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조한희.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은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사고를 당했는데 그때 그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때 눈을 다쳐 시력을 잃게 됐는데 그게 9살 때다.
그 뒤 이모 수녀님의 소개로 명동 성당 수녀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누구보다 악바리여서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 차별 받는 건 싫어했고, 학업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점자로 된 책을 하루에 몇 권씩 읽었고, 눈이 아닌 다른 감각을 키워 눈이 안 보이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각성자가 됐는데, 각성자가 되자 그녀의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주변 사물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미지화 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감각이 극도로 발달해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보다도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지닌 각성자를 길잡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네. 저 맹인이에요. 뭐 문제 있나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난 실수했단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사과했다.
“초면에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됐어요. 그보다 절 찾은 용건이 뭐죠?”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길잡이를 찾고 있는데 혹시 길잡이신가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길잡이에요. 저랑 팀을 맺기 위해 오신 건가요?”
역시. 길잡이가 맞구나. 근데 맹인인데 괜찮을까? 엄청 뛰어난 실력의 길잡이라면 소설 속에서도 언급됐을 법한데 내 기억 속에 없는 걸 보니 듣보잡이란 소린데…. 어쩌지?
그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가 맹인이라서 망설여지나 보죠?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전 그쪽과 팀을 맺지 않을 거니까!”
그 말에 난 깜짝 놀라 황급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 맹인이라 처음엔 놀랐지만 망설이고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전 정말 한희 씨랑 팀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한희는 코웃음을 쳤다.
“흥! 혹시 그거 아세요? 사람은 진실을 말할 때와 거짓말을 할 때 다른 호르몬이 분비가 된대요. 그리고 거기서 미세하게 다른 향이 발생한다고 해요.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은 맡지 못할 정도의 향이긴 하지만 전 그걸 정확히 구분할 수 있죠.”
그리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박태준 씨 몸에선 거짓말의 향기가 나네요.”
뭐?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그제야 난 그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망설이긴 했지만 이제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저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미안해요. 사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희 씨와 진심으로 팀을 맺고 싶습니다. 아까 말대로 진실과 거짓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지금 제 말이 진실이란 걸 아시겠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의 향이 나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아요. 전 그쪽과 팀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죠? 제가 처음에 한희 씨가 맹인인 걸 알고 놀라서요? 그게 아니면 아까 망설여서인가요?”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에요.”
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돈이라니 무슨?”
“박태준 씨. 혹시 다른 팀원이 있어요?”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아뇨. 저 혼잔데요.”
내 대답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역시네요. 박태준 씨. 혹시 돈 많아요?”
“아뇨.”
“전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근데 박태준 씨는 다른 팀원도 없고, 거기다 부자도 아니네요. 그런데 제가 왜 당신과 팀을 맺어야 하죠?”
하! 결국 돈이 필요한데 난 혼자고 별 볼일 없으니 꺼지라는 거네.
하지만 콩깍지가 쓰였는지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돈이 필요하다라. 저랑 같네요. 저도 돈이 엄청 필요하거든요.”
그 말에 그녀는 이 사람 뭐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더욱더 같이 해야 돼요.”
그제야 그녀도 내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두 사람 모두 돈이 절실히 필요해요. 그렇담 목적이 같으니 특별한 충돌 없이 같은 곳을 향해 달릴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둘 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익 배분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더 많이 벌면 되죠. 그리고 애초에 팀을 맺을 때 이런 부분을 정확히 정한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요. 세상이 계약서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지금 세상은 정상이 아니니 더 그렇구요.”
꼼꼼하게 하나하나 따지는 성격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죠. 한희 씨 말대로 누구나 그럴 수 있죠. 근데 한희 씨가 보기에 제가 그럴 사람처럼 보이나요?”
조한희는 내 말에 잠시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내 영혼까지 꿰뚫어보겠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겐 안 보이네요. 게다가 그쪽 말도 진심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어요.”
가장 큰 문제?
“그게 뭐죠?”
“바로 실력이에요.”
그렇지. 그게 바로 핵심이지.
아무리 서로가 마음이 맞아 팀을 맺어도 결국 실력이 없다면 돈을 벌지 못한다.
“하하하. 그렇죠. 실력이 가장 중요하죠.”
“그 웃음은 실력에 자신 있다는 거군요. 그럼 간단히 실력 한 번 볼까요?”
“그러죠 뭐. 근데 저도 한희 씨 실력을 봐야하니 적당한 던전을 찾아서 돌아보면 어때요?”
그녀는 또다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대답을 했다.
“그래요. 안 그래도 방금 전 근처에 게이트가 생성될 것 같으니 대피하라는 안내를 받았어요. 그러니 던전 말고 게이트를 닫는 걸로 하죠. 괜찮죠?”
