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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숲으로 찾아온 손님(3)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노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으로 이름을 들었던 때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렸던 때가 아닌, 이름을 불러줬던 친구들만 기억날 뿐이었다.
함께 여행을 했었던 자신의 동료들.
함께 자신을 도와 마왕을 물리쳤던 자신의 동료들.
그 싸움에서 죽어 버린 자신의 동료들.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난 동료.
자신을 질투했던 동료.
그저 자신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던 동료.
미래를 위해 만든, 인류의 결속을 위해 만든 신전에서는 더 이상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대신관이라 불러주는 사람들과,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입이 무거운 몇 몇의 충신들만이 자신을 용사라 불러줄 뿐이었다.
“뭐라고?”
“당신 이름 아닌가요? 죠수아. 제가 알기론 그런데요. 혹시 개명이라도 하셨나요?”
“…….”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나? 하지만 어떻게?
노인은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 숲의 모든 것은 비상식적이다. 자신의 긴 삶으로서 쌓아온 지식이 모두 붕괴되는 곳이었다.
“맞다. 내가 죠수아지.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도 나를 내버려 둔 것인가?”
“왜요? 복수라도 해야 하나요?”
어린 소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그 표정엔 분노나 증오 따윈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은 옛 격언을 떠올렸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고 했던가? 어린 세계수의 평온한 모습과 다르게 노인의 마음은 좌불안석이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한 짓에 대해 변명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야. 어쩔 수 없었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인류를 위해서 불가피한 짓이었다.”
“알아요, 알아. 뭐,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도 알고 계셨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들을 미워하지 말라고도 제게 말씀하신 거였겠죠.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세이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증오했겠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다. 어린 세계수가 최초의 세계수를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분명 지금까지 다른 세계수들은 자신이 관리했고, 그 최후까지 자신이 지켜봤거늘.
게다가 세이렌은 또 누구란 말인가?
정보의 부족을 겪어본 적 없는 노인은 조용히 어린 세계수를 노려보며 그녀가 한 말을 파악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죠. 불안정한 세계가 만든 운명. 세이렌은 말했어요. 세계가 불안정해져서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아 난폭해진 거라고. 그럼 반대로 그 세계에 영향을 받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세계를 구하기 위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죠. 저는 그렇게 믿고 싶어요.”
“운명이라고? 내가 한 모든 행동이 운명?”
신을 믿는 신도이자, 그 신을 만들어내고 모두에게 믿음을 부여한 대신관이라는 직책과 다르게 노인은 운명이라는 말에 분노하고 있었다.
신을 믿는다. 하지만 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인류를 이끌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낸 신이었고, 비록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은 자신의 공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걸 운명이라는 말 한마디로 깎아내리려는 어린 세계수의 태도가 노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한 모든 노력과 고뇌와 선택이 전부 운명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냐?”
“운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드셨나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한 거대한 생명체가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흘러간 방어기제? 으음. 이것도 좀 어렵네요. 하지만 이런 단어로밖에 설명을 할 수 없는걸요.”
“세계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나의 모든 행동을 조종했다?”
“조종이라기 보단 자연스럽게 행동한 거라니까요.”
노인, 죠수아는 세계수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곧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닫곤 반박을 포기했다. 괜한 말씨름으로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만큼 질 나쁜 교섭은 없으니까.
대신에 그는 아직 어린 세계수가 세상 물정을 모르고 마음대로 어머니의 죽음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자기 위로라 생각했다.
“그래. 운명이라고 치자. 그런데 왜 네 어머니를 죽인 나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운명이라 할지라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텐데?”
“어차피 당신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죽였을 테니까요. 어머니 역시 저항하지 않으셨을 거고. 그리고 당신이 세계를 위해 힘쓴 건 사실이잖아요?”
정말로 진심인 걸까? 노인은 세계수의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했다.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거쳤다. 그 와중에 노인은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이다.
인간도, 엘프도, 아인족도, 마족도, 드워프도 분노라는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까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선 늙은 노인들이나 고를 수 있는 선택지였다.
아직 어리고 삶이 많이 남은 세계수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로 나를 용서해 주는 건가?”
그러나 노인은 세계수의 말을 믿기로 했다. 세계수의 진심을 믿기보단, 이 숲에 오게 된 자신을 믿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은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그 절대적인 자신감은 숲에 세계수가 있음으로써, 그리고 그 세계수가 아직 어리고 삶에 능숙하지 못해 보인다는 것으로 더욱 커져만 갔다.
