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96화 (19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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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숲으로 찾아온 손님(1)

“쿨럭. 쿨럭.”

평야를 걷는 한 노인이 거친 기침소리를 내뱉었다. 노인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만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없지. 그래. 다 떼어놓고 왔으니까.”

이미 이번 여행을 오기에 앞서서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충실한 신도들을 모두 따돌리고 온 참이었다. 만약 그들이 있었다면 기침을 하는 순간에 자신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또 다시 골방에 가둬놨을 것이다.

“후우. 그 친구도 이 숲에서 눈을 감았다고 했었나.”

여느 노인이 그렇듯 지금의 노인도 그리운 옛 추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지금과 달리 육체에 힘이 넘치고 그 젊음과 힘이 영원토록 계속 되리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자면 한 없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노인은 짧은 회상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바로 죽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꼭 확인해 보고 싶군.”

이 숲에 온 게 몇 년 만이더라? 노인이 곰곰이 과거를 떠올려 봤지만 이미 해를 세지 않은지 오래였다.

대신에 노인은 언제부터 햇수를 세지 않았는지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센 게 백 년이었던가…… 그렇지. 신전을 세웠을 때부터 더 이상 세지 않았으니 백 년은 됐겠군. 그럼 이 숲에 오지 않은 지 못해도 팔, 구백 년은 됐다는 뜻일 텐데…….”

문득 햇수를 세던 노인이 옅은 기침과 함께 웃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시간은 언제나 흘러가고 그걸 세는 것은 덧없는 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서둘러 가고 싶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군.”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숲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노인의 다리가 삐그덕 거리며 거한 통증을 무릎에 선사해주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노인은 바위에 앉아 숲을 바라보며 잠시 쉬기로 정했다.

“예전엔 여기까지만 들어와도 엘프들이 날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엘프라…… 간만에 보고 싶군.”

그들은 자연‘만’을 사랑하는 종족. 숲이란 자신들만의 공간에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노인은 젊은 시절 그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같은 엘프족인 친구가 없었더라면 영원토록 그들과 오해를 번복하며 지금의 꿈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기억나는군. 그래…… 그 친구…….”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밝고 명랑한 친구였다. 다른 종족들을 배척하는 외골수인 엘프들과 다르게 그 친구만큼은 모든 종족을 차별 없이 대하며 다른 엘프들에게 전쟁을 하지 말라며 말리곤 했었다.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엘퀴라즈 숲에 들어오지도 못했으리라. 같은 엘프인 그 친구의 설득 덕분에 엘퀴라즈 숲의 엘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후우. 이럴 때 그 친구 마법이 있었더라면 참 편했을 것을…….”

과거를 떠올리자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마법을 잘 다루던 마족 친구도 있었다. 자신은 검 말곤 마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늘, 때때론 마족인 그 친구가 참으로 부러웠다.

그 친구의 도움도 많이 받았었다.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제 시간 안에 엘퀴라즈 숲에 도착하지 못하여 그의 계획과 미래가 지금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졌을 것이다.

“불평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모두 떠난 친구들이거늘…….”

그 시절의 친구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 남은 친구가 얼마 전 이 숲으로 이동한 뒤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드워프였던 그 친구도 참으로 질긴 인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마지막엔 자신들이 모든 일을 시작했던 이곳에서 생을 달리한 것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몸을 눕힐 수 있을까?”

노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지금 다 죽어가는 몸이지만, 인생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일이 생겨 다시 젊음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젊음을 되찾는 건 무리려나?”

노인의 자조적인 웃음이 숲에 퍼져나가며 가지에 앉아 쉬던 새들을 날려 보냈다. 깨진 그릇이나 다름없는 이 몸에는 더 이상 그것조차 듣지 않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구할 수 없어서 실험은 해본 적 없지만…….

“그럼 다시 출발해볼까.”

울퉁불퉁한 숲길을 걷는 노인의 모습은 위태로웠지만 노인이 원하던 대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적 드문 숲길을 홀로 한참을 걷자, 노인은 그리운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가시감이나 추억 따위가 아니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숲은 자신만큼이나 많이 바뀌었고, 그 시절 숲 길 따위를 기억하기엔 노인의 머릿속엔 차고 넘칠 정도의 세월이 쌓여 있었다.

“멈춰라. 인간.”

“그래. 살기로군. 이것도 참 그리운 감각이야.”

피부가 따끔거리는 살기를 느껴본 게 얼마 만이었더라? 모든 것이 끝난 뒤로도 전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직접 선두에 나선 적은 없었다. 그 뒤론 언제나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었고, 그것에 익숙해질 무렵엔 더 이상 전쟁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살기에 노인은 젊은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아서 위협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저 다 늙은 노인일세. 엘프 양반. 무서우니 활은 좀 내려주시게나.”

“죽어가는 노인이 이런 외진 숲에 들어올 이유라도 있나? 조용히 하고 얌전히 우리들에게 따라라!”

