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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신
로만제국.
대륙에서 가장 강성하며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는 대국.
단순히 국력이 강한 것뿐만 아니라 문화 또한 융성하게 발전한 그 대국의 중심지에는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신전의 모토가 되는 곳이 있었다.
대신전. 가장 처음으로 신의 뜻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 만든 가장 오래된 신전.
그 신전 내부에는 지난 천 년간 열 명이 채 안 되는 이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오직 그 공간의 주인이 허락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방. 그 방 안에 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작은 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큭큭…… 참으로 쉽구나. 쉬워.”
노인의 정체는 바로 죠수아. 얼마 전 엘퀴라즈 숲으로 여행을 떠났던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기쁨에 겨워 한시라도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강행군을 한 터라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비명도 이제 잠시라는 생각에 죠수아는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어리구나. 세계수여.”
분명 엘퀴라즈 숲으로 떠났던 그의 목적은 세계수의 말대로 회개였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용서였다. 죠수아도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이 세상을 위한 것이란 걸 알지만 동시에 용서받기 힘든 행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과연 자신의 행동을 용서해 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죠수아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맙구나. 덕분에 이렇게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됐으니.”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분명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엘퀴라즈 숲으로 참회를 떠난 것이었거늘,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더 살고 싶다는 욕구가 벌인 작은 기행이 이렇게 득이 될 줄이야.
세계수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작은 병. 그 어떤 마력이라도 손실 없이 담아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
이것을 시작으로 인류를 위해 일하겠다는 자신의 꿈도 더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워. 세계수의 마력이란…….”
당장에라도 병뚜껑을 열고 마력을 받아들이라는 육체의 외침을 무시한 채, 죠수아는 그 아름다운 흰빛에 흠뻑 빠졌다.
엘퀴라즈 숲으로 떠난 여행에서 과거를 너무 많이 회상한 탓일까? 그동안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추억들이 노인의 머릿속에 별처럼 반짝거렸다.
* * *
“신기해.”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처음으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 검사.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나라는 존재는 고작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나는 내가 생각해도 뛰어난 부분이 없다. 검술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법이라곤 초보 마법사가 사용하는 정도가 전부다.
지금까지 많은 동료들을 만나왔고,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그들 중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강하고 경험 많은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
“이봐.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알았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별동대로 적의 성에 진입하여 성문을 연다. 간단한 작전이지만 적진 한복판에서 움직여야 하는 만큼 일반인처럼 보이기 위해 갑옷은커녕 칼도 적의 것을 빼앗아 사용해야 했다.
위험한 작전인 동시에 중요한 작전. 그렇기에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 투입된 작전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이번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어이. 행운아. 이번에도 살아남았네?”
“그러게. 신기하지?”
“약해빠졌으면서 참 잘도 살아남는단 말이야.”
언제나 기적처럼 살아남는다는 이유에서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성문을 여는 것이 작전의 목표였기에, 잘 살아남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작전을 세운 장교가 뛰어난 판단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 운이 좋은 것일까? 전부터 계속 생각해봤지만 나란 녀석은 무언가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것 같다.
이번 작전 역시 마찬가지다. 성 내를 순찰하는 병사들에게 우리의 정체를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공격은 나를 빗겨나갔다. 그리고 성문으로 달리는 중에도 병사들은 다른 동료들을 쫓았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정말로 누군가 나를 보호해주는 걸까? 혹시…… 신이 나를 보호해 주시는 걸까?”
“신? 신이 뭔데?”
“아. 설마 너, 얼마 전에 들은 그 이야기 때문에 그러는 거냐?”
나는 나와 함께 다른 병사들이 시신을 옮기는 작업을 구경하던 동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 말대로 나는 얼마 전에 작전장교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지금의 고민을 안고 있었다.
「왜 북쪽 숲은 점거하지 않는 겁니까? 그곳을 점령한다면 작전상 유리한 부분이 많을 텐데요?」
「그곳은 위험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엘프들은 세계수라는 정체불명의 거목을 두고 단결된 상태지. 그들은 그 나무를 신으로 모신다더군. 괜히 공격이라도 했다가 나무가 파손된다면 결사항전을 개시하겠지. 무언가에 홀린 광신도보다 무서운 건 없으니까. 그 광신도들과의 전투로 입을 손실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의 이득보다 훨씬 크다.」
「신이 뭡니까?」
「정보원에 따르면 그 엘프들이 말하는 신이란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라더군. 전지전능하며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말도 안 되는 허구의 존재지.」
“신이라…….”
나도 내가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난세에 보잘 것 없는 실력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기묘한 일이 아닐까?
“혹시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닐까?”
“푸핫! 너 아직도 사춘기냐?”
“남의 혼잣말을 엿듣는 건 나쁜 버릇이야. 혼자 좀 생각하게 내버려 둬.”
“혼잣말은 사춘기의 특징이기도 하지. 죠수아 네 녀석. 아직도 사춘기구나?”
