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리치몬드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과 싸웠지만, 저 정도로 강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물론 만난 인간 중에 자신보다 강한 인간들도 존재했었다.
하지만 저만큼은 아니다.
저 인간은 강하기도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제야 자신이 존경하는 1군단장 기드온이 왜 경고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드온은 혹시라도 박태준이란 인간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경고했었지만 그때는 그 말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박태준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로 보였다.
“왜 그래? 이제 더 꺼낼 거 없냐니까?”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말없이 날 바라봤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뗐다.
“이제야 왜 군단장님이 널 조심하라는지 알겠군. 다른 절대자들뿐만 아니라 인간도 주의해야 한다는 군사의 말을 안 믿었는데…. 그로 인해 이런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그게 뭔 소리야? 유언이라도 하는 거야?”
허나 그는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난 주군의 검. 검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 존재 목적은 적을 하나라도 더 없애는 것. 오늘 내 생명을 불태워 널 처단하겠다.”
그리곤 그의 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근데 불의 색이 이상하다.
노란색도 아니고 흰색의 불꽃이 그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백색의 불꽃은 순식간에 입고 있던 갑옷을 녹이고 급기야 몸을 구성하던 뼈마저 모두 녹여버렸다.
화르륵.
엄청난 열기가 리치몬드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 열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싸우고 있던 몬스터들과 팀원들 모두 싸움을 멈추고 멀찍이 피할 정도였다.
마침 도착한 로빈과 프랑수아, 루카스도 리치몬드가 내뿜는 열기에 깜짝 놀란 채 감히 접근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법이네. 백색의 불꽃도 사용할 줄 알고 말이야.”
상황과 어울리진 않지만, 난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수련을 하면서 초열의 불꽃을 사용하는 법도 연습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불꽃은 열기에 따라 색이 변한다는 걸 알아냈다.
붉은색이 가장 약하고 그 다음 노란색, 흰색, 파란색 순서였다.
파란색인 초열의 불꽃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열기를 가진 불꽃이 바로 흰색 불꽃이다.
그래서 내가 리치몬드가 내뿜는 불꽃을 보고 감탄한 것이다.
백색의 불꽃에 휩싸인 리치몬드가 서서히 앞으로 걸어왔다.
어떤 공격 기술도 필요 없었다.
그저 타오르는 백색의 불꽃으로 눈앞의 적만 녹여버리면 된다.
화르르륵.
백색의 불꽃이 순식간에 날 집어삼켰다.
“앗!”
동료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엔 리치몬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언데드로 태어나서 배척 받던 시절. 리치킹과의 첫 만남. 그리고 그와 함께 한 기나긴 정복의 시간까지….
“너 정말 열심히 그리고 충직하게 살았구나. 멋지네! 이제 그만 편히 쉬어라.”
그의 삶을 엿봤기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그런 리치몬드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부끄럽지 않게 최고의 힘으로 보내주는 것뿐이다.
난 초열의 불꽃을 폭발시켰다.
몸 전체에 생겨난 파란색 불꽃은 순식간에 백색의 불꽃을 삼켜버렸다.
“잘 가라….”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내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난 잠시 우거진 수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그때 리치몬드가 죽은 걸 인지한 창과 검을 든 해골들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초열의 불꽃에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그 사이 동료들이 남은 몬스터들도 다 정리하고 내게 다가왔다.
그제야 난 정신을 차리고 초열의 불꽃을 거뒀다.
그리곤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놀람과 경악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그 정도 실력이었던 거야?”
토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말했다.
난 대답 대신 한 번 웃어주곤 프랑수아를 쳐다봤다.
프랑수아는 약간 놀라긴 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계획대로 리치몬드도 잡았으니 이걸로 계약은 끝난 걸로 봐도 되겠지?”
“이대로 갈 생각인가…. 여기 상황이 급박하니 남아서 좀 더 도와주면 안 되겠나?”
프랑수아는 내가 가려는 듯 보이자 급히 날 잡았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따로 급히 할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 그보다 던전 소유권 허용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정도면 받을 수 있겠지?!”
프랑수아는 내 질문에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리치몬드를 잡았으니 약속대로 이행될 걸세. 정확한 효력 발동 시간은 따로 메시지가 갈 테니 그때 확인해보면 될 테고.”
“좋네! 그럼 난 가볼게. 다들 수고하고.”
날 바라보는 모두의 눈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난 모른 체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젠장! 좀 잠잠하나 싶었더니 여기서 그놈들을 볼 줄이야!
내가 급히 그 자리를 빠져 나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 리치몬드의 기억을 보다가 최근의 기억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됐다.
리치왕이 용의 탈을 쓴 사람과 만나는 장면을 말이다.
리치왕과 용의 탈을 쓴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까진 모르지만 리치왕 세력에 마인의 세력까지 합쳐진다면 현재로선 그걸 막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아까 프랑수아에게 이 사실을 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다 어디에 첩자가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만뒀다.
이제 어디로 가지?
