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헤라는 우리가 들어왔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계속 머리를 빗었다.
멀리서 봤을 땐 잘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헤라의 키는 상당히 커서 3미터 가까이 돼 보였다.
신이라 그런가 겁나게 크구만. 그나저나 들어왔는데 왜 쳐다도 안 보는 거지?
“어이. 우리 왔다구. 안 싸울 거야?”
하지만 그녀는 머리 빗기를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왜 너희와 싸워야 하지? 난 야만스러운 것들과 달라서 싸우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아.]
이건 또 뭔 소리야?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싸우길 싫어한다고?
“그럼 그냥 우리끼리 지나가도 되는 거야?”
[그렇지만 나 역시 이곳을 지키도록 선택받은 존재. 그냥 지나가게 하긴 좀 그렇군. 야만스런 전투 대신 내가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너흴 지나가게 해주지. 이곳에만 있었더니 너무 지루하구나.]
깜짝 놀랄만한 이야길 하라고? 수수께끼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걸 어떻게 해!
“그냥 싸우면 안 될까? 그게 더 쉬울 것 같은데.”
[흥. 싸우면 날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감히, 나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말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절대자급이야. 나는 몰라도 쟤들은 위험할 수 있겠는데….!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알았어. 알겠다고. 그러니까 진정 좀 하고…. 음. 뭐가 좋을까. 그래. 요즘 우리 세상에 절대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차원을 찢고 대거 나타났어.”
[그게 어떻단 거지? 난 너희 세상의 이야기는 전혀 관심이 없어. 그런 거 말고 다른 이야긴 없어?]
우리 세상 얘기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그럼 대체 무슨 얘길 해야 되는 거야?!
그녀가 모르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여긴 익시온의 무덤.
들어올 때 익시온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원래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 말이다.
“내가 여기 들어오면서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 들어볼래?”
[어디 한 번 해보렴. 내가 듣고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라면 지나가게 해줄 테니.]
“깜짝 놀라긴 할 거야. 아주 많이 말이지!”
난 씨익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익시온이라고 알지?”
[그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진 놈 얘긴 왜 꺼내는 거지?]
“그치. 그놈이 나쁜 놈이긴 하지. 근데 조금 잘못 알려진 얘기가 있더라구.”
[잘못 알려진 얘기?]
그녀는 약간 흥미가 생기는지 내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원래 그 놈이 당신을 겁탈하려다가 제우스한테 벌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잖아. 맞지?”
[그렇지. 그 놈이 감히 겁도 없이 내게 흑심을 품었지. 그걸 남편 제우스가 알고 구름의 정령을 부려 나로 둔갑시킨 다음 그놈을 속였다. 그 때문에 그놈은 영원히 불타는 수뢰바퀴에 묶인 채 굴러다니는 형벌을 받았지.]
“잘 알고 있구나. 근데 말이야. 사실은 그게 다 제우스가 꾸민 일이라고 하더라구.”
[뭐? 그게 무슨 말이지?]
헤라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사실은 제우스가 익시온의 부인인 디아에게 흑심을 품고 조작한 거라는 말이 돌던데? 혹시 알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감히 내 남편 제우스를 모함하다니…. 사지를 찢어주마!]
헤라는 몹시 흥분했는지 굉장한 기세로 날 향해 걸어왔다.
하지만 내 말 한 마디에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증거 있는데… 안 보고 싶어?”
[증거?]
“그래. 너 ‘진실의 나팔’이라고 알지?”
[설마 진실의 나팔을 네가 가지고 있단 말이냐?]
“아아. 가지고는 있지. 한 조각이 부족하지만 말이야.”
난 뒤에 있던 동료들로부터 진실의 나팔을 전달 받았다.
“다 만들어졌는데 여기 한 조각이 부족하네. 근데 이걸 네가 가지고 있을 거 같단 말이지. 아니야?”
그녀는 내 말에 약간 움찔하며 말했다.
[마지막 조각은 내가 가지고 있지. 허나 진실의 나팔에서 네가 말한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땐 너희 모두 나와 제우스를 기만한 대가로 익시온과 같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이야. 알겠어?!]
그리곤 우리 모두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 헤라가 ‘마지막 진실의 나팔 조각’을 가지고 내기를 했습니다. 내기에서 승리하면 자동으로 던전 클리어가 되지만 내기에서 실패하면 50년간 불타는 지옥의 수레바퀴에서 익시온과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헤라의 내기에 응하시겠습니까?
난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어떻게 할지 물었다.
“어떻게 하지? 이거 잘못되면 인생 완전 좆 되는 거야.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굳이 다 안 깨도 되는 거니까.”
다들 그걸 알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말을 못 꺼냈다.
- 헤라의 내기에 응했습니다. 헤라에게 말을 거세요. 그러면 마지막 진실의 나팔 조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야?!”
내가 무섭게 소리치자 이예진이 슬쩍 손을 들었다.
“또 너야? 내가 신중하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 다 손해 본다고!”
하지만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인생 뭐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끝은 봐야지. 만약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면 발 뻗고 편히 잠이나 자겠어?”
난 그녀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쟨 여기만 정리되면 바로 잘라야겠어.
그녀는 이상하게 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던전에 남아있었다.
원래 계약대로라면 내가 없기 때문에 진작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말이다.
지난번 실수했을 땐 그녀가 동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서 가만히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두 번이나 민폐를 끼치니 더는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
“이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네. 다들 진실의 나팔이 익시온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길 기도하자구.”
