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무영족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종족을 말해요. 그들은 육신 없이 영체만 있다고 알려져 있죠.”
“그럼 그들이 사람을 그림자 안으로 데려갈 수도 있는 건가요?”
최박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고 들었어요. 무영족이 사는 곳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그들은 오직 그림자를 통해서만 현실과 만날 수 있죠. 그림자를 벗어나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게 그들의 운명이에요.”
“무영족은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구요?”
“그래요.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안에선 육체를 가지고 자유롭지만 그림자를 통해 현실로 나올 땐 영체만 나올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영체는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죠.”
그럼 소소는 뭐지? 얘길 들어보면 소소도 무영족인 것 같은데 얘는 혼자 막 돌아다니잖아! 이건 어떻게 된 거지?!
“근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무영족인데 그림자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애를 한 명 알거든요! 걔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무영족이 확실한가요?”
“직접 보여드릴게요. 소소야. 잠깐만 나와봐!”
그러자 내 그림자 안에서 온몸을 붕대로 가린 소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무영족이 맞나요? 내가 한 번 만져봐도 되죠?”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소소를 바라봤다.
소소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소소의 어깨로 두 손을 가져갔다.
스륵.
하지만 두 손은 가볍게 소소의 몸을 통과했다.
두어 차례 더 시도해본 최박사는 소소가 확실한 영체란 걸 확인하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무영족이 맞군요. 근데 그림자를 벗어나는 무영족이라… 아!”
그때 그녀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급히 이층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잠시 후 몇 가지 책을 들고 내려왔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책을 펼치고는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한참을 책을 뒤적이던 그녀가 갑자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여기 있네요. 이건 저희 선조 중 한 분이 천 년도 전에 쓰신 일지인데 여기 무영족에 대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잠시 읽어 드릴게요.”
<어느 날 어떤 이가 날 찾아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영족이라 했고,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찾아온 연유를 물으니 자신과 무영족 사이를 중재해달라고 했다.
난 즉시 무영족의 대표를 불러 중재를 시작했다.
내 그림자에서 솟아난 무영족의 대표는 그녀를 제물로 바치면 무영족 모두가 현실에서 그림자를 벗어나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난 하나의 생명이 한 종족의 자유보다 소중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무영족 대표는 내 결정에 불복하며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결국 그는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그녀는 판결이 내려지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럼 소소가 그 여자의 후손이란 말이에요?”
“그건 모르죠.”
“혹시 무영족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있나요?”
내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체화가 되면 가능하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죠.”
난 그 말에 소소를 바라봤다.
그녀도 내 맘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소소가 영체화를 시켜줄 수 있어요. 그럼 영체화가 되고 나선 어떻게 하면 되죠?”
그녀는 소소가 영체화를 시켜줄 수 있다는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런 말은 어떤 책에서도 본 적 없는데. 사실인가요?”
“네. 사실이에요!”
그녀는 방금 들은 내용을 노트에 간단히 메모한 다음 말했다.
“이론적으론 영체화가 된 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 무영족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끝인가요?”
“네. 저도 더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네요.”
난 이번엔 소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소야. 넌 그림자 안에서 다른 거 본 적 없어?”
“그림자 속은 생각보다 깊어요. 보통 제가 있는 곳은 굉장히 아늑하고 편안한 집 같은 곳이에요. 하지만 더 깊은 곳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어둡고 무서운 곳이에요.”
그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겠어.
사실 이 정도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대마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다.
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종족을 하나로 모을 열쇠니까 말이다.
“그럼 소소야. 영체화 좀 부탁해.”
하지만 소소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괜찮겠어요? 그림자 깊은 곳은 정말 무서운 곳이에요.”
“괜찮아! 넌 여기 남아있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어서 영체화나 시켜줘.”
그녀는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손을 통해 내 몸에 전해지더니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다 됐어요.”
“벌써?”
하지만 몸만 조금 가벼워졌다 뿐이지 그다지 변한 건 없어 보였다.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최박사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당신 그림자가….”
“그림자가 왜요?”
“그림자가 없어졌어요!”
“네?”
그녀 말에 황급히 발밑을 보자 정말로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영체화가 된 건가?
난 호기심에 주변에 있는 물건을 잡으려고 해봤지만 어느 것 하나 잡을 수 없었다.
확실히 영체화가 된 걸 확인하자 소소에게 물었다.
“그림자로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야?”
“그냥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아! 물에서 잠수하듯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될 거에요. 혹시 안 되면 제가 가면서 알려줄게요.”
“응? 넌 굳이 안 가도 돼. 같이 가면 나보다 네가 더 위험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녀는 결심을 굳혔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니가 사라졌는데 제가 가는 건 당연해요. 언닐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요!”
