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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숲으로 찾아온 손님(2)
세계수에 꽁꽁 묶여 있는 소녀. 그 소녀를 보며 노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엘프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난 세계수라면 분명 인간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엘프란 존재를 셀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지켜보았기에 노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엘프란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정지된 시간 속에 사는 종족이었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살아간다.
그러니 엘프들에게 둘러싸인 세계수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과거의 세계수는 비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세계수는 그녀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기엔 너무 어렸다.
“아빠아!? 정령체로 지내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때였다. 한 젊은 엘프 한 명이 세계수를 윽박지르듯이 대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노인은 그녀의 태도가 다른 엘프들의 화를 돋울 것이라 예상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세계수란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으윽.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얼굴은 보고 이야기해야지…….”
“그러다가 지난번처럼 납치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으으. 베르제, 그 녀석…… 좀 더 때려줬어야 하는데.”
“하하……. 괘, 괜찮아! 엘프들이 날 이렇게 꽁꽁 묶어놨는데 어떻게 납치를 당하겠어. 그리고 베르제한테 너무 그러지 마. 그냥 우연히 내가 휘말린 것뿐이니까.”
‘정말로 세계수가 맞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인의 상식을 파괴하는 듯한 엘프와 세계수의 모습. 노인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걱정했었는데요! 아라디온이 말리지 않았으면 벌써…… 으으!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베르제 그 자식!”
“그, 그만해! 손님 앞이야!”
“손님이라니. 우리 숲에 무슨 손님이죠?”
“바로 앞에 있잖아…….”
“앗. 사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젊은 엘프. 노인 역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이엘프…… 확실히 세계수가 맞긴 하군.’
이젠 더는 볼 수 없는 하이엘프를 보게 된 노인은 소녀의 정체가 세계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첫 번째 하이엘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격의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걸지도. 첫 번째 하이엘프란 본인의 자식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흐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아니. 내가 아는 한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이상하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엄청 낯이 익는데요?”
“큭!”
노인이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보긴 대체 어디서 봤단 말인가? 자신은 지금까지 거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신전에서 지냈는데.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자신의 수족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인류를 통합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거늘.
대체 보긴 어디서 봤단 말인가?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엘프 중에 그대는 없다.”
“그런가. 하긴, 인간을 많이 본 곳이 무투 대회를 나갔을 때뿐이니…… 그 때 우연히 지나쳤을지도. 근데…….”
하이엘프가 화가 난 것일까?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노인은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여 뒤로 한 발짝 발을 뺐다.
“왜 초면에 반말이세요?”
“……그게 거슬렸던 것이냐. 미안하군.”
엘프들은 딱히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직위가 있는 엘프가 아니면 서로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또 한 번 이 숲에서 자신의 상식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기, 핀! 그러지 마! 손님이라니까!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른 데 좀 가 있어!”
“끄응…… 알았어요.”
“그냥 가지 말고 나 좀 풀어주고 가!”
“안 돼요! 저 노인이 아빠를 납치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다른 데로 피해 있는 것도 많이 양보한 거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진 젊은 엘프. 노인은 헛웃음을 짓고 있는 어린 세계수로 눈길을 향했다.
소녀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노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저기, 이것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군.”
꽁꽁 묶인 밧줄이지만 이 정도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풀 수 있었다. 예전엔 이것보다 더 한 포박을 당한 채 전장 한 복판이나 지하 감옥에 던져진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런 포박쯤이야 어린 아이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휴. 감사합니다. 애들이 걱정이 많아서요.”
“그렇군. 그 하이엘프가 묶은 것인가?”
“아라디온이라도 있었으면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 역시 레벤토 만으론 안 되는 걸까…….”
“아라디온?”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기억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 이름을 끄집어내기 위해 잠시 상념에 잠겼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데. 열심히 기억 구석까지 뒤진 수고를 알아주듯 노인의 뇌가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래. 분명 예전 세계수가 언급한 적이 있었지.’
거의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한 이름이었고 너무 긴 시간이 지난 터라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저 평범한 자의 이름이었다면, 그리고 세계수가 언급한 이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 첫 번째 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지금 여기에 없군요.」
첫 세계수의 첫 번째 하이엘프. 긴 세월이 지나도 그 이름은 노인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간신히 떠올린 이름과 정체였지만 노인은 짐짓 모른 체하며 어린 세계수에게 그가 어디 있는지 떠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리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 하이엘프가 복수를 꿈꾸고 있다면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그 친구는 누구지? 지금 여기 있나?”
