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200화 (완결) (2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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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에필로그

“날씨가 좋네.”

어느 따뜻한 봄 날 오후, 한 여인이 따사로운 햇살을 올려다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녀의 뒤엔 얼마 전 결혼한 남편이 아이를 안고 쫓아오고 있었다.

“엘리사. 같이 가요.”

“에르나르. 아기를 안고 있다곤 하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거 아니야?”

그들은 얼마 전까지 모험가 일을 하며 지내던 엘리사와 에르나르였다.

간만의 외출에 엘리사는 기분이 한껏 들 떠 있었다.

“오랜만에 대장이랑 그릴스를 보네.”

“그러게요. 설마 두 분이 식당을 차리실 줄이야…….”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어. 그것도 갑자기.”

모험가를 하는 것도 마물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 그들이 마지막 의뢰를 떠났던 엘퀴라즈 숲에서 돌아온 이후로 마물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남은 것은 몇 몇 야생 몬스터가 전부. 그 정도로는 모험가 일로 벌어먹고 살 정도로 의뢰가 충분하지 않았다.

“하긴. 우리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 적금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일을 구해야 할 텐데…….”

“으윽…….”

“그렇지? 에렌? 우쭈쭈.”

꺄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을 보며 행복해하는 엘리사와 달리 에르나르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너, 너무 보채지 마세요. 열심히 알아보는 중이니까…….”

“아니면 자기가 에렌을 보면 내가 한 번 일자리를 알아볼게. 그래도 괜찮잖아?”

“그, 그건 절대 안 돼요! 가장으로서 제 입지를 좀…….”

“풋.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를. 에르나르도 참 생긴 거랑 안 어울린단 말이야.”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파지는 맛 좋은 냄새가 모락모락 풍기는 한 가게. 손님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닌 딱 적당한 상태로 번창하고 있는 빵가게였다.

“어서오…… 오. 너희들이었나?”

“대장. 안녕.”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이군. 잠시만 기다려주게. 아직 손님들이 계시니까 말이야.”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일당은 없다?”

“쳇!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요식업 종사자인데 그 콧수염, 안 깎아도 되나요?”

“……시끄러워.”

그렇게 대장을 도와 손님들을 맞이한 엘리사. 에르나르는 그 옆에서 아이를 돌보며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뚫어지겠다. 이 속도위반 엘프 녀석아.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이가 생기다니…….”

“윽. 그릴스씨.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하. 오랜만이네요.”

하얀 주방장 옷을 입고 장갑을 낀 채 갓 구운 빵을 꺼내온 그릴스를 보며 에르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몇 번이나 봤지만 대장과 그릴스의 모습은 영 어색하기만 하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빵집 일은 할 만한가요?”

“뭐, 모험가 일보단 편하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하긴. 두 분 다 빵을 엄청 좋아 하셨죠. 여행 중에도 빵만 드셨고.”

“……그거야 건빵이 먹기 편하고 소화도 잘 되니까 그랬던 거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

“대장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요.”

“부탁?”

에르나르의 이야기를 들은 대장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의 일을 돕고 있던 엘리사와 아이를 안고 있던 에르나르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아이의 대부(代父)가 되어 주셨으면 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 말곤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흐음. 그런가. 나야 좋지. 대부라…… 그럼 결혼은 딱히 안 해도 되겠군.”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읍!”

재빨리 아내의 입을 틀어막는 에르나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엄청난 속도에 대장과 그릴스의 눈이 반짝였다.

“빠른데? 함께 모험했을 때보다 빨라. 너, 우리 집 종업원으로 일하지 않겠냐? 어차피 아직도 취직 못했다며.”

“그건 좀…… 그나저나 대장.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으음…… 그러니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뜸을 들이는 아라디온. 실례가 되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마음을 굳히고 대장에게 말을 꺼냈다.

“대장 이름이 뭐였죠? 아이한테 알려주고 싶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서…….”

“뭐? 너 내 이름 몰라?”

“그게…… 하하.”

몇 년이나 함께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모르다니. 대장은 이 초보 신랑이 영 믿음직하지 못하게 보였다.

“기억이 안 나면 엘리사한테라도 물어보지 그래?”

“윽!”

“……설마 너도 기억 안 나는 거냐?”

