 생각했던 대로네. 근데 저걸로 막을 수 있을까?
수십 겹으로 쳐진 모래 방벽이지만 카라잔이 달려오는 속도나 그 안에 내재 된 힘을 봤을 때 막기 어려워 보였다.
카라잔은 눈앞에 방벽이 생겼지만 달려드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가 있는 가장 앞부분이 서서히 뾰족한 송곳처럼 변해갔다.
그걸 본 난 상당히 놀랐다.
어!! 형태 변형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거야?
자이언트 웜이라는 거대한 몸집에 각성해서 힘과 덩치, 지능까지 올라갔는데 형태 변형과 신체 강화까지 가지고 있다면 고작 저런 방벽으론 카라잔을 막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카라잔은 송곳처럼 변한 머리로 겹겹이 쌓여있는 방벽을 하나씩 뚫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돌파력이 조금 줄긴 했지만 다 뚫리는 건 시간문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곧바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어디보자. 어휴. 많기도 해라. 저게 다 자이언트 웜인 거야?!
위에서 내려다보니 카라잔 뒤로 자이언트 웜 수십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땅으로 내려선 나는 곧장 카라잔이 있는 곳으로 튀어 나가며 화룡도를 소환했다.
“단월!”
화룡도가 횡으로 천천히 그어졌다.
그리고 화룡도를 따라 모든 것이 잘렸다.
모래 인간들이 펼친 모래 방벽도, 자이언트 웜도 모두 단월에 잘려 나갔다.
하지만 카라잔은 내가 화룡도를 뽑고 단월을 시전하는 순간 이미 뭔가를 눈치채고 땅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래서 카라잔은 잘리지 않았지만 뒤따르던 자이언트 웜 중 반 정도는 몸이 반으로 잘렸다.
단월의 공격 반경 밖에 있던 자이언트 웜들도 앞에서 죽은 자이언트 웜들의 시체에 부딪히며 이동을 멈췄다.
그나저나 이놈은 어디로 간 거지?
그때 눈앞에 있던 모래가 들썩이더니 거대한 카라잔의 입이 날 덮쳐왔다.
난 곧바로 환영보를 사용해 카라잔의 머리 위로 이동해 공격을 피했다.
그리곤 바로 일권으로 머리를 공격했다.
빠가각.
일권에 제대로 맞은 카라잔은 고통스러운지 모래 속에서 반쯤 나온 몸을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제법 단단하다만 그 정도론 어림없지. 단…응?”
단월을 사용해 카라잔을 죽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카라잔의 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뭐지? 죽은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자세히 보니 카라잔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설마…죽을까봐 겁먹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카라잔은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하기 위해 다른 질문을 해봤다.
“널 죽이지 말아 달라는 거야?”
그러자 카라잔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널 죽여 달라고?”
하지만 그 질문에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떨었다.
헐. 이거 봐라! 진짜 알아듣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제법 쓸모가 있겠어.
“너 혹시 보물이 있는 곳 알고 있어? 유사 아래에 보물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그는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날 거기로 안내해. 그리고 앞으론 이 마을 건들지 말고. 알겠어?”
카라잔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 말을 어기면 네 몸을 조각조각 잘라서 먹어버릴 테니까 내 말 명심해! 알겠지?”
그 말에 카라잔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저쪽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부르면 바로 오고.”
그리곤 몸을 돌려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에 있던 모래 인간들은 돌아오는 날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이방인이 우리 마을을 구했다.”
“당신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지? 대단하던 걸!”
라루힘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자이언트 웜을 일격에 죽이다니…. 게다가 카라잔까지 굴복시키고 말이야.”
“이제 카라잔이 마을을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자넨 우리 마을의 은인이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보게.”
그의 말에 난 조심스럽게 유사 아래에 있다는 보물에 대해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사막에 들어오기 전에 유사 아래 있는 보물에 대한 얘길 들었는데 혹시 그것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
내 질문에 라루힘은 깜짝 놀랐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 겐가? 그건 수천 년간 비밀로 되어 오던 건데….”
하지만 곧 실언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뭔가 있구나!
“숨기지 말고 말씀해주시죠. 이미 내용은 대충 알고 있으니까요!”
들은 거라곤 유사 아래 보물이 있다는 것밖에 몰랐지만 뭔가 아는 것처럼 허풍을 쳤다.
그는 평상시라면 속아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방금 전 놀라운 내 능력을 본 후라 진짜로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믿고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우리는 앙크족이라 부르는 고대 이종족이라네.”
“앙크족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리고 우리 앙크족은 대대로 보물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었다네!”
“보물의 수호요?”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