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벌써 900년이나 지난 일이네요.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 들렸다고 하면서 한 무녀가 절 찾아왔어요. 그녀는 내가 마녀란 사실도, 스승님의 존재도 모두 알고 있더군요. 그리곤 놀라는 날 보고 언젠가 위기의 순간에 스승의 징표를 가진 이가 찾아올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 후로 다시 만난 적은 없답니다.”
그 무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더는 아는 게 없는 듯 하자 다른 걸 물었다.
“아까 저 정도로 강한 사람을 세 명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누구죠?”
“한 사람은 스승님이에요. 스승님은 당시 대륙 최고의 술사셨고 어떤 누구도 스승님의 상대는 못됐어요. 다른 한 사람은 200년 정도 전에 우연히 만난 남자였는데, 신비한 도술을 사용해서 동시대에 그 사람의 적수가 되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지막 한 명은 누구죠?”
“그는 스스로를 무적자라고 했어요.”
“무적자요?”
그리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격변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마녀의 숲에도 게이트가 열렸다고 한다.
게이트는 높은 등급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마녀들에게는 그것마저도 큰 위협이었다.
그때 누군가 마녀의 숲 입구 결계를 부수고 들어와서 게이트를 막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를 무적자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근데 낮은 등급의 게이트면 제가 아니라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걸로 그가 강하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죠. 그가 그냥 평범하게 게이트를 닫았다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거에요. 하지만 그는 나타나자마자 게이트를 부쉈어요!”
“게이트를 부숴요?”
던전 포탈도 아니고 게이트를 부쉈다고? 그게 가능한 거야?
“저도 그런 광경은 처음 봤어요. 게이트 앞에 서서 한껏 힘을 모은 그는 한순간에 게이트 입구를 소멸시켰어요. 그때 터져나온 어마어마한 힘은 거의 스승님에 비견될 만 했어요.”
“그 정도였나요?”
그녀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자라…. 누구지? 지금이야 대격변이 있은지 시간이 좀 지나서 강한 각성자들이 많아졌지만 대격변 초기에는 그 정도로 강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럼 그 사람은 게이트만 부수고 떠난 건가요?”
“네. 게이트만 부순 다음 홀연히 떠났어요.”
“흠!”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퍼즐을 맞춰보면 최민혁에게 약물을 전해 준건 김나령이 분명해. 보아하니 그녀가 토끼탈을 쓴 여자를 최민혁에게 소개시켜 준 것 같고…. 아까 뱀의 탈을 쓴 남자가 김나령을 왜 죽인 걸까?
분명 동료가 확실한데, 갑자기 그녀를 죽였다.
그렇다면 그녈 죽일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혹시 그녀가 하지 말아야 할 뭔가를 말한 건가?
그것 외에는 그녀를 죽인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죽기 전에 뭐라고 했더라…. 마도 천하라고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즉시 대마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마도 천하라고 들어보셨어요?”
“마도 천하요?!”
그녀는 의외로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자 내가 제대로 짚었다는 걸 알았다.
“그 단어는 어디서 들으신 거죠?”
“아까 김나령이 죽기 전에 한 말이에요. 그 분은 마도 천하를 이루실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대체 마도 천하가 뭐죠?”
“그 얘기를 하려면 이종족의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해요.”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종족은 흔히 알려진 종족 외에도 뱀파이어, 구미호, 신선 등 많았다.
그들은 큰 다툼 없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았는데, 4300년 전 처음으로 자신을 이종족들의 왕이라 칭하는 이가 나타났다.
스스로를 마인이라 얘기한 그는 모든 이종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했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종족이었는데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엄청난 암흑 투기로 모든 이종족을 압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잔혹했고 선악의 기준이 뒤바뀐 인물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그의 힘 앞에, 모두들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그에 반하는 모든 이종족의 대표가 힘을 합쳐 대항해 겨우 그의 무리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고, 그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후 그는 힘을 키울 때마다 한 번씩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온 천지가 이종족의 피로 덮일 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그가 나타난 게 1100년 전이었어요. 그땐 스승님도 전투에 참여하셨는데 스승님 말씀에 의하면 당시 그는 치명상을 입고 도망쳤다고 해요.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살아있었나 보네요.”
“그럼 마도 천하라는 건 무슨 뜻이죠?”
“그건 그가 늘 외치던 말이에요. 마도 천하를 만들겠다는!”
“흠! 생각보다 일이 커지네요. 전 이종족이 얽힌 일이라니. 김나령이 죽으면서 한 말이니 거짓말은 아닐테니 그 마인과의 전쟁도 준비해야겠어요.”
대마녀는 내 말에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만약 그녀 말대로 조만간 마인이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세상의 안위를 건 싸움이 될 거에요. 예전까진 인간은 배제하고 이종족끼리만 싸웠지만 이제 인간도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거죠.”
난 그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뱀의 탈을 쓴 남자도 죽고, 김나령도 죽었으니 저쪽에선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를 거에요. 그러니 은밀히 다른 이종족의 수장들과 접촉해서 미리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건 제가 연락을 취해보죠.”
