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몬스터를 돌파하며 달려오는 각성자 무리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대열의 꼭짓점에있는 각성자는 그야말로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달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돌파력도 그 한사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오늘 각성을 했는데 어떻게 저런 능력을 지닐 수 있지?
나야 일 년간 미리 준비를 한 데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 그때 미친 듯이 눈앞의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던 각성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응? 지금 날 보는 거야?
그 각성자는 손과 발은 멈추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이면서도 한동안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거리에서 날 느낀 다고? 어떻게?
그때 그 각성자의 움직임을 유심히 바라보던 츤츤이가 말했다.
[호오. 저거 상당한데. 저 정도면 순수 무예 실력만으론 너보다 한참 위겠어.]
그 말에 난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츤츤이를 바라봤다.
“그 정도야?”
[그래. 다만 아쉬운 건 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검 대신 맨손으로 검술 초식을 펼치다보니 다소 빈틈들이 보여. 하지만 저딴 잡것들이 어찌해 볼 상대는 아니지.]
“그래?”
난 새삼스런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 저 정도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거였구나. 그럼 아까 날 바라본 것도 내 내공을 느꼈기 때문인가?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저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향하는 방향을 보니 운석 쪽으로 향하는 것 같으니까!
“그럼 우린 돌아가자. 여기서 볼 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까.”
[그럴까? 근데 어디로 가지?]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피소로 대피한 상태다. 문을 연 숙박업소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아무데나 들어가서 자도 된다는 말이다.
“우리 오늘은 호텔에서 자볼까?”
[호텔? 그 비싸다는 곳?]
“그래. 엄청 비싼 곳.”
[좋지. 가자!]
난 곧바로 근처에 있는 롯데호텔로 향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호텔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왔다 갔는지 건물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일단 뭐라도 먹을 거부터 좀 찾아볼까?”
[좋지.]
우린 곧장 식당으로 이동했다.
“꾸륵?”
거기엔 몬스터 몇 마리가 냄새를 맡고 들어왔는지 식당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난 간단히 그것들을 정리하고 남은 재료 중 먹을 수 있는 걸 찾아서 꼭대기 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난 후 준비해 간 옷을 꺼내 갈아입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둡긴 했지만 내 눈엔 모든 상황이 대낮처럼 훤히 보였다.
밖에선 각성자들이 아직 몬스터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몬스터 지휘관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전세가 곧 우리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치열하게 싸우는 각성자들을 보자 내가 편안히 쉬고 있는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죄책감을 털어버렸다. 저건 각성자들이 성장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 괜히 내가 끼어들어서 그들이 성장할 기회를 빼앗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대격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앞으로 저들은 내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날 도와줄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저들은 더 성장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난 대충 바깥 상황 파악을 끝내고 바닥에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얼마나 명상에 빠져 있었을까!
갑자기 츤츤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자세 잡아. 누군가 온다.]
그 소리에 난 얼른 눈을 뜨고 호흡을 정리했다.
“누가 온다고? 어디.”
주변으로 기를 확장하자 츤츤이 말대로 누군가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정말이네. 누구지?”
[기감으로 봤을 때 아까 걔 같은데.]
“누구? 아! 아까 대열 중앙에 있던 각성자?”
[거의 다 왔네. 준비하자.]
츤츤이 말대로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내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예쁜 여자였다. 단정하게 한 갈래로 묶은 긴 흑발, 크고 맑은 눈과 오똑한 콧날, 균형 잡힌 몸매. 전형적인 미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여자였다.
저런 애가 고수라고?
난 믿기지 않아 좀 더 자세히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자꾸 보는 거죠?”
톡 쏘는 그녀의 말에 난 살짝 당황했다.
“아니, 뭐. 당신 같은 여자가 무공의 고수란 게 잘 믿기지 않아서.”
순간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역시. 당신도 무공을 익힌 사람이었어. 그럼 몬스터 대장을 죽인 것도 당신인가요?”
“아, 여기 운석에 있던 놈 말하는 거지? 그 놈이라면 내가 처리했지.”
“당신 혼자서?”
“응. 나 혼자서. 그럼 여기 누가 또 있어?”
그 말에 그녀는 약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느껴지는 실력으론 당신 혼자 대장을 상대하긴 어려웠을 텐데. 정말로 당신 혼자 없앴나요?”
그녀의 말에 난 약간 기분이 상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속고만 살았어? 나 혼자 없앴다고. 지금 싸우자고 온 거야?”
“하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내가 온 건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저건 뭐하는 여자지? 다짜고짜 지 할 말만 하고 말이야.
난 기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보통 뭘 물어보려면 최소한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은데.”
그제야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 너무 많은 일들을 겪다보니 제가 좀 흥분했네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전 장백파 48대 장문인 이혜나에요. 그쪽은 사문이 어떻게 되죠?”