“아뇨.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며 휴가를 달라고 해서요. 지금은 여기 없어요.”
뒷말로 중얼거리며 ‘대체 뭘 하기에 백 년이나 휴가를 달라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소녀를 보며 노인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자신의 정체만큼은 들켜선 안 된다. 눈앞의 소녀는 세계수다. 그녀가 만약 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엘프들을 동원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 전에 세계수의 마력을…… 신성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전원 상대할 수 있겠지만.’
노인은 그저 세계수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을 갈취할 자신이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신성력에 절여진 그의 몸은 그것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빨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자신감과 반대로 걱정이 들었다. 그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뒤로 차츰 마르기 시작한 육체는 깨진 그릇처럼 더 이상 신성력을 담아내지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애검에 서린 신성력까지 흡수했거늘, 그 젊음조차 십 년을 유지하지 못했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를 시작해……”
풀려난 소녀가 노인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한 줄기 하얀 섬광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노인은 아직 죽지 않은 눈으로 그 섬광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혼래빗!?”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숲에 사는 엘프들조차 보기 힘들다는 혼래빗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노인의 놀라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공! 위험하오! 수상한 자이올시다!”
‘혼래빗이 말을 하다니!’
가장 처음 든 생각은 혹시나 아인족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삶 중에서, 그리고 대륙을 아우르는 노인의 정보망에서도 혼래빗 아인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어린 세계수는 혼래빗과 태연히 대화를 나눴다.
“……필로우.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손님이라고.”
“모르는 소리! 세간에 가장 위험한 게 누구인지 아시오? 바로 어린아이와 노인이올시다! 강호에선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거늘!”
“아니, 여긴 강호가 아니잖아! 그것보다 필로우. 너 수련한다고 하지 않았어?”
“수련은 이미 끝마쳤소이다. 주공. 혹시 소인에게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으신지요?”
“으음…… 전보다 눈치가 없어진 것 같달까. 뭔가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데…….”
“아, 아니 그것 말고 외적으로 말이외다!”
“외적이라면…… 외모…… 으음…… 필로우 너…….”
기대하는 눈초리로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는 혼래빗.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가 인형과 소꿉놀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요즘 살쪘어? 전보다 덩치가 커진 것 같은데?”
“크흑! 주공은 바보이올시다! 덩치가 커진 게 아니라 털을 빗었단 말이외다!”
그 말을 끝으로 숲으로 달려가는 혼래빗. 노인은 혼래빗의 자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은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마치 예전에 봤던 미치광이 용처럼 모든 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아. 요즘 들어 뭔가 말도 많이 걸고 이상하단 말이지. 꽃을 쥐어짜서 향수를 만든다느니…… 속눈썹이 있었으면 좋겠다느니…… 아. 손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별 말을 다. 각자 자기 사정이 있는 법이지.”
“하하……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럼 이제 이야기를…….”
말을 하던 도중에 어린 세계수가 갑작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또 끼어들 방해꾼이 있는지 없는지 감시하는 눈초리였다.
“으음. 역시 곰은 이런 일에 끼어들 녀석이 아니지. 괜한 걱정이었어. 어디서 또 낮잠이나 자고 있으려나.”
“곰이라니. 누구에게 붙여준 별명인가?”
“아뇨. 곰이에요. 그냥 곰.”
“…….”
노인은 더 이상 이 숲에 대해 이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그저 평범한 노인일 뿐이거늘. 늘그막에 여행이나 하다 우연찮게 이곳에 들린 것뿐이다만.”
“표정 하나 바꾸시지 않고 거짓말을 하시네요.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벌써 봤거든요.”
“나를 봤다고? 너는 이 숲에서 나가지 못할 텐데?”
“그냥 우연히 여행하시는 분이라더니 저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신가 보네요?”
‘아뿔싸.’
정신없는 장면을 연달아 목격해서였을까. 아니면 죽음을 앞둘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을까.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실수를 한 노인은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그런 노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손으로 흔들어 보였다.
“아는 친구가 이걸 선물해 줬거든요. 그래서 이 상태로도 충분히 숲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죠. 물론 밖에 나가서 당신을 직접 목격한 건 아니지만. 제가 봤을 때보다 훨씬 나이가 드셨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그럼 나를 어디서 봤다는 것이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제가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도 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죠. 그럼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물어 볼게요.”
살짝 웃음을 지어보인 소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말에 얼어붙은 듯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나요? 용사. 조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