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분명 일대일 대결이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갑자기 시련이라니…!
하지만 들려오는 다른 대답은 없었다.
들어왔던 포탈도 사라져서 돌아가려면 꼼짝없이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젠장! 별 수 없네. 최대한 빨리 시련을 돌파하는 수밖에! 근데 무슨 시련을 말하는 거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길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거구의 남자였는데 그는 특이하게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곤봉을 보자 곧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저 사람이 곤봉의 사나이 페리페테스?
평소 그리스 신화를 좋아해서 많이 읽었었는데 기억난다.
페리페테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들로, 곤봉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을 때려 죽여서 곤봉의 사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러다 테세우스한테 똑같이 맞아죽었었지!
내 지척까지 다가온 거구의 사내는 곤봉을 휘두르며 무섭게 말했다.
“난 페리페테스.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선 내 곤봉을 다섯 대 견뎌야 한다.”
“다섯 대? 그거면 되겠어?”
“뭣이?”
“다섯 대만 견디면 되겠냐고? 그럼 빨리 때려. 시간 없으니까!”
바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맞는 게 시련일 수도 있어서 일단 맞아보기로 했다.
페리페테스는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는 들고 있던 곤봉을 힘차게 휘둘러 내 머리를 쳤다.
빠악.
“한 대”
내가 태연하게 숫자를 세자 그는 이번엔 두 손으로 곤봉을 들곤 정수리를 내리쳤다.
빠아악.
“두 대.”
페리페테스는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자신의 곤봉을 바라봤다.
하지만 난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들고 있는 곤봉에 관심이 갔다.
저 정도 공격에 흠집 하나 안 나는 걸 보면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서 준 물건이 분명해! 무조건 먹어야지!
그 사이 페리페테스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빡.
“세 대.”
빠각. 빠가각.
“네 대, 다섯 대. 끝!”
다섯 대뿐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했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그를 보고 빙그레 웃어줬다.
“이제 됐지? 나 간다.”
하지만 그는 내 예상대로 날 가로막았다.
“이대론 못 가지. 내가 얘기 안 한 게 있는데 넌 외국인이로구나. 이 나라 사람이 아니면 다섯 대가 아니라 열 대를 맞아야 된다.”
“그래? 그럼 다섯 대 더 때려!”
난 어서 치라고 머리까지 들이밀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곤봉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곤봉 전체가 은은한 황금빛에 휩싸였다.
그걸 확인한 그는 힘차게 머릴 내리쳤다.
빠가각.
“여섯 대. 이제 네 대 남았네!”
내 말에 그는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분노했다.
그리고 곤봉을 마구 휘둘러서 날 때렸다.
빠각. 빡. 빠악.
“열 대. 열 한 대. 열 두 대! 자, 이제 그만하자!”
난 그가 내치는 곤봉을 손으로 잡았다.
“두 대 더 맞았으니까 너도 두 대만 맞자!”
그가 손 쓸 새도 없이 난 곤봉을 뺏어들고는 잔뜩 내공을 불어넣었다.
웅웅웅….
내공이 주입된 곤봉 전체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돌았다.
그리곤 그대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파각.
한 대일 뿐이지만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바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난 급히 오른손을 살폈다.
“휴! 곤봉은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다.”
풍경은 변했지만 곤봉은 그대로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소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속이었다.
난 들고 있던 곤봉을 맛있게 씹으며 무슨 일어나길 좀 더 기다렸다.
와작. 와작.
아무도 없는 숲속에는 곤봉 씹어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흠. 여기서 기다리는 게 아니고 앞으로 가야되는 건가?”
난 남은 곤봉을 마저 씹어먹고는 걸음을 옮겼다.
- ‘헤파이스토스의 곤봉’을 섭취했습니다. 힘이 107만큼 오릅니다.
역시 신이 만든 무기라 그런지 특별한 이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제법 많이 오르는구나. 어쩌면 여기서 능력치 좀 올릴 수도 있겠는걸!
이곳은 신화 속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소다.
그 말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 역시, 신화 속 무기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급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희가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지난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니까!
그 후로 테세우스 모험담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만났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소나무에 묶어 찢어 죽였던 시니스.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던 스키론.
그리고 사람을 쇠침대에 눕혀 길이가 짧으면 늘이고, 길면 칼로 잘라버렸던 프로크루스테스도 만나서 역시 죽여버렸다.
그 중 가장 짜증났던 건 미노타우로스를 만났을 때다.
갑자기 미궁 한가운데로 이동해 미노타우로스와 싸웠는데 그놈이 강해서 짜증이 났던 게 아니다.
싸우다 갑자기 도망을 간 미노타우로스를, 미궁 안에서 찾기가 어려워 짜증이 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나타난 적들을 죽이다 보니 이번엔 소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초원이 나타났다.
“여긴 또 어디지?”
내 손엔 미궁에서 주운 창이 들려있었다.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들고 있던 거였다.
그때 천둥이 치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나와 페이리토오스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지!”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황급히 고갤 돌리자 황금빛 갑옷을 걸친 잘생긴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오는 듯 했는데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페이리토오스는 멋진 친구였다. 물론 지옥에 있긴 했지만 내가 꼭 구하러 갈 생각이었지. 근데 그걸 네가 망쳐버린 거야. 난 이제 다시는 페이리토오스를 보지 못하게 됐다!”
