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레이피어가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슉. 슉. 슉.
한 발. 한 발.
한 발씩 움직여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내 모습은 다른 이들의 눈엔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허나, 그건 제 3자의 생각.
공격을 하고 있는 당사자는 마치 귀신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각성한 능력은 원소감응.
특히 공기와의 감응률이 높았다.
“이익! 익스플로젼.”
콰콰쾅.
순간 그가 찌른 검끝의 허공이 폭발하듯 터졌다.
익스플로젼.
이건 마법이 아니다.
극도로 압축된 공기를 레이피어로 터트린 것이다.
마치 풍선을 바늘로 터트리듯이 말이다.
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허나 곧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난 거야?”
난 멀쩡한 모습으로 품에서 코인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까득. 까드득.
“너…. 대체 뭐…야…?”
“나? 낸시 대리인. 더 보여줄 거 없으면 이제 끝내자.”
난 내공을 끌어올렸다.
서서히 몸 주위로 뭔가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괴한 그 형상은 언뜻 보면 마치 웃고 있는 악마처럼 보였다.
“아…악마…!”
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런 감정은 거기 있는 모든 이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난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이 정도 연출이면 충분하겠지!
내공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니 내공을 어느 정도 형상화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걸 통해 뚜렷한 악마의 모습은 아니지만 비슷한 형상은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줬다.
“악마라니. 말이 좀 심한걸. 주둥이부터 찢어놔야겠네.”
순간 자리에서 사라진 내 손엔 어느새 그의 목이 잡혀 있었다.
“…켁, 켁…!”
난 일부러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그의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케…켁…하…항…보…ㄱ!”
그러나 못들은 체 하며 그의 입에 손을 가져다댔다.
결국 그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해버렸다.
“아이, 더러워! 이 새끼 오줌 쌌잖아!!”
난 들고 있던 그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쿠당탕.
하지만 아무도 바지에 오줌까지 싸며 기절한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만큼 내가 준 공포는 무시무시했다.
좋아. 이 분위기 그대로 도련님한테 가볼까!
훅.
자리에서 사라진 내 모습은 잔뜩 겁을 먹은채 보고 있던 셋째 도련님 앞에 나타났다.
“뭐… 뭐야?!”
그는 너무 놀라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채 날 올려다봤다.
난 아무 말 없이 지긋이 그를 내려다봤다.
“…너…대체 누구야…? 왜….우리 일에…끼어드는 거야…!”
“날 죽이려 했으면 너도 죽어야지. 안 그래?”
“그…그게 무슨…?”
“니가 낸시를 죽이기 위해 보낸 자객들. 그놈들이 나도 죽이려 했거든. 물론 내가 다 죽여버렸지만.”
그제야 그는 내가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알아챘다.
“하…하지만 그건 내…낸시를 못 오게 하려고….”
“됐고. 날 죽이려 했으니 너도 죽어야겠지?”
“네…? 저…전 죽이라고 지시한 적 없습니다!”
극도의 공포 앞에 그는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일단 죽이고 알아볼게.”
“뭐…이런…!”
이쯤되면 누군가 나서서 말려줘야 하는데….
난 말처럼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겁만 줄 생각이었다.
아무도 안 나서나…. 그럼 죽여야지 뭐.
분위기를 여기까지 몰고 왔는데 그냥 물러나면 지금까지 연기한 게 모두 물거품이 돼 버린다.
바로 그때 낸시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그만 두세요!”
타이밍 좋고!
적절한 타이밍에 날 말린 낸시가 고마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왜 그러지?”
“주…죽일 필요까진 없잖아요…?!”
“그래? 진짜 괜찮겠어? 나중에 헤코지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요. 이 다음부턴 제가 해결할게요.”
그녀의 말에 난 셋째 도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낸시한테 평생 감사하며 살아라. 쟤 때문에 니가 오늘 산 거니까.”
그리곤 바로 낸시 옆으로 가서 섰다.
그녀는 내가 옆으로 오자 흠칫 놀라긴 했지만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쩝. 너무 겁을 줬나?
난 품에서 코인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까드득.
다들 한동안 코인을 씹고 있는 내 눈치만 봤다.
그러다 집사가 조심스레 나서며 낸시의 승리를 선언했다.
“오늘 후계자 대결의 승자는 낸시 아가씨로 결정 됐습니다. 이로써 낸시 아가씨는 정식으로 가문의 상속자가 되셨습니다.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가문에서는 낸시 아가씨의 안전을 위한 특급 경호가 시작되며….”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집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쨌든 잘 해결되서 다행이네.
집사의 설명이 끝난 후 밖으로 나오자 정장을 입은 각성자 둘이 그림자처럼 낸시 옆으로 달라붙었다.
집사가 말한 경호원인 모양이다.
그걸 본 난 낸시에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간다. 잘 살고.”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날 그녀가 급히 붙잡았다.
“자…잠시만요. 이렇게 가시게요? 좀 더 머물다 가셔도 되는데….”
“하하하. 바쁜 일이 있어서 그냥 갈게. 혹시라도 여길 다시 지나갈 일 있으면 한 번 들릴게. 그럼 앞으로도 꿋꿋하게 잘 살아. 그러다 보면 오늘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곤 아쉬워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제 스페인으로 가볼까!