“시꺼. 남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나는 혹시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닐까?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나는 절대로 죽지 않고 행복한 결말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전쟁 따위를 하는 잡병이 아니라…….
세상을 평화로 이끌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 *
“정말 그때 선택은 탁월했지. 그대로 계속 살았더라면 이런 세상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게야.”
죠수아가 그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그날 자신을 비웃었던 동료는 얼마 못 가 드워프와의 전쟁에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마음의 불안한 확신을 가진 채 병영에서 탈주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다녔다.
“정말로 신은 나를 사랑하시는 걸지도.”
영웅이, 용사가 되기 위한 여행은 순조로웠다. 가는 곳마다 일어난 종족간의 분쟁, 그 분쟁의 한복판에서 기적처럼 사람들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끌어냈고, 그 일이 끝나면 동화처럼 자신을 따르겠다는 동료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흐음.”
갑자기 떠오른 부끄러운 생각에 노인은 오랜만에 얼굴을 붉혔다. 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긴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떠올린 신에 대해 열성적으로 전파했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친구라는 것들이 내 말을 안 믿어주다니.”
* * *
“죠수아. 너 연설 참 잘하더라.”
“응? 그래? 고마워.”
“우리는 신의 뜻을 따라 이렇게 모이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무사히 이곳에 안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크하핫! 신이라니. 신이 대체 뭔가? 마을 사람들은 다들 네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으니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말했잖아. 우리가 이렇게 모이고, 작지만 평화가 깃든 마을을 만들 수 있게 인도해 주신 분이라고.”
“그런 존재가 만약 있다면 온 세상을 평화로 이끌면 되지 않은가? 뭣하러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그거야…… 이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 일이지. 신은 모든 일을 도와주진 않아.”
“우리라니. 저는 빼주시죠.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존재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 * *
“하지만 이젠 어떠한가? 자네들이 살아 있다면 내가 세운 신의 교단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모습을 보여줬을 텐데. 나를 비웃던 너희들의 얼굴이 망가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죠수아가 구해준 사람들. 죠수아가 만든 마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었기에 신이 구제해 주었다는 그 말을 마음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신이란 헛된 소리라며 무시하곤 했었다.
심지어 엘프였던 동료조차도. 아쉽게도 그 당시 엘프들은 엘퀴라즈 숲에 살던 엘프가 아닌 이상 세계수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깨달았지. 너희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믿는다는 걸. 용사인 나의 말을…….”
죠수아가 자신의 방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흉상으로 눈길을 향했다. 그 흉상은 중년으로 분장했던 그의 모습을 쏙 빼닮아서 그의 추억을 자극하였다.
* * *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마왕과 세계수가 공멸한 이후, 로만 제국을 세운 나는 벌써 백 년째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직 미숙한 후손들에게 대륙의 황제를 맡길 수는 없는 상황. 후손으로 분장한 채 3대째 황제를 하고 있지만 슬슬 이 노릇도 지겨워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다. 강한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어.’
세계수들을 모두 없애 마물을 증식시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물과 싸우게 하여 전쟁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처음엔 그 방법이 잘 통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의 적응력이란 것을 너무 우습게보고 있었다.
‘모험가라니. 제길. 그런 집단이 왜 생겨났단 말인가.’
마물이란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법. 하지만 모험가라는 직업이 생기고 나서부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공포는 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공포의 존재이긴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물을 보며 종족의 편견을 깨부수고 서로 힘을 합쳐 물리쳐야 겠다는 생각보단, 모험가들에게 의뢰하여 물리치는 쪽을 택하기 시작했다.
마물은 끝없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숫자만큼 모험가들도 끝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모험가란 존재가 병사처럼 변하고 있어.’
이대론 안 된다. 지금은 비록 마물을 퇴치하는 의뢰로 만족하고 있지만, 모험가의 숫자가 더 늘어나 마물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칼끝은 멈출 것이고, 그 힘은 다른 곳으로 향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 힘을 나라에서 탐을 내 마물이 아닌 다른 곳으로 칼을 돌린다면? 기껏 찾아온 평화가 다시 깨질지도 모른다.
‘마물로는 부족해. 마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싸우지 못하도록 구속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세계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은 평화가 이대로 깨진다는 건…… 그래!’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엔 한 가지 멋진 방법이 떠올랐다. 공포로서 사람들을 억제할 수 없다면, 반대로 평화를 끝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순종적이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직 힘이 남아 있다. 그래. 이 힘이라면…….’
신이라면 전지전능하며 기적을 선사해야 한다. 그런 존재가 하는 말이라면 누구나 다 따르고 싶어하는 법.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한 방법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세계수의 힘이라면!’
시간이 없다. 이제 이런 황제 노릇은 필요 없다. 황제로서 얻을 수 있는 평화는 기껏해야 지금 다스리는 나라 정도가 끝이니까.
‘나는 신이 되리라.’
* * *
“다들 잘 따라줘서 다행이었지.”
이름도 없는 신. 자신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이라는 존재를 사람들은 어찌나 잘 따라줬던지.
