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녀는 도망갈 의욕도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검은 액체를 모두 불태워 버린게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이제 저 검은 액체가 뭐였는지 말해줄래?”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멍하니 허공만 응시한 채 작은 소리로 의미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내, 아이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영원히….”
저게 무슨 말이지?
“누가 안 죽는다고 했다고? 저거 네가 만든 거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충격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계속 비슷한 말만 되뇌었다.
“그 사람… 안 죽는다고 했어….내… 아이들….”
완전히 정신이 나갔네.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집부터 조사하기로 했다.
그녀가 작업한다던 주방 밖으로 가자 정체 모를 괴생명체가 난도질 된 게 보였다.
“우웩! 저걸로 요릴 하려고 했던 거야? 으으! 먹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그곳을 지나자 꽤 큰 방이 나왔다.
방 여기저기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수없이 붙여져 있었다.
그러다 책상에 놓인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는 일기 형식의 일지였다.
<1월 2일>
실험에 진전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든 실험에 성공해 날 쫓아낸 그 썅년에게 복수할 것이다.
<1월 5일>
웬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뱀의 탈을 쓰고 있던 그 남자는 내 실험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를 믿어도 되는 걸까?
<1월 12일>
그 남자의 말대로 했더니 실험이 성공했다.
최강의 키메라를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성공을 기념하며 아들, 딸과 함께 작은 축하파티를 했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 중 하나다.
<1월 14일>
아들과 딸의 상태가 이상하다.
내 기억도 부분부분 끊겨있고.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1월 16일>
드디어 원인을 알아냈다.
원인은 저 더러운 키메라다.
저걸 없애버려야 한다.
<1월 17일>
점점 의식이 유지되는 시간이 짧아진다.
언제 의식이 끊길지 알 수가 없다.
딸아이 상태도 이상하다.
밖에 나갔다 올 때면 온몸에 피가 묻어 있다.
하지만 충격적인 대답을 들을 것 같아 왜 그런지 묻지 않았다.
이젠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섭다.
<2월 2일>
이번엔 열흘이나 의식이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을 사람 대부분이 키메라에 잠식당한 상태다.
아들마저 심각한 실험을 당한 듯 괴물이 되어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뻔하다.
바로 나.
내가 아들을 키메라로 만드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리곤 눈물 자욱과 함께 글이 번져 있었다.
그게 마지막 일지였다.
일지를 다 읽은 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뱀의 탈을 쓴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거네. 아까 할머니도 제정신이 아닌 거고….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난 뭔가 더 알아내기 위해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 외에 찾아낸 거라곤 키메라를 만드는 제조법이 적힌 종이가 다였다.
일단 그 종이를 챙긴 다음 밖으로 나와 다시 식당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지붕에는 여전히 넋을 잃은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녀는 검은 키메라가 아닌 다른 뭔가에 의해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때 머릿속에 최민혁이 몰래 조금씩 먹였다던 약이 떠올랐다.
최우혁을 미치게 만들었던 그 약.
혹시 저 할머니도 그 약에 당한 거 아닐까?
추측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최민혁을 도왔던 토끼탈과 할머니를 찾아왔다던 뱀탈이 같은 조직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때 할머니가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아련한 추억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은 날 응시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
“첫눈이 흩날리던 날, 당신과 처음 먹었던 저녁. 그날의 행복을 다시 찾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당신도 알죠? 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이제 갈 테니 날 보면 잘했다고 예전처럼 쓰다듬어 주세요….”
그리곤 아름다운 미소로 날 바라보다 서서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어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먼지가 되어 하늘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그녀 역시 피해자란 거다.
기회가 되면 꼭 마녀의 숲에 들려야겠어. 최민혁이 구한 약도 마녀의 숲에서 구한 거라고 했으니 거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기회가 된다면 이 키메라가 뭔지도 알아보고 말이야.
난 잠시 그곳에 남아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가 하늘에선 행복하길 바란 후 마을을 떠났다.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아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백두산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 보니 다음 날 점심 전에 백두산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백두산이구나!”
말로만 듣던 백두산에 직접 오니 기분이 묘했다.
“활화산이라 그런지, 진짜로 분화구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네!”
천지가 있다는 백두산 분화구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분위기로 보아 백두산이 터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근데 백두산 안으론 어떻게 들어가지? 산을 뚫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터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산 밑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한 자여. 운명의 굴레를 벗어난 자여. 이곳으로 오라!]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서 들린 소린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한 자여. 운명의 굴레를 벗어난 자여. 이곳으로 오라!]
“그러니까 어디로 오라는 거냐고?”
어디서 나는 소린지 몰라 짜증을 내는데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환한 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마치 내가 보라는 듯 말이다.