무작정 리치킹한테 쳐들어갈 순 없으니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1군단장 기드온이 진격하는 곳은 이미 많은 각성자들이 투입됐다고 하니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갈 곳은 이시스 여신이 있는 이집트뿐이다.
두 절대자 사이에 끼어들 정신 나간 각성자는 없을 테니까.
일단 이집트로 가는 포탈부터 찾아보자!
난 즉시 아이즈를 활성화시켜 포탈을 검색했다.
하지만 근처에 이집트로 가는 포탈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여기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대신 대한민국으로 가는 포탈은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난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 거기서 이집트로 가는 포탈을 찾기로 결정하고 포탈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이동 포탈이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관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현재 전시 상황이라 관리자까지 피난을 간 모양이다.
포탈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이 환해지더니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내가 나온 곳은 강원도 원주였다.
포탈 앞에 있던 공무원은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 거긴 지금 전시일 텐데…. 도망쳐 나오신 거에요?”
“뭐. 그렇죠. 신분증은 여기요.”
대충 대답하고 신분증을 보여 준 다음 즉시 럭키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럭키야. 츤츤이 훈련한다고 떠났지?”
[네. 대왕님은 어제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주소 보내드릴까요?]
“바로 보내봐!”
전화를 끊은 다음 메시지를 확인하니 양평에 있는 용문산이다.
양평이면 여기서 멀지 않네. 잠깐 들려보자. 애들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그 길로 바로 양평 용문산을 향해 달려갔다.
30분 정도가 지나 용문산 앞에 선 나는 바로 기감을 확장했다.
그러자 산 중턱에서 츤츤이와 동료들의 기가 느껴졌다.
기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올라가는데 멀리서부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옛날 생각 나네…!
산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걷다 보니 금세 츤츤이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츤츤이는 내가 올라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왔냐?]
“애들은 잘 하고 있어?”
[후우!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하나같이 병신 같을 수 있을지 연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나마 저 놈은 좀 쓸만한 데 나머지는 다 병신이야.]
츤츤이가 가리킨 건 해진우였다.
해진우의 격투 센스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한테 부탁한 거잖아. 꼭 필요한 애들이니까 제대로 만들어줘.”
[이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게 아니라 더 쌓이겠어!]
그때 훈련하던 동료들이 날 발견하곤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철진만이 홀로 남아 묵묵히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혀…형!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제…발…! 난 좀 더 살고 싶다고…!!”
“여긴 지… 지옥이야…. 저 개새끼는 미쳤어…!”
해진우와 정찬호, 최우혁은 날보고 여기서 데리고 내려가 달라고 빌었다.
“츤츤아. 나 얘들 데리고 잠시 얘기 좀 할게. 사제도 이리 좀 와봐.”
[그래. 할 거 많으니까 빨리 데리고 와!]
정찬호까지 모이자 난 말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다들 내가 이예진을 갑자기 잘라버려서 불만이 많은 거 알아. 같은 동료였는데 상의도 없이 내 맘대로 잘라서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어. 앞으로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꼭 같이 회의를 해서 의견을 모으도록 할게. 알겠지?”
“그…그래. 그러니까 우리 좀 꺼내줘…. 제발…!”
“제발 좀 꺼내주면 안 될까?! 우리 차라리 신화급 던전을 돌자.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할 수 있어… 제발…!”
그들은 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미친 듯이 내게 매달리며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 정도로 힘든가?
나도 수련을 할 때 지옥 같은 생활을 하긴 했지만 하루 만에 저 정도 상태가 되진 않았다.
“츤츤아. 얘들 상태가 왜 이러냐?”
[아! 내가 수련을 좀 업그레이드했거든. 근데 너처럼 뒤지지 않는 건 아니라 강도 조절하기도 피곤하네.]
업그레이드라니…. 역시 믿음직스러워.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열심히 훈련하고. 난 급히 이집트로 가봐야 돼서 빨리 가볼게.”
그때 내려가려는 날 츤츤이가 불러 세웠다.
[야! 빨리 힐러도 한 명 데려다 놔! 훈련 효율 좀 올리게.]
난 그의 의도를 짐작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급한 일만 끝내고 바로 섭외할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곤 츤츤이와 동료들에게 급히 인사하곤 도망치듯 산을 내려왔다.
등 뒤에선 동료들이 퍼붓는 욕과 저주,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얼른 산을 내려왔다.
이제 이집트로 가보자!
아이즈를 통해 이집트로 가는 이동 포탈을 검색하자 가평에 하나 있는 걸로 나왔다.
가평에 있는 포탈까지 달려간 다음 바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포탈 반대편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였다.
이집트의 도시들은 절대자 이시스 여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건 이시스 여신이 차원의 균열을 찢고 나온 후 바로 사막에 자신의 신전을 일으킨 다음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시스의 부하들도 사막을 넘어 이집트의 다른 도시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자들 중 가장 베일에 가려진 세력이 바로 이시스 여신이다.
아이즈로 이시스 여신이 있는 사막을 찾자 서쪽에 있는 사막을 가리켰다.
“그럼 가 볼까!”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