‘어쩌면…….’
혹시나 해서 와본, 생을 정리하기 전에 들린 마지막 여행지. 어쩌면 이곳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엘프 마을이나 아인족 마을에 무슨 짓을 하셨었나요? 제가 가본 곳마다 당신의 흔적이 있던데. 아인족 마을은 추측이지만…….”
“세상에 엘프들이 사는 숲과 아인족이 사는 숲이 한두 군데더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정말로 모르시나요? 용사의 무기가 전해져 내려오던 부족들이던데…….”
사실은 알고 있다. 세계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흔적이 남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이 인류를 위해 토벌하려 했던 그들을 뜻할 것이다.
다만 지금 세계수의 말에 순응하고 대답해 줄지, 아니면 그 악덕을 숨기고 그냥 넘어갈지 고민할 뿐이었다.
‘호감을 사야 해. 이 녀석이라면 그것들 역시 용서해 줄지도 모르겠군.’
“그래. 내가 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행동들은 모두 세상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어.”
“그 행동들이요? 어떻게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엘프와 아인족의 외골수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어차피 말하는 거, 모든 것을 말해 최대한 저항하려는 의지를 보여선 안 된다.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비루스 왕가도, 에반슈트 가문도,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들끼리 살고 있던 아인족도, 마지막으로 인간의 침입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던 엘프들도. 그들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전부 자기 종족만을 위해서 자신들의 힘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비루스 왕가는 오로지 인간들만을 위한 나라를 꿈꿔왔지. 에반슈트 가문은 인간은커녕 몰락하고 쇠락해 용사라는 이름을 빌미로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말한 아인족들은 다른 아인족들이 서서히 타 종족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까지도 아인족만의 부족을 꿈꿨더군. 엘프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들 역시 엘프만의 숲을 꿈꾸며 끝까지 타 종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죽어야 할 만큼?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쇠락시켜야 할 만큼?”
“지금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지언정, 언젠간 내가 죽고 나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 고인 물만큼 위험한 것은 없고, 그런 분란의 씨앗이 정화되길 기다릴 만큼 내 남은 삶은 길지 않으니까.”
“확실히 오래 사실 것 같진 않네요.”
“이 이야기들을 듣고도 나를 용서하겠다는 건가?”
“제가 용서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저와 관련된 일들은 모두 용서했고, 지금 하신 이야기는 그들이 용서해야지 제가 용서할 게 아니잖아요?”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죠수아는 어린 세계수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그것은 이 어린 세계수가 자신의 생각처럼 복잡한 일을 계산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녀석이라는 것이 들어맞았다는 쾌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런 어린 아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구나. 이런 나를 용서해 주다니.”
죠수아는 자신의 품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웃음을 참았다.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거늘, 정말 기적처럼 세계수의 잔재라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지고 나온 물건이거늘, 그 물건을 이렇게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되다니.
“뭘요. 그나저나 회개하기 위해서 숲에 찾아오신 건가요? 마지막 순간을 용서받고 떠나고 싶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있구나.”
“뭔가요?”
“나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 같으니 뭘 더 숨기겠느냐. 세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신전을 세워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지만 아직 그 행복은 완벽하지 않단다.”
“그래서요?”
“비록 인류가 평화를 되찾았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 굶주림이라거나…… 질병이라거나…… 내 힘으론 아직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
“아직?”
“그래. 아직.”
죠수아가 품에서 병을 꺼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병은 평범한 병과 무언가 달라보였다.
그는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하는 순간 상대에게 의심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협상이란 생각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네 마력을 내게 조금 나눠줄 수 있겠느냐?”
“흐음…… 그거 그냥 더 살고 싶으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난 이제 더 이상 세계수의 마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다. 그저 정말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네게 부탁하는 거란다.”
“하긴…… 지금 몸을 보니까 확실히 무리겠네요.”
어린 세계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노인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고작 수백 년도 살지 못한 어린 애송이가 자신을 깔보는 듯한 말을 하다니.
비록 마력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세계수의 마력은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수십 년은 늘려줄 것이다.
‘어서. 어서 받아들여라.’
잠시 뜸을 들이는 어린 세계수의 반응에 죠수아가 초조한 기색을 내비췄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변수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는 계속해서 어린 세계수가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세계수가 그가 원하는 말을 하는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신을 찬양했다.
“좋아요. 드릴게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