“저기로 오라는 건가? 그럼 가야지!”
뭔지 모르지만 말살자의 조각을 언급했다.
그렇다는 건 말살자의 조각이 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난 전력으로 백두산을 올라갔다.
전력으로 달리자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10분 만에 천지에 도착을 했다.
분화구에서 나는 연기는 천지의 물이 끓으며 나는 수증기였는데, 물이 상당히 뜨거운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가?
올라왔지만 끓고 있는 천지 외에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바람에 실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왔구나. 선택받은 이여!]
그리곤 천지 중간에서 거대한 뭔가가 하늘로 떠올랐다.
“요… 용?”
천지에서 나온 건 파란 빛깔의 비늘을 가진 용이었다.
[난 아직 용이 아니다. 이름은 천룡. 곧 용이 될 이무기다.]
“이무기? 근데 이무기가 날 왜 부른 거지?”
이무기란 존재는 신화 속에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지금 이렇게 만난 게 아니라면 실존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운명을 벗어난 자여.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도움?”
갑자기 일방적으로 부른 다음 도움을 청한다고?
[지금 이 백두산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나 천룡이고, 다른 하나는 백두산 속 용암지대에 살고 있는 화룡이다.]
“한 마리가 더 있다고?”
[그렇다. 우리 둘은 비슷한 시기에 이무기가 되어 승천도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됐지.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지금 화룡은 너무 많은 불을 머금은 나머지 그 기운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천지가 지금 끓어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래서 나보고 화룡을 제어해 달라, 뭐 이런 거야?”
[그렇다. 용암지대에 있는 화룡의 기운을 제어해다오.]
“직접 하면 되잖아. 왜 날 시키고 그래?”
[이무기는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용이 되는 존재. 그런 우리가 싸운다면 그동안의 정성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근데 왜 하필 나야? 내가 화룡의 불꽃을 어떻게 제어하냐고!”
[오래 전 예언을 들었다. ‘말살자의 조각을 소유한 자, 운명을 거스르니. 거칠게 타오르는 불꽃을 잠재우리라’라고 말이다.]
“내가 올 걸 오래 전에 누군가 예언했다고? 근데 이렇게 예언이 맞았다는 건 내가 운명을 완전히 거스르는 건 아니란 거잖아!”
[그렇지 않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자. 예언은 단지 보여주는 것일 뿐.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용암 지대라… 일단 카린 때문에도 가야 되긴 한데. 예언을 했다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근데 예언은 누가 한 거야?”
[900년 전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유명한 무녀가 갑자기 우릴 향해 예언을 시작했다. 그땐 그 말의 뜻을 몰랐지만, 그대를 보고 나서 무녀가 한 말의 뜻을 알게 됐지.]
“근데 내가 말살자의 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느껴지니까. 단지 그렇게 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얼마 없다. 얼마 후면 승천의 시간. 그 전에 화룡의 불길을 제어해다오.]
“좋아! 대신 나한테도 뭔가 이득이 있어야 할 텐데, 뭐 줄 거 없어?”
[그대는 무엇을 원하지?]
“좋은 아이템이나, 돈 같은 거. 알잖아! 인간들 좋아하는 거!”
[뭐가 좋을지 생각해 보지.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고 용암지대로 안내해주마.]
천룡은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거대한 입으로 내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물방울 같은 것이 생기며 내 몸 전체를 감쌌다.
천룡은 곧장 내 몸을 싸고 있는 물방울을 입에 물더니 곧바로 천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날 감싸고 있는 물방울 덕분인지 물 안에서 느껴지는 압력도 전혀 없었고, 숨까지 자유자재로 쉴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바닥까지 내려간 천룡은 바로 빨간 빛이 보이는 균열 사이로 날 밀어넣었다.
[그럼 잘 부탁한다.]
빨간 빛이 보이던 균열 안은 온통 용암이 끓고 있는 곳이었다.
간간이 땅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이 용암이었다.
난 들끓는 용암을 피해 땅 위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러자 눈앞에 카린이 파란색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나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왔구나. 나의 보금자리로 말이야.]
“그렇지. 초열의 불꽃 흡수는 다 된 거야?”
[이제 마무리만 하면 돼. 한 10분 정도면 될 거야.]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그 다음엔 너랑 나랑 이별인 거지. 난 내가 있을 자리로 돌아가고 넌 너의 자리로 돌아가고 말이야!]
그때 눈앞에 있던 용암의 한 곳이 들썩이더니 천룡과 같은 모습의 이무기가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천룡은 파란색이고 화룡은 붉은색이었다.
화룡은 그 이름답게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는데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누가 감히 화룡 님의 거처에 겁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