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철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도 이성이란 게 있는지 화를 꾹 누르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저 개새끼가 니 스승이라고?”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런 태도는 스승님께 대한 실례라고. 안 그래요?”
난 일부러 존댓말까지 써가며 츤츤이에게 물었다. 츤츤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결국 이철진은 폭발했다.
“야 이 새끼야. 그냥 가르쳐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이딴 식으로 놀리지 말고!!”
[조용히 좀 해라! 시끄럽다.]
“뭐…뭐야?”
이철진은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딜 보고 있어? 나 여깄는데.]
“대체 누구야?!”
그러다 츤츤이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어. 그 설마야.]
“내…내가 드디어 완전히 맛이 갔구나. 개새끼가 말하는 것도 들리고.”
[지랄하지 말고 이리 안와? 그리고 이건 말이 아니라 전음이란 거다.]
“전음?”
그도 전음이란 건 들어본 적이 있다.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기술로 무협지에서 수도 없이 봤다. 근데 진짜 전음이라고?
“지, 진짜로?”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다. 하긴, 아무리 무공의 고수가 키우는 개라도 개는 개일 뿐이다. 그런 개가 어찌 각성자인 자신을 개 패듯 팰 수 있겠는가!
무언가에 홀린 듯 츤츤이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 그는 츤츤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본래는 사람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니 앞으로 내 모습엔 개의치 말거라.]
그제야 이철진은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답했다.
“크하하하.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멍청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와 츤츤이가 동시에 한 생각이다.
[혹시 결혼은 했느냐?]
츤츤이의 물음에 이철진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머릴 긁적였다.
“제가 얼굴이 이렇다보니 아직도 모태솔로입니다.”
헐. 모태솔로?
아무리 봐도 40은 넘어 보이는 얼굴인데 모태솔로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봤다. 그때 츤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모태솔로가 뭐냐?]
“아!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랑 사귀지 못했다는 뜻이야.”
그 말엔 츤츤이는 깜짝 놀라며 측은한 눈으로 이철진을 바라봤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니가 돌봐야 될 다른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동생이 둘 있는데 다들 독립했기 때문에 돌봐야 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여기가 네 집이다. 그리고 너는 오늘부터 여기서 내게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예, 사부님. 그럼 제가 저 분을 사형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래. 그리 부르거라.]
츤츤이는 잔뜩 거들먹거리며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말투로 이철진을 다뤘다. 이철진은 드디어 스승이 생겼다는 기쁨에 츤츤이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곤 곧장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사형! 난 이철진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 모습에 난 빙그레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앞으로 잘 해보자. 사제가 도울 일이 많을 거야.”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고. 우린 이제부터 가족이잖아! 크하하하하!”
난 신나서 츤츤이와 얘기하는 이철진을 뒤로하고 던전 안으로 좀 더 들어갔다. 그러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여긴 내가 이 던전에 들어와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공터 중앙으로 간 난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 천의권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배운 대로 기를 운용했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막혔던 초식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난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알고 있는 대로 초식을 펼쳤다. 천의 일권, 천의 이권. 하지만 천의 삼권을 펼치는 도중 흐름이 끊겼다. 아마도 내공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래도 일권과 이권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만해도 어딘가. 난 기쁜 마음으로 눈을 떴다 깜짝 놀랐다.
공터가 마치 폭탄에라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게 설마 천의권 때문에…?
눈을 감고 단지 초식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도 위력이라니.
그때 뒤에서 츤츤이의 말이 들렸다.
[놀랄 것 없어. 그건 겨우 시작이니까.]
“이게 시작이라고?”
난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 츤츤이를 바라봤다.
[그래. 천의권을 대성하게 되면 니가 지금 한 공격의 수십, 수백 배나 강력한 공격을 할 수도 있어.]
“그 정도라고?”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천의권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런 내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이철진이 츤츤이에게 말했다.
“사부님. 저도 사형이 배운 걸 배우고 싶습니다.”
[아쉽게도 네 사형이 배운 무공은 한 사람 밖에 전수 받을 수 없는 무공이다. 대신 네놈에게 꼭 맞는 무공을 알려주도록 하마.]
“정말요?”
난 한동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기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딜? 또 길잡인가 뭔가 찾으러 가는 거야?]
“그렇지 뭐.”
[이제 그 정도 실력이면 혼자서 상급 던전 정도는 쉽게 돌 수 있는 거 아냐?]
“그게 꼭 그렇지가 않더라구. 힘으로 안 되는 함정들도 많은데다 던전은 돌발 변수가 많은 곳이라 길잡이가 꼭 있어야 돼.”