사문?
그때 머릿속으로 츤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지 마. 이건 전음이니까. 그냥 천의문 4대 계승자라고 해.]
천의문?
처음 듣는 문파라 의아했지만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난 천의문의 4대 계승자 박태준이다.”
“네? 천의문이요? 정말 천의문 계승자에요?”
왜 저렇게 놀라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는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아니에요. 그냥 제가 아는 전설의 문파와 이름이 똑같아서요.”
“? 전설의 문파?”
전설의 문파는 또 뭐야?
“그냥 잊으셔도 돼요. 어릴 때 부모님이 해주시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이름이거든요. 그보다 이제 소개도 끝난 거 같은데 혹시 세상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간단히라도 알려줘서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쉽지만 누가 내 적인지도 모르는데 말해줄 수는 없지.
“미안. 그거에 관해선 나도 아는 게 없네. 갑작스레 이런 일이 일어나서 나도 너무 당황스럽거든.”
하지만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근데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여유로운데요?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밑에서 괴물들과 싸우거나 아님 멀리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의 행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죠. 근데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잖아요?”
날카로운데. 머리도 좋은 모양이야. 하지만 그런 거야 우기면 그만이지.
“그냥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한 번 묵어보고 싶어서. 지금이라면 공짜로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했지만 내가 끝까지 우기자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뵙죠.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그녀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난 그녀가 확실히 멀어진 걸 확인 하고서 츤츤이에게 물었다.
“근데 천의문은 또 뭐야?”
[내가 너 처음 만났을 때 변했던 사람 있지?]
난 1년 전 선택의 방에서 츤츤이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면…. 혹시 그 노인?”
[그래. 그 사람이 천의문 3대 계승자야.]
“그래? 그럼 천의문은 엄청난 문파겠네? 니가 그 노인이 가장 강하다고 했잖아.”
[그렇지.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확실치 않지만 무공만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강해. 넘사벽이라고 할까. 니가 익힌 환영보도 천의문의 보법 중 하나야.]
“환영보가?”
[그래. 그거 말고도 내가 알려준 무공 중 명상하는 법과 천의권이 천의문의 무공이야.]
천의권이면 내공이 딸려서 지금 쓰지 못하는 권법인데.
“내공을 더럽게 많이 잡아먹는 무공만 만든 문파구만.”
[후훗! 천의문 무공을 제대로 펼치려면 최소 3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돼.]
미친! 3갑자?
난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1갑자가 60년 내공이니까 180년 동안 내공을 쌓아야 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해?”
[그러니까 아무나 못 익히는 거지.]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해? 인간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수련을 해도 100년을 못 채울 텐데?”
[하하하. 기연이란게 있으니까. 거기다 세상엔 아직 니가 모르는 신비로운 인물들이 많아. 수백 년을 사는 인간도 있으니까.]
그 말에 난 깜짝 놀라 큰소리로 외쳤다.
“수백 년? 사람이?”
[그래. 내 기억 속에만 2명이 있으니 더 있다고 봐야겠지.]
이런 미친. 인간이 수백 년을 산다고?
“혹시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오래 사는 지도 알아?”
[나도 그게 궁금한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분명히 알았던 거 같은데.]
천의문이라…. 나중에 자세히 한 번 찾아봐야겠어. 흐흐흐. 수백 년을 산다니 너무 좋잖아!
대격변으로 몬스터들과 싸우고 수백 년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길 들었지만 내 머릿속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할 일이 간단명료하게 정리가 됐다.
열심히 돈이랑 아이템 먹고 강해져서 히든 보스 잡고, 수백 년 동안 즐겁게 살아보자!
난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명상을 끝내고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이제 얼추 정리가 돼가는 구나.
끝없이 늘어서 있던 녹색의 물결이 상당히 줄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1-2시간 정도면 정리가 되겠네.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어.
예상대로 2시간이 조금 못 돼서 종로에 있는 몬스터들은 모두 정리가 됐다. 난 그걸 확인하고서 밖으로 나와 정찬호 무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옥상을 통해 그들 가까이로 접근했다.
흠. 아무도 안 죽었구나.
그들은 탈진 상태인지 서로의 등을 의지해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원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난 그들을 잠시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이제 던전이나 찾으러 다녀 볼까!
앞으로 각종 의뢰나 던전을 공략하면서 돈과 아이템을 모을 생각이다. 하지만 의뢰는 대격변 상황이 정리되고서 반 년 정도가 지나서야 활성화 된다. 그러니 지금은 던전을 찾아서 열심히 돌 생각이다.
그때 뜬금없이 메시지가 나타났다.
- 몬스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셨습니다. 이제부터 상태창이 개방됩니다.
“뭐? 상태창?”
소설에선 상태창이 없었는데!?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