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눈앞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거대한 화산 밑이었는데 화산은 활화산인지 연신 분화구에서 뜨거운 용암을 뿜어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대기를 꽉 채우고 있었고 내 주변으로는 화산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여기가 지옥? 그럼 콜로세움은 어디지?”
아무리 봐도 콜로세움처럼 생긴 곳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용암이 넘쳐흐르는 대지와 화산뿐.
“설마, 저 화산으로 들어가야 되는 건가?”
자세히 보니 앞쪽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혹시 몰라 다가가보니 작은 철문이었는데, 기어서라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였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거야?”
철문을 밀자 생각보다 부드럽게 열렸다.
난 열린 철문을 보고 들어갈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보자. 근데 돌아가는 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생각해보니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개구멍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 안으로 몸을 우겨넣고는 기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구멍은 길어서 5분 정도 기어서야 그 끝이 보였다.
“드디어 끝인가보네.”
나는 기쁜 마음에 구멍 밖으로 잽싸게 나오려다가 출구 밑에 흐르는 용암을 보곤 깜짝 놀라 몸을 도로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와, 좆될 뻔 했네. 근데 여기가 콜로세움은 맞는 거야? 뭔 콜로세움에 아무도 없고 용암만 흐르고 있냐?”
하지만 아니면 어떠랴.
이미 들어왔으니 어떤 곳인지 둘러나 보자는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다.
발밑에는 개울처럼 용암이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검은색 땅이 보였는데 그 끝에 뭔가가 보였다.
“저게 뭐지?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 가까이 가봐야 겠다.”
구멍에 매달린 난 힘껏 벽을 박차고 용암을 건너서 땅에 착지했다.
“이럴 때 멋진 신법이라도 알고 있으면 편할텐데…. 돌아가면 츤츤이한테 신법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환영보는 보법이라서 먼거리를 이동하거나 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내공소모도 너무 심하고 말이다.
신법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쩌억. 쩌억.
“음? 이게 무슨 소리지? 발 쪽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그리고 발밑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 소리는 지금 신고 있는 운동화 밑창이 녹아서 바닥에 눌어붙으며 나는 소리였다.
“신발이 녹을 정도로 바닥이 뜨겁다고?”
난 바닥에 앉아 손바닥을 대봤다.
살짝 뜨거운 정도다.
아마도 화염 내성 때문인 것 같았다.
난 즉시 신발을 벗어 맨발로 땅에 섰다.
“오! 뜨끈뜨끈한게 딱 좋은데!”
발바닥이 약간 뜨겁긴 했지만 기분 좋은 뜨거움이라 괜찮았다.
그렇게 맨발로 아까 보이던 뭔가를 향해 걸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꽃밭이 보였다.
아까 그게 꽃밭이었구나. 근데 용암 사이에 웬 꽃밭?
꽃밭이라 할 정도로 많은 꽃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 30송이 정도의 꽃이 피어 있었다.
누군가 정성스레 관리하는지 예쁘게 가꿔져 있었다.
“이런데 꽃밭이라고? 근데 예쁘긴 하네.”
사실 꽃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지금 보이는 저 꽃은 매우 아름다웠다.
꽃들은 같은 종류인 것 같았지만 색이 달랐다.
꽃들의 색은 붉은색, 노란색, 흰색, 파란색 이렇게 네 종류였다.
그 중 파란색 꽃은 한 송이 밖에 없었고, 흰색도 다섯 송이만 보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붉은색과 노란색 꽃이었다.
“예쁘긴 하네. 근데 이게 끝인 거야? 길도 더 없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길은 여기서 끝이었고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도 보이지 않았다.
“헐! 이게 뭐야? 콜로세움이 대체 어디냐고?”
황당함에 소리치는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게 무슨 냄새지? 완전 맛있는 냄샌데?”
냄새는 꽃밭에서 나고 있었다.
“어떻게 꽃에서 이런 냄새가 나지? 아! 너무 좋다.”
가뜩이나 몇 시간째 아무 것도 못 먹고 있어서 배가 고팠는데 눈앞에 향긋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자 아예 꽃 속에 코를 파묻어버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냄새에 이끌려 꽃잎 하나를 물었다.
스륵.
꽃잎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어? 맛있다? 뭐지?”
난 반신반의하며 방금 먹은 꽃의 다른 잎에도 혀를 대봤다.
스르륵.
마찬가지로 혀에 닿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나는 메시지.
- 화염 내성이 0.1퍼센트만큼 오릅니다.
“? 여기서 화염 내성이 왜 올라? 아! 뜨거운 땅을 밟고 있어서 그런가?”
난 설마 꽃잎을 먹어서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몇 장의 꽃잎을 더 먹어보면서 그 메시지가 꽃을 먹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이거 대체 뭐지? 왜 꽃을 먹는데 화염 내성이 올라가는 거야?”
하지만 이유가 뭐 중요하랴!
꽃을 먹으면 화염 내성이 올라간다는 게 중요했다.
거기다 이 꽃이 맛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난 허겁지겁 꽃들을 따서 입에 넣었다.
스르륵.
- 화염 내성이 1.3퍼센트 만큼 오릅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알게 된 사실.
꽃의 색깔마다 내성이 오르는 비율이 달랐다.
흠. 꽃의 색깔이 온도를 나타내는 건가보네. 그럼 붉은색, 노란색, 흰색, 파란색 순으로 내성 오르는 순서가 다르겠구나.
그걸 알아채자마자 난 곧바로 파란색 꽃을 꺾어 손에 들었다.
