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코 위로는 잘려나간 얼굴.
온몸에 수북히 돋아 있는 송곳같은 털들.
팔 다리는 기괴한 모습으로 제각각 꺾여 있어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두 번째 구역 몬스터는 그런 흉측한 모습으로 내게 충격을 줬다.
“윽! 저것들은 생긴 게 대체 왜 저래?!”
거기다 두 번째 구역은 분위기도 음산한 게 꼭 폐가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빛도 거의 없어 어두침침했고 벽에선 뭔가 끈적끈적한 게 연신 흐르고 있었다.
“우리도 처음 들어와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같은 던전 안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하고 말이야!”
조한희도 인상을 찌푸리며 내 말을 거들었다.
“그래도 좋은 아이템을 떨구는 놈들이니 감사하며 잡아야지. 감상은 이쯤 하고, 어서 잡자!”
최우혁이 의욕적인 목소리로 외치자 다들 장비를 들고 전투 준비를 했다.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들은 눈이 없어서인지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생긴 것과 달리 움직임이 느리고 방어에 집중된 몬스터라 조한희의 화살 공격에 다들 맥없이 쓰러졌다.
“이거, 너무 쉬운데?”
너무 쉽다.
아무리 조한희가 들고 있는 활이 사기템이라 해도 이 정도로 난이도가 내려가는 건 말도 안 된다.
분명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뭐지?
두 번째 구역을 진행하면서 그 위화감은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데 저런 아이템들을 준다고?
죽은 몬스터들이 떨구는 아이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보통 아이템 수준은 몬스터 난이도에 비례한다.
즉, 몬스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좋은 아이템을 떨군다는 소리다.
근데 이 몬스터들은 난이도가 쉬운데도 좋은 아이템을 떨궜다.
마치 뭔가를 준비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왜? 무슨 일인데?”
최우혁이 갑자기 멈춘 날 향해 물었다.
“이렇게 쉬운 몬스터가 저 정도로 질 좋은 아이템을 줄 리가 없어. 분명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자 최우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쉬운 몬스터가 좋은 아이템 주면 그야말로 나이스지. 뭘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어?”
하지만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여긴 다른 던전도 아니고 최상급 던전이야.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선 절대 그럴 리 없어. 분명 뭔가 있어. 뭔가가….”
“그래서 그 뭔가가 뭔데?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해진우도 궁금한지 내게 물어왔다.
“확실하진 않지만 분위기로 봐서 우리한테 준비를 시키는 거 같아.”
“준비?”
“몬스터들이 떨어트리는 무기를 보면 모두 화염 내성이 붙은 아이템들이야. 그 말은 화염과 관련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
말을 하다 보니 점점 확실히 정리가 됐다.
에우리티온 때를 생각해보면, 보스와 만나자마자 그동안 만났던 다른 켄타우로스들을 불러들였었다.
그러다면 두 번째 중간 보스 역시 만나면 화염과 관련된 뭔가를 시전할 가능성이 높다.
난 생각한 바를 동료들에게 말한 다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무래도 찝찝해서 그런데 일단 나 혼자 보스한테 갔다와볼게!”
“뭐? 혼자?”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너무 위험해! 태준 씨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보스한테 가는 건 안 될 말이야!”
조한희가 격하게 반대했다.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걱정 안 해도 돼. 나 지금 완전 쎄졌으니까!”
하지만 동료들은 계속 위험해서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쩔 수 없지. 이럴 땐 직접 보여주는 게 가장 빠르겠어.
“좋아. 그럼 내가 직접 보여줄게. 이제부터 몬스터는 내가 다 잡을 테니까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어!”
그 정도까지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앞으로 가자 몬스터 무리가 있는 게 보였다.
근데 그 사이로 색다른 모습을 한 몬스터가 있었다.
유일하게 그 몬스터만 온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붉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이제야 그나마 봐줄만한 놈이 나왔네. 그럼 나 갔다올게.”
하지만 동료들이 갑자기 날 말리기 시작했다.
“가면 안 돼. 저 놈 네임드 몬스터야. 에우리티온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라고! 다 같이 덤벼도 겨우 잡을 수 있는 놈이야!”
그 말에 난 오히려 씨익하고 웃었다.
“그럼 더 잘 됐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난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느새 몬스터들 사이로 들어갔다.
동료들은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전투태세를 갖추고 긴장하며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난 몬스터들에게 달려가자마자 2식 풍천각을 시전했다.
순간 내 몸을 중심으로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가 생겨났는데, 강기는 예전과 달리 선명한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기에 휩쓸린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 날 보는 동료들의 눈빛은 걱정에서 경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말이 돼? 저 네임드를 한 방에 정리했다고?”
“형. 원래 이 정도로 강했던 거야? 며칠 전이랑은 완전히 다른데?!”
난 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서만 잠깐 갔다올게. 너희는 에우리티온이 있던 방에 잠깐만 가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그제야 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에우리티온이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내가 보여준 무위가 압도적이었단 뜻이다.
사실 가장 놀란 건 나다.