그때 옆에 있던 이철진이 끼어들며 말했다.
“사형, 혹시 길잡이 찾아?”
“어. 그런데?”
처음엔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이철진에게 형 대접을 받는 게 어색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철진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대하기가 더 쉬웠다.
“내가 아는 길잡이가 하나 있는데 만나 볼래?”
생각지도 못한 이철진의 말에 난 황급히 물었다.
“아는 길잡이가 있어?”
“우연히 던전에 용병으로 갔다가 만난 적이 있는데 임기응변도 좋고 괜찮아.”
“어디로 가야 돼? 어?”
길잡이에 대해 처음으로 얻은 단서다. 난 급한 마음에 다그쳐 물었다.
“명동으로 가면 돼.”
“명동 어디? 명동이 누구 집 애 이름이야?!”
“음. 어디였더라…. 아! 명동 성당. 그래. 명동 성당에 오면 자기가 있다고 했어.”
“진짜지?”
이철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서둘러 명동으로 갔다.
대격변 후 대중교통은 시설을 복구한다고 지하철과 버스 운행이 전면 중지 됐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다시 정상 가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불안한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명동 역시 사람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난 한산한 명동 거리를 지나 명동 성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고딕풍의 거대한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 전 여자친구랑 와보고 처음이구나. 여긴 그대로네.
성당 주변은 새로운 건물도 들어서고 했지만 정작 성당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방금 미사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나오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어떻게 길잡이를 찾지? 아무나 잡고 물어봐야 되나?
난 일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기둥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엄숙한 분위기에 동화되는 걸 느꼈다.
그때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저 사람한테 물어봐야겠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한테 방해되지 않게 조용한 소리로 신부를 불러 세웠다.
“저기 신부님!”
“네? 무슨 일이시죠?”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지긋한 나이의 신부가 걸음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뭐 하나 여쭤볼게 있는데요. 잠시 밖에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그는 잠깐 시계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잠깐이면 괜찮을 것 같네요.”
함께 성당 밖으로 나온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급하게 길잡이를 찾고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여기 있다고 얘길 들었거든요.”
“길잡이요? 길잡이가 뭔가요?”
신부는 정말 모르는지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럼 혹시 성당 사람 중에 각성자가 있나요? 각성자는 아시죠?”
“아! 각성자라면 한 사람 있습니다.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뭘 좀 부탁할 게 있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신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기 수녀원에 가서 조한희 안젤라를 찾으시면 됩니다. 그럼 전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난 신부에게 고맙단 인사를 하고 수녀원으로 갔다. 마침 수녀원에서 나오는 할머니 수녀가 보였다.
“수녀님. 말씀 좀 여쭐게요. 제가 조한희 안젤라라는 분을 찾고 있는데요. 어디가면 만날 수 있나요?”
내 말에 그녀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젤라라면 수녀원 안에 있어요. 근데 무슨 일로 안젤라를 찾으시는 거죠?”
“아! 같이 일을 좀 해볼까 해서요. 근데 남자인 제가 수녀원 안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난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근데 일이라면 어떤?”
“길잡이가 여기에 있단 말을 들어서요. 혹시 한희 씨가 길잡이라면 같이 던전을 돌아볼까 하구요.”
“길잡이요? 그게 뭐죠? 근데 던전이면 엄청 위험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곳을 우리 안젤라와 같이 들어간다구요?”
종교인이라 그런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하하하. 한희 씨가 길잡이가 맞다면 던전에서 싸울 일도 없기 때문에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말했다. 전투를 안 한다는 건 사실이지만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런가요? 요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저 같은 할머니는 따라가질 못하겠네요. 잠시만 여기 계시면 바로 불러올게요.”
난 멀어져 가는 할머니 수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근데 길잡이가 수녀인거야? 수녀가 던전에 막 돌아다녀도 되나?
진짜 수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녀원 문이 열리며 수녀할머니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나보다 약간 어려보이는 외모. 160이 채 안돼 보이는 작달막한 키에 어깨선에서 약간 올라간 단발머리. 큰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저 앞에 계신 분이 널 만나러 오신 분이야. 혼자 갈 수 있겠니?”
“걱정 마세요.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할머니 수녀는 그녀의 말에 알겠다고 말한 다음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곤 다른 곳으로 갔다.
난 할머니 수녀가 사라지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러다 특이한 걸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박태준입니다. 조한희 씨죠? 어? 근데 한희 씨…… 눈이?”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설마 맹인?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