죠수아는 흉상에서 눈을 떼고 편안한 마음으로 회상을 끝마쳤다.
“자.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한담…….”
세계수의 힘은 죽어가는 자도 되살릴 만큼 큰 효능을 지닌 마력이다. 지금 병에 담긴 마력을 수천 배 희석시켜서 사용해도 뛰어난 회복포션이 되어 신전의 위용은 더 높아질 것이고, 신전이 외치는 평화라는 구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연구실로 보내 새로운 포션을 만들고 이 마력에 대해서 더 연구해야 한다. 세계수의 마력을 끊임없이 양산시킬 수만 있다면 신전은 계속해서 대륙의 평화를 유지시켜 줄 거목이 될 수 있다.
“흐음…….”
하지만 죠수아는 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린 세계수가 한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절대로 당신이 사용하진 마세요. 지금 몸 상태를 보니까 통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죽는다니. 세계수의 마력이 사람을 죽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 어린 소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죠수아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는 이미 깨진 그릇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마력을 퍼부어도 계속해서 새어 나갈 뿐, 더 이상 마력을 담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도 옅은 마력을 간신히 붙잡아두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 세계수도 그런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던 거겠지. 그러니 세계수의 마력처럼 농밀한 마력을 흡수하면 완전히 그릇이 깨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게 아닐까.
“크큭. 어리구나. 세계수여. 아무리 깨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세계수의 마력은 누굴 죽이지 못해.”
오히려 세계수의 마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몸 상태가 된 것도 벌써 수십 년이 넘었다. 부서져 가는 육체라 세계수의 마력을 담지는 못하지만, 그 마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흘리는 것만으로도 육체는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깨진 육체를 완전히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만큼 세계수의 마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며, 인간으로서 천 년이나 살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불릴 만했으니까.
오히려 죠수아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 태생에 얽매이지 않고 아인족이나 마족, 엘프였다면 세계수의 마력으로 영원불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간이기에,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세계수의 마력으로도 천 년밖에 생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하지만…….”
세계수의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젠 더는 구할 수 없는 세계수의 마력을 자신의 몸에 쓰는 것보단 연구자들에게 건네주어 양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비록 수백 년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답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계속된 실패가 축적되어 마침내 답을 알아내는 것.
연구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 아이라면…….”
그러나 그것은 멀쩡한 세계수를 발견하지 못한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성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라나 자아까지 갖춘 세계수가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내게 계속 마력을 건네줄지도…….”
너무나도 어리숙한 세계수. 원수나 다름없는 자신을 용서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력까지 건네준 착하고 순진한 그 세계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마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돈을 노린 모험가나 왕족들에게 죽을 위험도 없다. 그 아이 곁에는 하이 엘프와 정체불명의 아인족, 거기에 엘프들까지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좀 더 친분을 쌓는다면 정말로 자신이 원할 때마다 마력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건 내가 흡수해도 괜찮을지도…….”
죠수아는 어린 세계수의 경고를 떠올렸지만,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순진한 세계수의 걱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마침내 그가 뚜껑을 열고 그곳에 코를 가져다댔다. 싱그러운 세계수의 마력이 그의 코로 스며들었다.
그토록 갈구하던 마력이었기에 그의 육체는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그 마력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
“오오.”
그의 몸속에 들어갔던 세계수의 마력이 다시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육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하던 피부도, 차갑고 시리던 무릎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지끈거리던 목과 허리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젊은 시절의 강인하던 육체 뿐. 그리고 변해버린 육체를 따라 젊고 짜릿해진 정신뿐이었다.
“후후…… 으하하하!”
더 이상 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청년이 된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비밀스런 그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좋군. 좋아. 바로 이거지. 젊음이란!”
그 순간, 그는 심장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금까지 세계수의 마력으로 몇 번이나 젊음을 되찾았지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는 당황하며 버둥대기 시작했다.
“크윽. 안 돼…… 마력이…….”
죠수아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이 흡수한 마력은 검에 서려 있던 마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계수와 광룡의 마력이 섞여 태어난 세계수들의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세계수의 마력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간 뒤에도 거기에 섞여 있던 광룡의 마력은 꾸준히 그의 몸속에 축적되고 있었음을.
“하아. 하아. 아, 안 돼…… 몸이…… 몸이!”
바닥에 쓰러진 죠수아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광룡의 마력에 전신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 격통 속에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절망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주인공이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은 죽지 않아. 언제나 끝까지 행복할 뿐…….’
그리고 서서히 옅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것도 또한 한때의 일일 뿐일 게야. 잠시 후 눈을 뜨면 정말 괴로웠어라며 웃으며 말할 수 있겠지. 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나는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니까…….’
어쩌면 이것도 한때의 시련이 아닐까. 시련이 있고난 다음에 주인공은 항상 강해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죠수아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더 강해질지도 모르는, 자신도 놀랄 만큼 새로운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이후로 신전에선 그 누구도 다시는 대신관을 만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