“그건 그렇지. 이런 숲에 노인이 올 이유는 없지. 하지만 반대로 노인이니까 죽을 자리를 찾아서 올 경우도 있지 않겠나?”

“뭐!? 인간이 왜 이 숲에서 죽는단 말이냐?”

엘프의 물음에 노인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내뱉은 말에 불과했고, 본인도 딱히 그 이유에 대해서 꺼낼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죽어가는 몸이지만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싸울까?’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이미 근력도 쇠한 지 오래고, 자신의 몸을 지탱해주던 그 힘도 모두 빠져나간 지 오래니까.

‘그래도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한두 명 정도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노인은 그 생각을 하는 즉시 고개를 조그맣게 흔들었다. 싸우다 죽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지 않은가?

삶의 작은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이지 죽으러 온 게 아니다. 그렇기에 노인은 늘 그랬듯이 속으로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잠깐. 저 옷…… 혹시 신관인가?”

“알고 있나?”

“조금. 인간들 중에 남을 돕기 좋아하는 특이한 족속들이 있다고 들었었지.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다닌다 하던데…….”

“특이한 족속이라. 맞는 말이긴 하군.”

‘감사합니다.’

엘프들의 말투로 들어보건 데 작은 호의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노인은 평상복이 아닌 신복을 입고 온 것부터 신이 자신을 도운 것이라 생각했다.

“음? 아. 세계수님?”

‘세계수?’

그리운 이름이었다. 평생을 그것에 미쳐 살았었고 노인의 쌓이고 쌓인 기억의 절반 이상이 그것에 관련된 기억이었다. 그러니 반응하기 싫어도 저절로 반응하게 되었다.

‘광룡이 깨어났다더니…… 역시 세계수의 후손이 살아 있었나.’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일어난 마물들의 실종. 그리고 검은 기운, 마기(魔氣) 역시 서서히 사라지며 그 자취를 감추었다.

노인은 자신조차 하지 못한 그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존재는 세계수뿐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숲으로 조사단을 보내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군.’

가장 마기가 심하고 마물들이 준동하고 있는 숲.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강한 사람들을 뽑아 조사단을 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조사단원들에게 자신의 터부 역시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노인은 단 한 번도 엘퀴라즈 숲으로 조사단원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봐. 세계수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신다.”

“세계수가…… 고맙군. 정말로 세계수가 있었어.”

“세계수가 아니라 세계수님이라고 해라.”

“내가 더 나이가 많을 진데 굳이 높여야 하는가?”

“뭐?”

“클클. 농담일세. 세계수님께서 이 누추한 노인을 보고 싶다 하시다니. 그거 참 영광이군.”

“……아무튼 따라와라.”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숲을 거닐게 되자 노인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의 끝자락이 다시 샘솟았다.

‘그때도 이렇게 엘프들을 따라 숲길을 걸었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모두가 파란 눈을 한 하이엘프들이었다는 점뿐. 노인은 지금의 세계수가 아직 어린 게 아닐까 추측했다.

제대로 성장한 세계수라면 평범한 엘프가 아닌 하이엘프들이 자신을 맞이했을 것이고, 지금 이곳에서도 그 모습이 보일 정도로 하늘 끝까지 몸통을 뻗대고 있었을 테니까.

“자. 내게 업혀라. 이렇게 가다간 하루 종일 가도 도착 못 하겠다.”

“길이 꽤나 먼가 보군.”

느릿한 노인의 걸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엘프 한 명이 그를 업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또 한 번 젊은 시절의 자신을 상상했다.

그때는 이렇게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충분히 혼자서 가능했었는데.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앞장서며 달렸었는데. 남에게 도움을 줄지언정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는데.

‘저긴가?’

한참이나 엘프의 등에 업혀 숲을 내달리며 서서히 지쳐갈 무렵, 멀리서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나무는 노인의 기억과 달리 산처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구름 끝에 가지를 걸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역시…….’

크다는 것 외엔 별 특징을 찾아 볼 수 없는 나무. 하지만 노인은 그 누구보다 그 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몇 번이나, 아니 수백 수천 번이나 보아왔기에 그 나무만큼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계수님. 노인을 데려왔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그리고 엘프들에 의해 나무 밑동에 도착했을 때 노인은 한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소녀라고 해야 할까? 어린 아이들은 머리만 길면 모두 여자아이 같아서 정확한 성별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노인은 이 아이가 틀림없는 여자아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목소리. 외모. 그 모든 것이 예전에 만났던 그 여자의 축소판이었으니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녀는 노인이 잘 알고 있는 그 나무에 꽁꽁 묶여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엘프들의 경계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노인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인은 자신의 몸을 가득 채웠던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이 힘…… 틀림없는 세계수의 마력이다.’

지금 당장 손을 뻗어 이 힘을 손에 넣고 싶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지펴 오르며 노인이 가진 삶의 의지를 굳건하게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노인이 신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는 그때, 나무에 묶여 있던 소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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