“하지만 조심하셔야 될 거에요. 아까처럼 동물의 탈을 쓴 자들이 계속 다른 이종족들을 흡수하려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나중엔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그렇게 하죠. 혹시 더 궁금한 게 있나요?”
그녀는 요 몇 시간 사이에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내색은 안 하지만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아까 말을 다 못 끝냈는데 ‘마녀의 하루’를 저희 회사가 인수하는 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나령도 죽어서 어차피 누군가 ‘마녀의 하루’를 맡아서 관리해야 하지 않나요?”
“흘흘흘. 그 건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마녀평의회를 통해 결정한 다음 알려드리도록 하죠! 내일 긴급회의를 할 거니까 내일 안으로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럼 다 된 건가요?”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제가 듣기로 마녀의 숲에 들어간 각성자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죠?”
“그건 그냥 소문이 와전된 것뿐이에요.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입구에 쳐놓은 결계도 뚫지 못하거든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푹 쉬시고 내일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난 대마녀에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메이화와 소소도 보이지 않았고, 마녀들도 모두 옮겼는지 주변은 깨끗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땐 명상이 최고지!”
난 자리에 앉아 천의심법을 사용하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명상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됐다.
난 아침 시간이 돼서야 명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한숨도 안 잤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식당으로 내려오자 짐꾼들이 미리 내려와 있는 게 보였다.
“좋은 아침!”
그들은 내 인사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90도로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응? 다들 아침 안 먹어?”
그 말에 김호근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어젯밤 일 때문에 식당을 안 하는 것 같은데요….”
그는 아직도 내가 무서운지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호근 씨. 나 마녀의 하루에 좀 데려다 줄 수 있어? 내가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말이야!”
“그럼요.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를 따라 밖으로 약간 쌀쌀하지만 상쾌한 아침 공기가 훅하고 밀려왔다.
‘마녀의 하루’는 생각보다 숙소 가까이에 있었다.
“여기가 ‘마녀의 하루’입니다. 그럼 전 가봐도 될까요?”
“그래. 난 잠시 둘러보다 갈게.”
그는 깍듯하게 인사한 후 도망치듯 사라졌다.
다행히 이른 시간인데도 ‘마녀의 하루’는 영업을 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김나령 방에서 맡았던 것과 유사한 약초 향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상쾌하고 건강해지는 향이었다.
상점 안에는 수많은 약물과 비약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회복력을 올려주는 약, 30분 동안 힘을 100만큼 올려주는 약, 이성에게 호감을 얻는 약 등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약들이 가득했다.
이걸 던전에 가는 각성자들에게 독점으로 제공받아 판매하면 수익이 어마어마하겠어!
사실 내가 ‘마녀의 하루’를 인수받으려는 이유는 특수 약물을 각성자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사이트 서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던전의 위치를 확인하고 공략을 보고 있다.
거기다 아이템 거래도 활발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는 물약과 비약 등을 함께 판다면 그 수익은 엄청날 것이다.
어떤 제품들이 있는지 다 둘러본 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잠시 숙소에 앉아 쉬고 있는데 조한희에게 전화가 왔다.
“한희야, 무슨 일이야?”
[태준 씨.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길드 연합이 우리 회사로 쳐들어왔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길게 얘기할 시간 없으니까 어서 올라와! 내가 일단은 잡아놓고 있을 테니까!]
갑자기 길드 연합이 우리 회사에 왜 온 거지? 쳐들어왔다는 말을 쓴걸 보니 좋은 의도로 온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어서 가봐야겠다.
난 즉시 김호근을 불러 연락처를 받아둔 뒤 여기서 대기하라고 말하고는 대마녀가 있는 오두막으로 갔다.
그녀는 회의를 하러 갔는지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난 간단하게 메모를 적어 남겨두고는 즉시 마녀의 숲을 나왔다.
그리곤 미친 듯이 서울로 달려갔다.
대략 한 시간쯤 후 회사 로비에 도착해 조한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지금 회사에 들어왔어. 어디로 가면 돼?”
[빨리 와줘서 고마워! 10층 회의실로 와줘.]
“알았어.”
난 곧장 10층으로 올라간 다음 회의실 문을 열었다.
날 보고 안도의 표정을 짓는 조한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고, 그 뒤로 여덟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중 몇몇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한 명은 미르 길드 길드장인 김신우고, 저 사람은 태산 길드 길드장인 최태산이구나! 다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그들은 소설 속에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더 늙은 모습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무척 반가웠다.
특히 최태산은 정의감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 끝까지 히든 보스 세력을 물고 늘어지다 안타깝게 죽었었다.
“피앤씨 대표 박태준입니다. 다들 무슨 일로 오셨죠?”
난 반가운 마음에 친절하게 인사했지만 그들은 전혀 반갑지 않은 듯 했다.
“흥! 우릴 이렇게 기다리게 만든 게 어떤 놈인가 했더니 새파란 애송이구만!”
“뭐? 새파란 애송이?”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