난 진실의 나팔을 든 채로 헤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날 보더니 여전히 화나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내 내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구나. 그럼 이 마지막 조각을 받거라.”
내 눈앞에 반짝하더니 황금빛의 커다란 금속조각이 나타났다.
마지막 진실의 나팔 조각이다.
난 즉시 조각을 잡은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진실이 나팔에 금속 조각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자석처럼 마지막 조각이 진실의 나팔의 비어 있는 부분에 달라붙었다.
<뿌뿌뿌뿌~ 나는야 진실의 나팔. 진실의 파수꾼. 알고 싶은 진실이 있다면 내게 물어보도록 해.>
난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진실의 나팔에게 물었다.
“진실의 나팔아. 진짜로 익시온이 헤라를 겁탈하려고 한 거야?”
<뿌뿌뿌뿌~ 그건 거짓말, 그건 거짓말. 제우스가 디아를 탐내서 꾸며낸 거짓된 이야기. 익시온만 억울하게 뱅글뱅글 굴러다니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뒤에 있던 동료들 중 일부는 긴장이 풀리는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됐다.
헤라는 무서운 눈으로 진실의 나팔을 붙들고 말했다.
[그게 진실이라고? 진짜 진실이냐고?!]
<뿌뿌뿌뿌~ 난 진실의 나팔.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 일이 제우스 님과 관련된 일이라 해도요.>
헤라는 진실의 나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녀의 두 눈은 질투와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
[내, 오늘이야말로 그 못된 버릇을 반드시 고쳐 놓을 테다.]
그리곤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약속대로 너흰 이곳을 지나가도 좋다. 이 방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마음껏 가져가도 좋아. 더 이상 내겐 필요 없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헤라는 방을 나갔다.
아마도 제우스를 만나러 갔으리라.
일단 우린 헤라의 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박힌 보석 정도가 값어치 있어 보였고 그 외에는 별거 없었다.
“역시 헤라를 잡아야지만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떨어지나 보네. 보석이나 챙겨서 얼른 제우스한테 가자.”
우린 잽싸게 의자에 박힌 보석들을 챙긴 다음 헤라의 방을 나왔다.
큰 소득은 없었지만 진실의 나팔을 완성했고, 그로 인해 헤라와 싸우지도 않고 그녀를 지나칠 수 있었다.
또 그녀가 제우스에게 간 걸로 봐서 분명 그 둘이 싸우고 있을게 뻔하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할지 즉석에서 정하기로 했다.
헤라의 방부터 제우스가 있는 곳까지는 몬스터가 몇 마리 없었다.
그마저도 헤라가 다 죽였는지 시체만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서 우린 전투 한 번 없이 제우스의 방 앞까지 올 수 있었다.
제우스의 방에선 헤라와 제우스가 격하게 싸우고 있었다.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그따위 짓을 벌여! 당신이 그러고도 최고신이라고 할 수 있어?]
[오해라니까. 어떤 놈이 그런 얘길 한 거야?! 이리 데리고 와보라고!]
상황을 보아하니 헤라의 말에 제우스는 끝까지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다.
이럴 땐 내가 나서야지.
난 동료들에게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제우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우스는 자신의 방으로 난입한 날 보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버러지 같은 네놈이 내 아내인 헤라를 현혹한 것이냐? 죽어라!]
그리곤 손에 번개를 소환해선 날 향해 던졌다.
말은 길지만 그가 번개를 던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 맞을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다.
환영보를 사용해 공격을 피한 나는 들고 있던 진실의 나팔을 앞으로 내밀며 질문했다.
“제우스가 디아를 겁탈하려고 익시온한테 누명 씌운 거 맞지?”
<뿌뿌뿌뿌~ 그 말은 진실. 진실. 모든 것은 제우스의 계획. 익시온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지.>
콰콰쾅.
그때 제우스가 던진 번개에 진실의 나팔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졌다.
그리고 들고 있던 나도 엄청난 전류에 감전이 됐다.
부르르르르.
“끄아아악!”
전기 내성이 75 퍼센트나 되는데도 온몸에서 연기가 나며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후아! 미쳤네. 이런 놈이랑 싸우려고 했다니. 저거 몇 번만 더 맞으면 바로 골로 가겠어.
어느 정도 몸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오자 난 제우스를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이 새끼야. 남자답게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 병신처럼 뭐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번개를 맞고 당연히 죽었어야 할 내가 멀쩡하자 이를 바득 갈았다.
증거를 인멸하려던 그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감히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 최고신인 날 모욕하다니. 이놈!]
그리고 그는 아까보다 더 거대한 번개를 들었다.
미친. 저건 맞으면 바로 즉사겠는걸!
긴장하며 그를 쳐다보는데 헤라가 갑자기 제우스의 뺨을 때렸다.
짝.
[다…당신 이게 뭐하는 짓이오! 감히 내 뺨을 때리다니…!]
하지만 헤라는 포탈을 열고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제우스의 팔을 잡고 포탈로 끌고 들어갔다.
[이…이게 뭐하는 짓이오?!]
제우스가 당황해 소리쳤지만 헤라는 분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따라와!!]
그리곤 제우스와 함께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우린 한동안 멍하니 제우스와 헤라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때 뭔가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투투투투투.
난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익시온이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 익시온이 오고 있었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