호오. 게이트라. 그것도 재밌겠네.
“알겠어요. 그럼 어디로 가면 되죠?”
“여기서 멀지 않으니 절 따라오세요.”
우린 명동 성당을 나와 종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난 조한희의 움직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게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고?
조한희는 맹인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걸었다. 다가오는 사람도 잘 피했고, 장애물도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피해갔다.
각성자가 되면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기 때문에 오감이 일반인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맹인이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걷게 만들 정돈 아니다.
길잡이는 각성자들에 비해서도 오감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정말인가보네.
그렇게 조한희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걷는데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요. 여기서 게이트가 열릴 거에요.”
아닌게아니라 그녀가 말한 허공의 한 지점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이 느껴졌다.
그때 게이트 앞에 모여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조한희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한희 씨. 오랜만이에요.”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는 훤칠한 미남으로 머리카락을 빨간색으로 염색한 게 인상적이었다. 조한희는 그 남자를 알아보고 고개 숙여 인사 했다.
“안녕하세요, 최민혁 길드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하하하. 여긴 게이트 때문에 오신 거에요?”
“네. 알바라도 할까 해서요.”
“그러니까 알바하지 말고 저희 길드에 들어오라니까요.”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최민혁? 누구였더라? 분명 들어봤는데….
하지만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최민혁이 날 바라보며 조한희에게 물었다.
“근데 저 사람은 같이 온 일행인가요?”
“네. 저랑 같이 게이트에 들어갈 분이에요.”
그녀의 말에 최민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요? 한희 씨랑 같이 팀을 이룰 정도면 엄청난 실력자겠네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으로 봐선 중급 이상일 것 같은데 게이트 안에서 진행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하하하! 뭐, 별거 있나요. 제가 그냥 다 쓸어버리면 되죠.”
“알겠어요. 그럼 전 잠시 일행과 얘기 좀 할게요.”
그리곤 그녀는 날 향해 걸어왔다. 최민혁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과 나를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 난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알았지만 무시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에너지 파장이 엄청나네요. 근데 게이트가 열리려면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거죠?”
내 질문에 조한희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설마 게이트가 처음이에요?”
“네. 그 동안 던전만 돌다보니….”
“하아. 진실의 향이 나는 걸 보니 진짠가 보네요. 던전은 다른 세상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만들어지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보기 전엔 그 던전의 규모나 난이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조한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달라요. 게이트는 우리 세상의 에너지를 끌어다 쓰기 때문에 에너지가 모이는 양에 따라 그 규모와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죠. 하급 게이트의 경우라면 보통 1시간 안에 생성이 되지만 상급의 경우 10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흠. 그럼 여긴 얼마나 지난 거죠?”
“게이트가 열린다는 안내를 받은 게 4시간 전이니까 이런저런 걸 고려해보면 최소 5시간은 지났겠네요.”
5시간이 지났다는 건 중급 이상이란 얘기네. 게이트는 일반적으로 던전보다 크기가 작은 대신 난이도가 높다고 했으니 몬스터의 수준은 상급이라 보면 된다.
그때 멀찍이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최민혁이 끼어들었다.
“흥!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놈이 그따위 기초적인 질문을 해? 한희 씨. 정말 이런 멍청한 놈이랑 같이 들어갈 거에요?”
“뭐? 멍청한 놈?”
하지만 그는 내 말은 무시하고 계속 조한희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저희 길드에 들어오세요. 원하시는 조건은 다 들어 드릴게요.”
그 말에 조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최민혁을 바라봤다.
“길드장님. 제 조건은 좀 까다롭고 많이 비싼데 감당이 되시겠어요?”
“하하하. 걱정 마세요. 어떤 조건이든 들어 드릴 테니까.”
그때 길드원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길드장님. 게이트가 열립니다!”
그 말에 우리 모두는 에너지 파장 요동치던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길드원의 말대로 허공의 한 지점으로 모여들던 에너지 파장이 타원형의 포탈로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자! 다들 준비해라. 게이트가 완성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최민혁의 말에 길드원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네’라고 대답하곤 전투 대형을 갖췄다.
난 그런 최민혁을 한 번 노려본 다음 조한희에게 말했다.
“우리도 준비할까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게이트가 완전히 완성됐는지 더 이상 모여드는 에너지 파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자!”
최민혁의 한 마디에 길드원들은 일제히 게이트 안으로 달려갔다.
퍼어억.
“끄아악!”
“으악!”
하지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던 선두 그룹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로 튕겨 나왔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뒤에 있던 최민혁이 갑작스런 상황에 원인을 찾기 위해 소리치는데 게이트 안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족히 3미터는 될 듯한 신장에 도마뱀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몬스터였다.
그걸 본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드라고니아?”
왜 여기서 S등급 몬스터가 나오는 거야?!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