세상에.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의 이름을 벌써 잊어버리다니. 대장은 이 씁쓸한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대장 이름이 원래 잊히기 쉽지 않나?”

“뭐라고? 잠깐! 혹시…… 그릴스, 너도?”

“……미안하다.”

세 사람이 전부 자기 이름을 까먹다니. 그러고 보니 빵집에 자주 들리는 단골조차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는커녕 주인장이라고만 부르지 않았던가.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곤 옛 동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내 이름은 바로…….”

“응애!”

“앗. 에렌. 울지 마렴. 왜 그러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아이를 달래는 에르나르를 보며 대장은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휴. 이제야 그쳤네. 그래서 대장 이름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응애!”

“…….”

“에렌. 왜 그러니? 왜 자꾸 우는 거야? 바지에 쉬야라도 했니?”

다시 아이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는 대장.

“휴. 다시 그쳤네요. 대장. 그래서 이름이…….”

“그러니까…….”

“응애!”

“에렌. 울지 마.”

“그러니…….”

“응애!”

“그…….”

그렇게 대장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도 못한 채, 우는 아이를 달래는 두 신혼부부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 * *

“세계수님은 잘 지내시려나.”

아이들이 모두 잠든 저녁. 홀로 난롯가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세이렌이 찻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인연의 실로 이어진 그 사람과의 만남은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어느 기억의 의구심을 해소해 준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 있었다.

“지구라는 곳이 정말로 있었구나.”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준 힘과 기억은 전부 세상의 이치에 관련된 내용이 전부였고, 지구에 대한 기억은 거기에 딸려들어 온 부록과도 같은 단편들 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기억과 조금 달랐지만.”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고, 또는 그의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마모되고 변질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일까? 혹시 그가 알고 있는 지구와 내가 알고 있는 지구가 다른 곳인 건 아닐까?

“아무렴…….”

그러면 또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이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지구는 그저 추억에 불과한 곳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니까.

“그나저나 신전에서 여기까지 손을 뻗치니까 기분이 좋네.”

지금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는 신전이 손을 뻗지 않았다. 모든 인류에게 평등한 사랑을 베푼다는 그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만큼은 그 힘을 뻗친 적이 없었다.

덕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고아원까지 세워가며 자신이 돌보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신전에서 이곳까지 신관들을 파견하여 고아들을 보살펴주기 시작했고 삶이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전부 해결해보려 했지만…… 그래도 이런 도움도 나쁘진 않네.”

고아원 출신의 아이들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니 그들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무서우리만치 밀어붙이는 그들의 도움을 완전히 거절하지 못하고 집수리와 책, 그리고 장난감을 받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과거 아직 힘과 기억에 적응 되지 않은 시절, 그 시절 신전에서 이 도시로 파고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게 바로 그녀였다.

신전 사람들이 세계수의 힘을 신성력이라 부르며 사용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 때 그 남자랑 연관이 있는 건가?”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고아원에 찾아왔던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은 마제라 불리는 렉슬럼에게 물려준 지팡이. 그 지팡이를 건네받고자 자신의 고아원에 들렀던 한 남자.

「그대의 지팡이. 내게 넘겨줬으면 좋겠군.」

물론 까칠한 성격의 그 시절엔 그에게 자신의 힘을 내보이며 꺼지라고 외쳤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몇몇 신관들이 세계수의 힘을 사용했었지만 그자만큼 세계수의 힘이 가득 찬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신전의 높은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날 이후로 겁을 먹었는지 단 한 번도 그녀가 사는 도시로 신전의 영향력을 퍼트리려 하지 않았었다.

“뭔가 마음이라도 바뀐 건가?”

그 때였다. 고아원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방해했다.

찻잔을 놓고 문을 연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죄송하지만…… 음식을 조금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밤중에 길을 잃는 듯한 행색의 나그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나그네는 그 사이로 보이는 피부가 깊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쭈글쭈글하게 뭉개져 있었다.

“피곤해보이시군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세이렌은 곧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그네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무 안면 없는 사람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나그네에 손에 어린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아이들이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다들 며칠이나 굶은 건가요?”

“……이틀.”

조용히 대답하는 나그네. 그런 나그네 곁에 있던 아이들이 따뜻한 난로 곁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이렌은 그런 아이들과 나그네의 음식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 아이들인가요?”

“……그냥 갈 곳 없는 아이들입니다. 우연히 만났기에 제가 보살피고 있었을 뿐.”