흐흐흐. 좋은 건 바로 먹어줘야지.
꽃을 입에 넣으려는 찰나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어떤 개새끼가 꽃밭을 망치고 있어?!”
그리곤 옆에 흐르던 용암이 들썩이더니 무언가가 쑥하고 튀어오르며 내 앞으로 뛰어내렸다.
저건 또 뭐야?
나타난 건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찢어진 눈에 오똑한 코, 숏커트 머리를 한 그녀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는데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가 더욱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땅에 내려선 그녀는 내 손에 들린 파란색 꽃을 보더니 갑자기 머리칼이 노란빛으로 불타올랐다.
머리 전체가 불에 휩싸인게 아니라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노란 불꽃으로 변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리곤 당황한 표정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너 그….그거 내려놔! 어서!”
“이거? 이거 네 거야?”
난 들고 있는 파란꽃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움찔하더니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내거니까 제발 좀 내려놔!”
오호! 이 꽃이 꽤 중요한 건가보네. 그럼 어디 정보 좀 캐볼까!
“주긴 주는데 몇 가지만 물어볼게.”
“알았어. 다 대답해 줄 테니까 일단 그것부터 내려놓고 물어봐!”
“에이.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일단 궁금한 거부터 먼저!”
“윽! …아, 알았어. 궁금한 게 뭔데?”
그녀는 급히 알겠다고 말한 후 얼른 질문하라고 재촉했다.
뭐가 저리 다급한 거지?
굉장히 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궁금한 걸 물었다.
“여기가 지옥의 콜로세움이야?”
“너 콜로세움을 찾아온 거야? 어? 그러고보니 너 여기 주민이 아니구나!”
“응. 아닌데 왜?”
“젠장…그래서 저걸 꺾을 수 있었구나…. 이걸 어쩌지?”
당황한 듯 혼자 중얼거리던 그녀는 일단 내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줬다.
“여긴 콜로세움이 아니야.”
“콜로세움이 아니라고?”
“그래. 콜로세움은 여기서 한참 아래로 더 내려가야 있어. 그것도 모르고 온 거야? 아니, 콜로세움을 찾아왔으면 왜 꽃밭으로 온 건데?!”
갑자기 대답을 하다 화를 내는 그녀를 보고 나도 덩달아 화를 냈다.
“나도 갑자기 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가 입구라고 표지판이라도 달아놓던가!”
“이 병신아. 화산 분화구가 입구잖아!”
“뭐, 병신? 어떤 미친놈이 용암이 흘러넘치는 분화구가 입구라고 생각하겠냐? 어?”
그녀는 내가 화내는 걸 보곤 자기 뺨을 세게 때리더니 사과했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긴 콜로세움이 아니야. 콜로세움은 여기서 더 밑으로 내려가야지 있어.”
“그래? 그럼 콜로세움으론 어떻게 가는데?”
“그건 다시 밖으로 나가서 분화구로 내려가야돼. 여기서 내려가는 방법은 없어!”
“아니, 사람이 용암이 들끓는 분화구로 어떻게 내려가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발끈하자 그녀도 다시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 병신 새끼야! 니가 돼지처럼 먹어치운 저 붉은 꽃! 저걸 먹으면 잠시 동안 용암 피해를 없앨 수 있어. 그것도 모르고 넘어왔냐?”
그리곤 다시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니가 먹은 저 붉은 꽃은 대략 30분간 용암 피해를 흡수해줘. 중복되진 않으니까 그렇게 알고.”
“흠! 그건 알겠고,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야?”
“여긴 초열의 꽃송이를 재배하는 곳이다!”
“초열의 꽃송이?”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에휴! 초열의 꽃송이도 모르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불꽃을 머금은 꽃이잖아!”
“그래?”
불꽃을 머금은 꽃이라고? 그래서 먹으면 화염 내성이 올랐던 거구나.
그제야 왜 화염 내성이 오른 건지 이해됐다.
“그럼 여기가 니 꽃밭이야?”
“아니. 난 관리자인 카린. 여긴 내가 관리하는 곳이야.”
“관리자? 그럼 주인은 따로 있단 소리네?”
“그래 이 꽃밭의 주인은 바로 이 콜로세움의 주인이자 지옥의 지배자 중 한 분인 플뤼톤 님이셔!”
“플뤼톤?”
플뤼톤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지옥의 대 마신 중 한 명이며 화염을 다스리는 마신.
그제야 내가 뭔가 큰일을 저질렀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파란꽃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자세히 살펴보자 꽃의 줄기부터 서서히 녹고 있었다.
그걸 본 카린은 급히 말했다.
“아이썅! 꽃이 꺾이니까 머금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고 있잖아!”
“그럼 이거 어떻게 해?”
“어서 아까 꺾은 곳에 다시 붙여!”
“뭐? 다시 붙이라고?”
저건 또 뭔 개소리야. 꺾인 꽃을 다시 붙이라니! 거기다 어느 줄기였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이에도 초열의 꽃송이는 녹고 있었다.
“어! 어!”
한 번 녹기 시작하자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걸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갑작스런 상황에 어쩔 줄 모르던 난 더 이상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녹아내리는 파란꽃을 입에 넣어버렸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걸 먹으면 어떻게 해?!”
갑작스런 내 행동에 카린은 미친 듯이 흥분해 내게 달려들었다.
펑.
강렬한 일격을 가슴에 맞고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났지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꽃송이를 삼킨 후부터 뱃속이 미친 듯 들끓고 있었다.
- ‘초열의 꽃송이’를 섭취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불꽃이 당신의 전신을 휘감습니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