그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망할 신들이 정한 규칙 때문에 나서지 못했는데, 네가 당당히 내 상대가 될 자격을 갖추었으니! 이제 맘 놓고 널 죽여주마!”
테세우스의 검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우르릉.
번개의 힘이 깃든 건지 검 주변으로 무수한 스파크들이 튀어 올랐다.
저건 피해야 돼! 그대로 맞았다간 위험하겠어!
아직 전기에 대한 내성은 50 퍼센트 밖에 안 된다.
그래서 저런 공격은 피하는 게 좋다.
번개의 힘이 깃든 테세우스의 검이 내 몸을 머리부터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그가 가른 건 내 환영이었다.
난 어느새 그의 뒤편에 서 있었다.
“호오! 그 움직임은 뭐지? 처음 보는 발걸음인걸.”
그는 몸을 돌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놀랄 것 없어. 이것도 처음 보는 걸 테니까! 파천!”
들고 있던 창이 한 줄기 빛처럼 테세우스를 향해 날아갔다.
“좋은 움직임이군!”
그는 언제 소환했는지 황금빛의 방패를 들고 파천을 막았다.
콰콰콰콱.
테세우스가 두 걸음 물러나긴 했지만, 그가 들고 있는 황금빛 방패는 아무런 흠집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놀란 듯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대단하군. 이 정도 공격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그럼 나도 답례로 재밌는 걸 보여주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괜찮다니까!”
난 손을 흔들며 사양했지만 그의 검은 여지없이 날 향했다.
다만 이번엔 베기가 아니라 찌르기였다.
쿠쿠쿠쿡.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급히 환영보를 사용해 피했지만 그의 검 끝은 계속 날 따라왔다.
“이렇게 하는 거였나? 생각보다 어려운 걸음걸이군.”
그는 내 환영보를 흉내내며 따라붙어 검을 계속 찔러 넣고 있었다.
저…저런 미친 천재 새끼! 이걸 한 번 보고 따라한다고?
최대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환영보를 한 번 본 것만으로 흉내내다니!
그야말로 미친 재능이다.
난 환영보를 극성으로 전개해 일단 그의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자신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자 그는 공격을 멈추고 아까보다 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거기서 더 빨라질 수 있는 거였나? 그건 나도 연습을 몇 번 해봐야 될 것 같군.”
“몇 번 연습? 이 새끼가 사람 우습게 만들고 있네. 닥치고 이것도 막아봐라!”
그리곤 화룡도를 소환해 손에 들었다.
화룡도를 본 테세우스는 눈에 이채를 띄며 감탄했다.
“엄청난 보도로군! 근데 어딘가 부족한데?!”
난 그의 말은 무시하고 바로 화룡도를 내리 그으며 소리쳤다.
“단월!”
화룡도의 붉은 도신을 따라 모든 게 반으로 갈렸다.
그는 급히 방패를 들어 막았지만 곧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치치치치칭.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테세우스와 나는 충격을 못 이기고 모두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이번 공격엔 정말 놀랐다. 진지하게 상대해야겠군!”
그러면서 그는 공격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단월이 막혔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가득했다.
단월이 막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는 단월이….
물론 단월이 무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완전한 단월도 아니었기 때문에 언젠가 막힐 거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막히자, 그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그때 가슴 쪽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충격 받은 곳을 중심으로 강한 전류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끄아아악!”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테세우스의 검이 내 가슴을 찌른 것이다.
물리적인 충격은 아무 문제가 안됐지만 문제는 전기로 인한 데미지다.
다행히 전기가 그다지 많이 흐르진 않았는지 곧 데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일어나야지. 그 정도로 쓰러졌다면 실망이 컸을 거야!”
“실망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덤벼! 우리 사나이답게 무기 버리고 주먹으로 승부하자!”
난 어떻게든 그의 손에서 검을 떼어놓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근데 그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래? 그럼 맨손으로 싸우지 뭐. 때려 죽이는 맛도 괜찮지!”
그리곤 들고 있던 방패와 검을 바닥에 내려놨다.
나도 들고 있던 화룡도를 소환 해제했다.
우린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싸우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무투도 완벽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격투 센스가 해진우보다 더 좋은데다 파괴력까지 엄청났다.
하지만 전기의 힘을 제외하자, 내겐 아무 데미지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 공격은 테세우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권강이 테세우스의 몸에 닿았지만 신비로운 힘에 의해 보호되는지 대부분 공격이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이대론 안돼! 내공이 더 떨어지기 전에 큰 거 한 방으로 승기를 잡아야 돼!
난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압천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테세우스의 주먹이 날아오는 타이밍에 그의 주먹을 향해 마주 손바닥을 뻗으며 소리쳤다.
“후웁! 압천!”
콰콰콰.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히면서 낸 소리라곤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리고 내 내공은, 손바닥과 닿은 그의 주먹을 통해 내부로 흘러 들어가 그의 몸 안에서 터졌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