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현성이 내게 알려준 건 진법이었다. 방어력 빼곤 아무 것도 없는 내가, 오행귀들에게서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오행귀들이 바닥에서 터져 나온 빛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난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왔다. 학교 밖은 불구경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오행귀들이 미리 뭔가 장치를 해둔건지 학교 밖에서는 불타는 건물만 보일 뿐 몬스터와 오행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숨을 돌리고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야! 저기 좀 봐! 저거 비행기야?”
“그러게. 근데 저렇게 생긴 비행기도 있어?”
“어머. 현수 엄마. 저게 뭐래? 저거 십자가 아니야?”
하늘에 뭐가 있나?
난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절망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것. 그건 십자가도 비행기도 아니다. 바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이었다. 사람들이 비행기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검.
소설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바로 이렇게 시작 된다. 세계 곳곳에 떨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검. 그와 동시에 등장하는 게 바로 히든 보스다.
근데 저게 왜 지금 떨어지는 거야? 5년 후에나 있을 일이잖아!!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소설과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다. 그때.
세상의 모든 것이 멈췄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췄다. 그리곤 갑작스레 허공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어때? 네 말대로 해줬는데?
“뭐? 그게 무슨?”
그때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저거 작가야?
- 빙고.
“뭐… 뭐야! 내 생각도 읽을 수 있어?”
- 그 정도야 쉽지. 그나저나 어때? 니 말대로 히든 보스 스킬을 주인공한테 줬는데.
그 말에 난 허공에다 대고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스킬만 주면 뭐하냐고! 시간을 줘야지. 벌써부터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면 나보고 어떻게 하란 소리냐고?”
- 하하하. 그게 다 너 때문인데.
“나 때문? 그게 왜 나 때문이야?”
- 원래대로면 이미 준비를 마친 히든 보스가 ‘방어력 무한’ 스킬을 얻게 됨으로써 방어력을 제외한 능력치가 1로 재조정되게 돼 있었어. 그래서 다시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 5년 육개월인 거고. 근데 그걸 니가 가졌잖아? 그래서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던 히든 보스가 내 소설 보다 빨리 등장하게 된 거야.
“뭐? 아무리 그래도 능력 키울 시간은 줘야지. 이게 뭐냐고?”
- 그러니까 말했잖아. 너 때문이라고.
“하아! 그럼 이대로 끝인 거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죽거나 하는 건 아니지?”
- 그건 아니지. 넌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 시작인 거지.
“? 다시 시작?”
이건 또 뭔 소리야?
- 아! 내가 얘기 안 했구나. 이건 체험판 같은 거야.
“체험판?”
- 그래. 이제부터 이 모든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게 될 거야.
“뭐?”
- 현실로 돌아가고 나서, 정확히 1년 후에 대격변이 시작될 거야. 그리고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 욕은 듣기 거북하니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그보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마지막일 텐데 더 궁금한 거 없어?
“왜 하필 나지?”
-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어. 사실 반쯤 장난이었는데 니가 말살자 조각의 소유자가 된 건 정말 의외였어. 그리고 그로 인해 넌 예정에 없던 변수가 된 거지.
“변수?”
- 그래. 말살자 조각의 소유자는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존재지. 그래서 니가 변수라는 거야.
“그보다 말살자 조각은 대체 뭐야?”
- 미안하게도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금기거든. 게다가 다 말해주면 재미도 없고 말이야. 더 궁금한 건 없어?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야? 능력은?”
- 아! 그건 걱정 마. 네가 말살자 조각의 소유자가 됐기 때문에 스킬과 지금 보유한 능력치는 그대로 가지고 가게 될 거야.
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개털로 시작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네.
- 한 가지 알려주자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히든 보스 역시, 말살자 조각의 소유자라는 거야. 내가 리셋을 해도 그 역시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거지.
“뭐? 그럼 그대로 세상이 망하는 거 아니야?”
- 에휴. 멍청한 놈. 아무리 히든 보스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세상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애? 당사자의 힘은 그대로지만 세력을 완전히 잃게 된 거라구. 그러니 그가 세력을 키울 때까지는 시간이 있다는 거지. 니가 그걸 방해하면 시간은 더 생기는 거고.
결국 소설대로 현실에서도 히든 보스를 막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는 거네. 근데 출발선이 너무 다른 거 아냐?
내 생각을 읽었는지 바로 메시지가 허공에 나타났다.
- 대신 돌아가는 시간대를 조정해 줄 수 있어. 넌 대격변 1년 전, 히든 보스는 대격변이 시작될 때로.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말살자 조각 소유자들에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거든. 대신 내가 개입하면 몇 가지 변화가 생길 텐데 괜찮겠어?
“변화? 어떤 식으로?”
- 그래. 가만히 놔둬야 되는 걸 건드렸으니 난이도 조정은 불가피하지.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어쩔 수 없지. 일단 시간부터 벌어야 하니.
“그럼 그렇게 해줘. 근데 이 일들이 꼭 일어나야 되는 거야?”
- 이건 운명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오직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자들만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그리고 이현성!
[나?]
- 넌 선택을 해야 돼. 그 상태 그대로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아니면 네 진실된 모습으로 되살아날지를 말이야.
[되살아날 수 있다고? 내 진짜 모습으로?]