어느 정도 강해졌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건 그걸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제우스한테도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슬슬 최상급 던전을 완전 공략하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아이즈 문제부터 해결하고 내려와도 늦지 않아!
빠른 속도로 몬스터들을 잡다보니 어느새 두 번째 중간보스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눈앞에는 뜨겁게 불타는 불의 장벽이 쳐져 있고 불길 사이로 두 번째 중간 보스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럼 들어가 볼까!”
망설임 없이 불의 장벽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입고 있던 옷에 내공을 불어넣어 어느 정도 불에 저항할 수 있게 해둔 상태라 다행히 옷은 타지 않았다.
불의 장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원형 경기장 안에 서 있는 두 번째 중간 보스가 보였다.
중간 보스는 전신에 고대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날 보자 놀란 듯한 눈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페이리토오스! 불타는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말과 동시에 그의 발밑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확하고 펼쳐졌다.
그리곤 모든 곳이 불타기 시작했다.
나와 보스가 서 있는 장소뿐만 아니라, 내가 걸어왔던 던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그제야 화염 내성 아이템이 필요한 이유를 알았다.
페이리토오스와는 불타는 경기장에서 싸워야 한다.
만약 화염 내성 장비가 없는 상태로 싸우게 되면 순식간에 불에 타 죽을 것이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동료들은 잘 보냈어. 잘못 했으면 나 빼고 다 죽을 뻔했네!
불길은 이 구역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에, 보스와 싸우지 않더라도 이 구역 안에 있다면 화염에 의한 데미지를 입게 된다.
그래서 파티원들이 여기까지 같이 왔다면, 보스와 싸우지 않더라도 불길 때문에 대부분 타 죽었을 것이다.
난 불타는 경기장 위에 태연하게 서서 페이리토오스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페이리토오스라면,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려다 지옥에 갇힌 익시온의 아들이잖아! 그래서 나왔던 몬스터들이 전부 기괴하게 생겼었구나! 지옥에 있는 몬스터들이라서….
[너는 왜 불타지 않는 것이냐?! 왜?!]
페이리토오스는 아무 데미지도 받지 않는 내가 못마땅한지 화를 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시간 없으니까 닥치고 죽자! 화룡도!”
환한 빛과 함께 붉은 도신의 화룡도가 오른손에 들렸다.
그리곤 곧바로 5식 단월을 사용했다.
“단월!”
화룡도의 도신을 따라 눈앞의 모든 것이 세로로 갈라졌다.
그건 날 향해 달려들던 페이리토오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몸은 서서히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휘유! 단월 위력이 장난 아니구나! 이 정도면 카르멘뿐만 아니라 랭킹 3위랑도 해볼 만 하겠어.”
그 정도로 단월의 위력은 엄청났다.
다만 단점이라면 일격필살의 기술이라, 실패했을시 상대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일단 아이템부터 확인해 볼까?”
바닥에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황금빛 금속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 ‘진실을 듣는 나팔’의 조각을 입수하셨습니다. 조각을 모두 모으면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될지도.
그 외에는 별다른 아이템이 없었다.
“중간 보스란 새끼가 왜 이리 가진 게 없어? 완전 거지 새끼잖아!”
투덜거리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친구를 죽인 당신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테세우스?”
테세우스면 헤라클레스랑 동급으로 취급되는 그리스 신화 최대 영웅 중 한 명 아닌가?
- 테세우스가 당신과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고 싶어합니다. 도전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지? 시간도 없는데 포기할까?
하지만 포기하기엔 테세우스라는 이름이 주는 유혹이 너무 컸다.
얼마나 강한지, 직접 싸워보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내 강함도 시험해 보고 싶다.
“그래. 후딱 싸우고 돌아오면 되지 뭐! 보스전 한 번 더 치른다고 생각하지 뭐!”
난 단순하게 생각하고 도전을 터치했다.
- 테세우스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눈앞에 붉은색의 포탈이 생성됐다.
“붉은색?!”
붉은색 포탈은 단 한 번 본 적이 있다.
지난번 대격변 때 키라와 연결된 포탈이 붉은색이었다.
그럼 테세우스가 키라급이란 말이야?
힘을 몇 단계나 낮추고도 SS급의 힘을 가지고 있던 게 키라다.
키라가 온전한 힘으로 나타난다면 그 힘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근데 테세우스가 그 정도 급이라니.
갑자기 들어가기 망설여졌다.
“가도 괜찮을까? 괜히 갔다가 뒤지는 거 아냐?!”
하지만 곧 양뺨을 손바닥으로 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에이 씨발. 그냥 가 보자! 죽기 밖에 더하겠어!”
난 맘이 약해지기 전에 곧장 포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밝아졌을 땐 완전히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기에 테세우스가 있다고?”
내가 서 있는 곳은 넓은 들판이 펼쳐진 길 위였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 노을과 어우러진 들판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내 친구를 죽인 이여. 그로 인해 내게 도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얻었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자격. 시련을 통과해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내게 도전하라!]
“뭐? 일대일 대결이라며? 근데 시련? 도전? 이게 뭔 개 같은 소리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