낮고 기운 없는 목소리에 섞인 죄책감. 세이렌은 그가 무언가 깊은 사연을 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연을 캐묻진 않았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니까.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남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리는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만의 사연은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대신에 그녀는 그를 위한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을 아이들의 식사와 함께 내주었다.

“드세요. 많이 추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사연은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이 남자의 이름은 알아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그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치 않은 몸으로 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 남자의 이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하고 만날 것 같았기에.

남자는 스프를 마시던 손을 멈추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드렌. 드렌…… 이라고 합니다.”

“드렌이라…….”

그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던 그녀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멋진 이름이네요.”

* * *

“에이. 귀찮아 죽겠네.”

하늘을 날고 있는 노인이 숲을 수색하듯 살펴보며 말했다. 거친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와 시야를 방해한 탓에 노인은 몸 주변에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마법을 걸치며 다시 수색에 집중했다.

“대체 광룡은 어디 있는 거야?”

노인, 마제라 불리며 많은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는 자. 그는 얼마 전 실험에 사용하려 했던 용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갑옷을 강탈(?)당한 뒤로 재료를 찾기 위해 이 숲에 막 도착한 터였다.

“좋은 말로 해서 비늘을 줄까? 아니면 싸워야 할까? 흐음. 용이란 예로부터 지능은 뛰어나지만 독선적인 존재라 들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노인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광룡이 말이 통하는 용이라면 그 이름에 광(狂)자가 들어갈리 없지 않은가.

“흐음. 우선 찾아야 뭘 해보던가 말던가 하는데…….”

그 때였다. 마제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온 것은.

작은 폭포 아래에 누군가 앉은 다리를 한 채 거친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숲에 사람이? 혹시 광룡인가!?”

옛 문서에 따르면 용족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마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폭포로 향했다.

폭포 옆에 착지한 마제는 폭포를 맞고 있는 인간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으잉?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렉슬럼. 자네인가?”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에 마제가 상대의 정체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홀랜드? 자네가 왜 여기에?”

그는 핀에게 패배한 이후로 이곳에 남아 홀로 수련을 하고 있던 천검(天劍) 홀랜드였다. 예전과 다르게 몸을 가꾸지 않는 수련 끝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수련을 함에도 불구하고 명상 위주의 훈련으로 근력은 단련하고 있지 않았기에 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때마침 잘 됐군. 자네에게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흐음. 이런 곳에서 수련이라도 하고 있었나보지? 미안하지만 나는 바빠서 자네랑 어울려 줄 시간이 없네만.”

“걱정하지 말게. 길게 시간을 잡아먹진 않을 거야.”

마제를 향해 검을 쥐는 자세를 취하는 홀랜드. 하지만 그의 손에 검은 들려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제는 그의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네 뭐하나?”

“이번에 깨달았지. 굳이 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런 홀랜드를 보며 한심해 하는 마제. 검이 없이 상대를 베겠다니 대체 영문을 모를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 빨리 끝내자고. 자넨 참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그런가? 그 소리를 후회하게 해주지.”

* * *

“응? 핀. 혹시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소리요? 못 들었는데요.”

정말 오랜만에 정령체로 지낼 수 있는 날이거늘, 갑자기 들린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본체로 돌아가고 싶다.

물론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괜히 돌아갔다가 한 달에 한 번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않는가.

지금도 핀이 눈을 부라리며 혹시나 내가 또 사라질까 봐 걱정하며 감시하고 있는데. 지금 본체로 돌아갔다간 ‘휴식시간 끝!’이라 외치며 감방으로 돌아가라는 지독한 간수처럼 나를 달달 볶을지도 모른다.

“핀. 근데 꼭 이렇게 옆에서 뚫어져라 감시해야겠니?”

“아빠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옆에서 쭈욱 감시해야 되요.”

“……나는 방구석 폐인이라고. 어디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무투 대회 때도 좋아라 밖에 나가셨잖아요.”

“그건 다 네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한 거지.”

“엘프 마을도 가셨고.”

“그거야 그 마을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아인 족 마을도 가셨었고.”

“그거야…….”

“심지어 저희들 다 떼놓고 그 녀석이랑만 같이 마족들의 도시로…….”