아이즈를 통해 스페인이 어딨는지 확인하곤 가려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저기 잠시만!”
고갤 돌리자 프랑수아의 대리인이다.
저 사람이 왜?
“왜 그러지?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랑? 뭘?”
“여긴 좀 그렇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호수가 있어. 거기 어때?”
“호수라…. 그러지 뭐.”
그의 말대로 조금만 걸어가자 커다란 호수가 나왔다.
거기엔 프랑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코인 하나를 꺼내 씹으며 물었다.
까득.
“이제 얘기해봐. 무슨 일이지?”
프랑수아는 신기하고 놀랍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다 말했다.
“우릴 좀 도와주게.”
“도와 달라고?”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하고 있자 그는 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미안하네. 맘이 급해서 아무 설명도 없이 부탁부터 했군. 다름이 아니라 스페인에 있는 절대자 리치킹에 대해선 알고 있나?”
“뭐, 어느 정도는.”
“최근 리치킹이 매우 적극적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네. 밑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을 노리고 위로는 유럽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최정예 1군단이 진격 중이네.”
대충 아는 내용이라 난 대수롭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문제는, 리치킹이 별동대를 투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네.”
“별동대라고?”
저건 처음 듣는 이야기라 약간 놀랐다.
내가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그리고 그 별동대를 이끄는 몬스터가 리치몬드라고 들었네.”
“뭐? 리치몬드?!”
리치몬드는 리치킹이 스페인에 자릴 잡고 전투를 벌일 때 최전방에서 싸웠던 몬스터다.
추정 몬스터 등급은 최소 SS+고 수많은 각성자들이 리치몬드에 의해 목숨을 잃었었다.
나도 멀리서 찍은 거긴 하지만 영상으로 리치몬드가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불타는 채찍을 휘두르며 각성자들을 살육하는 해골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
“그건 잘 알겠는데 나한테 뭘 도와달라는 거지?”
“지금 유럽연합에 있는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밀고 올라오는 1군단을 막기 위해 대부분 전선으로 파견된 상태네. 근데 별동대에 대한 소식을 들은 거지. 하지만 지금 그걸 막을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네. 그래서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세.”
그의 사정은 잘 알겠다.
또, 리치몬드를 잡게 되면 리치킹의 세력에 어느 정도 타격도 줄 수 있으니 균형을 맞추려는 내 계획과도 맞아 떨어진다.
근데 이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엔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근데 내가 왜 도와줘야 되지?”
내 말에 프랑수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히 인류가 위기에….”
“인류가 위기에 처했으니 도와라? 맨입으로?”
그제야 그는 내 의도가 뭔지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었다.
“보수라면 걱정 말게. 자네 정도 실력자라면 섭섭하지 않게 지급이 될 테니 말이야.”
그는 내가 돈을 원한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돈? 나 돈은 필요 없는데. 이미 차고 넘치게 있거든.”
“그럼 뭘?”
“일단 그걸 말하기 전에 당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부터 알고 싶은데.”
그가 있는 위치에 따라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난 유럽연합 각성자 협회 부의장이네.”
그 말은 자기도 각성자란 말인가?
“그럼 당신도 각성자란 말이야?”
“하하하. 당연하지 않나.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각성자 협회의 부의장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는 기분 좋게 호탕하게 웃었다.
“근데 아까는 왜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은 거지? 부의장 정도면 실력도 상당할 거 아니야?”
“일단 난 가문을 잇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네. 오늘도 오지 않으려다 대리인 중에 혹시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해서 온 거네. 그리고 운 좋게 거기서 자넬 만났고….”
흠. 유럽연합 각성자 협회의 부의장 정도면 웬만한 조건은 다 들어줄 수 있겠구나. 뭘 요구하지?
유럽연합의 경우 각성자 협회라는 커다란 조직 안에 라시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길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유럽 내에선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리치킹과의 전투도 대부분 그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난 주머니에서 코인 하나를 꺼내 씹으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던전 소유권을 허용해줘.”
“던전 소유권?”
의외의 조건에 그는 살짝 놀란 듯 했다.
세계 각국의 던전 관리는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던전 소유권은 특별한 사유가 아닌 이상 자국민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내 제안에 그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무래도 나 혼자 결정하긴 어렵겠는데…. 아직까지 외국인에게 던전 소유권을 준 경우가 없어서 말이지….”
그러나 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례야 만들면 되는 거고. 나 정도 실력자를 쓰는데 그 정도 조건은 걸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던전을 공략해 봐야 얼마나 하겠어? 안 그래?”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돈으론 안 되겠나?”
“나 돈 많다니까.”
내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그 문제는 다시 조율해 보세나. 이미 리치몬드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네. 그러니 일단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의논하는 건 어떻겠나?”
“그것도 괜찮지. 팀원들이 어딨는데?”
“지금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 있네. 여기서 멀지 않으니 바로 출발하세나.”
우린 곧바로 스페인 국경 근처 도시이니 산세바스티안을 향해 이동했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