그녀의 의지가 확고해 보여 더는 말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림자를 찾아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이렇게요.”
그녀는 최박사의 그림자 속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그리곤 고개만 빼꼼히 내밀곤 나를 쳐다봤다.
“잠시 실례할게요.”
난 최박사에게 양해를 구하곤 그녀의 그림자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몸이 그 안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물 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 말대로 굉장히 아늑했다.
숨도 쉴 수 있었고 움직이는 것도 내 의지대로 가능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더 아래로 내려가야 되는 거야?”
“그래야죠. 근데 거긴 저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에요.”
“걱정 말고 가자고!”
난 앞장서서 깊이깊이 내려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은 더 짙어졌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저 멀리 작은 점이 보였다.
저게 뭐지?
좀 더 내려가자 그건 점이 아니라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어서 가보자!”
난 소소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 한 다음 빛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빛이 나오는 곳은 얇은 반투명 막으로 덮여 있었다.
그곳에 손을 대자 포탈처럼 안으로 쑥하고 들어갔다.
들어갔던 손을 빼낸 다음 소소를 돌아봤다.
“여기가 입구 같은데 들어가볼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난 망설임 없이 빛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쑤욱.
빛을 통과해 나온 곳은 조그만 마을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 온통 무채색이었다.
그림자 너머의 세상이라더니 이름이랑 딱 어울리는 분위기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행색이나 건물의 형태를 봤을 때 조선 시대와 유사해 보였다.
이거 무슨 민속촌에 온 느낌인걸!
특이한건 건물뿐 아니라 사람들도 모두 무채색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날 보고는 깜짝 놀라며 소릴 질렀다.
“꺄악! 외부인이다. 외부인이 들어왔어!”
그 소리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즉시 우릴 에워쌌다.
그제야 난 그들과 내가 다른 걸 알았다.
이곳 주민들은 몸이 무채색이었지만 난 원래의 색채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외부인은 영체화를 해도 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주민과 외부인의 구분이 가능한 듯 했다.
소소를 돌아보자 그녀도 역시 무채색이다.
이걸로 그녀도 무영족이란 게 확실해졌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익.
그 소리에 우릴 에워싸고 있던 이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누군가 걸어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그 역시 무채색이었지만 흑백의 컬러를 조화롭게 사용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마녀의 숲에서 잡아 온 이들 중 한 명인가?! 어서 저 놈을 잡아라!”
그의 명령에 옆에 있던 부하들이 날 붙잡았다.
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녀들은 역시 이곳에 있는 모양이다.
그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들에게 잡혀가면서 난 소소를 힐끗 돌아봤다.
그녀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내가 끌려온 곳은 교도소 같은 수용시설이었다.
그들은 큰 방에 날 집어넣고는 문을 잠그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방안을 둘러보니 반가운 얼굴이 몇 명 보였다.
바로 김호근 등의 짐꾼들이다.
“무사했네?”
내가 웃으며 인사하자 그들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지만 다가오지는 못하고 힐끔거리며 누군가의 눈치를 봤다.
“어이, 신입! 밖에서 왔나봐? 색이 아주 화려하구만!”
고개를 돌려보니 무채색의 남자 한 무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갇혀 있는 진짜 죄인인 모양이다.
“어. 밖에서 왔어. 근데 너흰 왜 그리 칙칙하냐?”
“흥! 밖에서 와서 이곳 상황을 잘 모르나 본데 일단 무릎부터 꿇….컥!”
“닥치고. 내가 지금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빨리 끝내자.”
간단한 푸닥거리가 끝난 후 난 김호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한 쪽 구석에 기절해있는 죄인들을 힐끔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갑자기 그림자 속으로 끌려 들어왔는데 저흰 여기다 가두고 마녀들은 다 어딘가로 데리고 갔어요.”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어?”
“네….”
그는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건물로 온 건 아니란 거지? 그럼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지. 나 잠깐 나갔다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고생해라.”
그리곤 간단히 감옥문을 뜯어내곤 밖으로 나갔다.
물론 문을 다시 달아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간수 한 명을 잡은 다음 협박하며 마녀들이 잡혀 있는 곳을 물었다.
“얼마 전에 잡혀 온 마녀들은 어디에 갇혀 있지?”
“그… 외부인들은 모두 라이콴님 저택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말했다.
“라이콴? 그게 누구야?”
“그분은 저희 무영족을 이끄는 족장님이세요. 마을 중앙의 저택에 살고 계세요….”
필요한 정보를 다 들은 난 간수를 기절시킨 다음 수용소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람들 시선을 피해 도시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최강철의 집만큼은 아니지만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딱 봐도 저기가 족장이 사는 곳인가 보네. 그럼 조용히 한 번 들어가볼까!”
다음 순간 내 신형은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