- 그래. 하지만 진짜 모습을 되찾게 되면 멈춰있던 네 시간도 다시 흐르게 될 거야. 거기다 만약 히든 보스를 막지 못하고 죽게 되면 영혼까지 소멸할 수 있어.
[내 진짜 모습만 찾으면 그 따위 놈 가뿐히 찢어 죽이면 되니까 어서 내 진짜 모습을 돌려줘.]
- 하하하. 좋아. 그 결정에 후회가 없길. 그리고 박태준! 너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길….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정신을 잃었다.
* * * * *
“으으음.”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아! 꿈이었구나. 하긴 그딴 일이 현실일리가 없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뭉클한 뭔가가 만져졌다.
“응? 뭐지? 털 같은데?”
잠시 후 뭉클한 것의 정체를 확인 한 난 깜짝 놀라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뭐… 뭐야?! 우리 집에 개가 왜 있어?”
내 침대엔 진한 갈색 털을 가진 대형견 한 마리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생김새는 언뜻 보기에 진돗개 비슷했지만 털이 진돗개에 비해선 길었다. 그때 시끄러웠는지 개가 몸을 뒤척거리다가 눈을 떴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
[??? 너 누구냐?]
그러다 자신의 앞발을 보곤 깜짝 놀라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뛰어 내렸다.
[이… 이게 뭐야? 내 모습이 왜 이래?]
익숙한 목소리. 꿈속에서 깨기 전까지 듣던 목소리다.
“너… 혹시 이현성?”
[날 어떻게 알지? 거기다 내 몸은 왜 이래?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흥분한 개는 미친 듯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뜯었다. 여기가 반지하에 가까운 1층이라 다행이지, 밑에 다른 사람이 살았다면 바로 올라왔을 상황이다.
한참을 발광하던 개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씩씩거리며 날 보고 물었다.
[그럼 니가 박태준? 넌 또 왜 그따위로 생겼어? 옛날 모습이 나았는데.]
“니가 할 말은 아닐 텐데. 근데 개라니. 크크크. 개였는데 자기가 인간인 줄 알았던 거야?”
[웃지 마!]
내 웃는 모습이 거슬렸는지 개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하하하. 근데 개한테 이현성이란 이름은 좀 그러니까 이름을 새로 짓자. 츤츤이 어때?”
[츤츤? 그건 무슨 뜻이지?]
“그냥 너한테 딱인 이름이야. 그나저나 그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고?”
믿기 힘들지만 현실이었다. 사실 아까 츤츤이가 발광할 때 날 몇 번 물어뜯었지만 상처는 물론이고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정말 1년 후에 대격변이 일어나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하지?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히든 보스를 막지 못하면 다 죽는 거니까!
히든 보스는 1년 후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최대한 준비를 해야겠어. 일단 스킬부터 다시 확인해 보자!
<스킬목록>
*방어력 무한(신급) - 방어력은 무한, 그 외 모든 능력치는 1로 재조정 된다. 능력치는 돈이나 아이템을 섭취하면 올릴 수 있다. 증가하는 능력치는 최초 랜덤으로 설정돼있지만 변경이 가능하다.(단, 신급 스킬 보유로 다른 스킬은 습득이 불가능하다.)
스킬에서 코인이 돈으로 변해 있다. 아직 화폐가 통합되기 전이라 그런가 보다.
좋아. 최대한 돈을 땡겨서 능력치를 올리자. 그래봤자 얼마 안 될 테니 나머지는 수련으로 메꾸는 수밖에.
그러면서 츤츤이를 바라봤다. 그가 선택의 방에서 보인 엄청난 능력. 비록 지금은 개지만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터. 수련을 위해선 그가 필요했다.
“츤츤아.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내 질문에 츤츤이는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답했다.
[에휴. 이 꼴로 대체 뭘 하겠어.]
그 대답에 난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한테 무술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무술?]
“그래. 지난 번 선택의 방에서 보니까 무술 실력이 엄청나던데. 내가 그걸 잘 배워서 히든 보스를 없애면 혹시 알아. 신이 네 공을 생각해서 사람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르잖아!”
내 말에 츤츤이는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그… 그럴 수 있을까?]
됐다. 거의 넘어 왔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너한테 이렇게 진짜 몸도 줬으니까 다른 몸을 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그래. 그러니까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
[……좋아. 도와줄게.]
“고마워.”
난 츤츤이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 당장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일단 일부터 그만두고, 돈 되는 건 다 팔아서 현금화 해야겠어.
집도 내놓을까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남겨두기로 했다.
거기다 한동안 먹을 음식들도 사놔야겠지? 어디서 지낼지도 알아봐야 할 테고.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았다. 난 당장 학원부터 가서 원장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원장이 약간 화를 내긴 했지만 정말 급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대출도 있는 대로 받았다. 어차피 대격변이 일어나면 갚을 일도 없는 돈이다. 그리고 집에 있는 전자제품들도 죄다 중고로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9천만 원.
학원 강사라 그런지 생각보다 대출을 많이 받지 못했다. 거기다 전세금으로 잡혀 있는 돈도 있다 보니 저게 최선이었다.
수련은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여러 산들을 돌아다니면서 하기로 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마친 나는 9천만 원을 모두 현금으로 찾아 가방에 넣고는 츤츤이와 함께 강원도로 떠났다.
나 혼자 방어력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