“그, 그건 반 강제적인 납치였거든?”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는 핀의 말을 듣다보니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체는 나무라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라디온 녀석은 뭐하고 있으려나.’

나는 목에 걸고 있는 마력석을 만지며 그를 생각했다. 그가 이것을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이 숲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언제나 이곳에 장승처럼 박혀 있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오십 년, 아니 백 년 정도만 휴가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평소 하던 서글서글하고 친숙한 표정이 아니라 진지하고 결심을 굳힌 표정이라 나는 그의 부탁을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긴 휴가가 필요한지 물었지만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돌아가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돌아가야 한다는 곳이 어딜까.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뭐,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오랜 시간을 숲 밖에서 보냈으니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흐음…… 인연이라…….”

인연을 생각하니 이렇게 마냥 놀아도 되는지 걱정이다. 분명 세이렌은 내게 빨리 인연을 만들어 이 세계에 세계수를 퍼트리라고 했었다. 세계수가 가진 힘은 이 세계의 근간이 되는 힘이고, 그 힘이 한 곳에만 뭉쳐 있는 것은 세계가 약화되어 붕괴의 시작이 된다고 했었던가?

‘내 인연을 어디서 찾으라는 거야? 아니 그보다 나는 아직 성체도 아니잖아?’

내 본체는 아직 어머니만큼 거대하지 않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래 사셨으니까 그만큼 거대한 거고…… 솔직히 세계수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2차 성징기가 와야 인연도 맺고 씨도 퍼트리지. 씨를 퍼트린다…… 조금 야하게 들리는걸?

“어쨌든 핀. 나는 어디로 사라질 생각이 없으니까 너무 옆에서 그렇게 감시 안 해도 돼.”

그러나 핀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핀에게 고개를 돌렸다. 핀은 고개를 들어 내 본체를 보고 있었다.

“아빠…… 저거…… 열매인가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열매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고 나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봤던 어머니와 같은 열매가 내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을.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변화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내…… 내가 성인이라니…… 아, 안 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인연도 구하지 못했거늘! 벌써 열매가 맺히면 어떻게 해!

그와 동시에 내 열매는 맛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지만 또 동시에 자기 자신을 먹는 끔찍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하나 따볼까요?”

“……본인한테 그런 걸 묻지 마.”

“히힛! 왠지 아빠의 열매는 맛있을 것 같아요. 나뭇잎도 맛있었잖아요!”

“……그래. 하나 따봐.”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몸을 기어 올라가는 핀. 나는 핀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에 빠져버렸다.

‘핀 말고는 다른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 핀에게 부탁해야 할까? 핀. 내 아이를 낳아줘! 라고 말해야 하나? 잠깐. 아이는 이미 낳았잖아. 그게 열매고. 필요한 건 마력이니까…… 핀! 내 마력의 절반을 줄 테니 네 마력의 절반을 내게 줘! 아니야. 이런 걸론 안 돼.’

“으으…… 핀…….”

“네? 왜 그러세요?”

고민의 고민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나를 기어 올라가던 핀이 그 소리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인생은 실전이다. 행동으로 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윤리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세계를 위해 나는 핀에게 나의 고민을 해결해 달라고 말하려 하였다.

“아무 일도 아니외다. 주공께서 열매가 맺히신 일로 이것저것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외다. 그렇지 않소이까? 주공?”

“응? 아. 으응. 그렇지 뭐.”

갑자기 호기가 꺾이고 옆으로 빠져나갈 길이 생기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굴러가 버렸다.

이게 아닌데.

“흐음. 아빠.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아빠 열매는 틀림없이 맛있을 거예요!”

“하하…… 그래. 고맙구나.”

나는 나를 구해줌과 동시에 내 마음을 꺾어버린 필로우를 쳐다봤다. 필로우는 작은 목소리로 ‘후후. 복수이외다. 아씨’라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복수라니. 너네 언제 싸우기라도 했었냐.

“후우. 모르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열매가 맺히고 나서야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내게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고 나서야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이 깨어나 버린 것이다.

“아빠! 이것 봐요! 열매가 아주 잘 익었어요!”

“뭐, 시간은 많으니까.”

내게서 열매를 따온 핀이 그것을 흔들어보았다. 세계고 뭐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내 삶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젠 더 이상 바쁘고 짧은 인간의 삶이 아니니까.

나무로서의 내 삶과 일상은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이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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