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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마왕, 그리고 현재
한참 동안이나 눈물을 쏟아낸 데이몬은 말없이 숲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주변을 향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데이몬!”
그의 주변으로 공기가 일그러지며 세상이 어질어졌다. 세이렌은 불안한 예감에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으윽!”
세상이 뒤집혔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물을 뒤집어쓴 그림처럼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풍경이 다시 그려지며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방향감각에 세이렌이 바로 서며 주변을 살폈고,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원래 있던 곳이 아니라 전장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어! 죽어버려!”
“더러운 아인족 새끼들이 어디서!”
아인족과 인간이 싸우고 있는 전장의 한복판. 유일하게 다른 종족은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몬과 세이렌뿐이었다.
그마저도 데이몬이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세이렌은 마족, 데이몬은 인간의 모습으로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인간!”
“데이몬. 위험해!”
그들을 덮치는 아인족 전사 한 명. 그가 검으로 데이몬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내려쳤고, 세이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세이렌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어둠을 보기 직전,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볼 수 있었다.
죽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어차피 데이몬에게 구해진 목숨. 그를 위해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너는 죽지 않아. 죽는 것은 이들일 뿐…….”
세이렌의 몸통을 금방이라도 절단 낼 것처럼 떨어지던 검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그 검을 휘두른 아인족 병사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 하고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의 동료들이 데이몬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 역시 앞선 병사와 마찬가지로 잠이 들 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세이렌.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그는 세이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피를 흘리며 대지를 적시고 있는 시체들과, 방금 전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자신들을 보며 달려들려 했지만,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곤 겁을 먹은 병사들.
그 모든 것을 한눈에 담으려는 듯 데이몬은 눈을 크게 뜬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이몬. 왜 그러는 거야. 뭘 하려고 하는 거야.”
불안한 공기가 끊임없이 그녀를 감쌌다. 데이몬이 얼마 전부터 계속 입버릇처럼 말하던 ‘마지막 방법’이라는 게 그녀의 뇌리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마지막 방법이라는 게 뭘까? 왜 데이몬은 이런 전쟁터 한복판으로 이동한 걸까? 그에게 물을 용기가 없었던 그녀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지만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가 또 한 번 슬픈 표정을 지을 것 같았고, 그게 그의 마지막 얼굴이 될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깨진 그릇이라고 했었지?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고. 그래서 그 수를 줄이려고 하는 거야. 세계수가 비록 세계를 되살릴 방법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어. 지금 당장 수를 줄이지 않으면 세계수가 생각한 방법이 실현되기 전에 세계가 부서져 버려. 그리고…….”
시체들과 병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부터 검은 기운들이 흘러나오며 데이몬에게 모여들었다. 그와 가까이 있던 세이렌은 그 기운에 닿는 순간, 예전에 홀로 도시에서 혼자 지낼 때 느꼈던 고독과 괴로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곤 그에게서 떨어졌다.
“한데 모인 기운을 파괴해 세계에 고루 퍼트리는 방법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사 그릇 안의 내용물이 줄어든다 할지라도 이미 쪼개진 균열이 더 커질 뿐이겠지.”
“안 돼!”
세이렌에게 그의 설명 따윈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데이몬이 걱정될 뿐이었다.
점차 검은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기운뿐만 아니라 먼 곳에서 검은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하늘을 뒤덮은 검은 기운은 굳건히 땅을 딛고 있는 데이몬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치며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솔직히 제정신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미안해. 세이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 수 있을까?”
“싫어! 데이몬! 왜 네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건데!”
“말했잖아. 모두 우리의 잘못이라고. 우리들의 잘못…….”
그동안 웃음을 보여주지 않던 데이몬이 처음으로 웃었다. 세이렌은 본능적으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웃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아니.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그의 손이 세이렌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세이렌은 그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스했던 그의 힘. 그 힘이 서서히 몸속을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잘 자. 그리고 안녕.”
“데……이몬…….”
감겨오는 눈꺼풀에 저항하며 그의 마지막 얼굴을 담은 세이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는 슬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 * *
“…….”
“모두 봤군요.”
그녀의 기억을 읽게 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왕이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수는 절대 악(惡)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 마왕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왕은 이 세계를 위해 파괴를 저질렀다는 건가요?”
나는 기억 속 마왕이 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복잡한 이야기들이었고 지금 막 확인한터라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한줄기 강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이 세계가 불완전한 세계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불안에 사로잡혀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지금은 그나마 괜찮아졌지만.”
“하지만……!”
말을 꺼내려 했지만 목에서 걸려버렸다. 이미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모든 것을 알게 됐는데 무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도 세계를 위해 씨앗을 뿌리셨는데…… 이미 늦었던 거였나요?”
“늦었죠. 그래서 그분이 그런 짓을 저질렀던 거고.”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본 데이몬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힘을 이어 받으면서 많은 기억들이 넘어왔어요.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분이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알 수 있었죠. 그 당시 세계는 당신도 알다시피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세계수가 그것을 막기 위해 씨를 뿌리긴 했지만 붕괴를 막을 순 없었죠.”
“세계수.”
나와 어머니의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세계를 이루는 힘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세계수였죠. 그래서 그분은 인류의 숫자를 줄이고,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과거의 세계수를 없애서 그 힘을 세계에 환원시키려 했었던 거였어요.”
“…….”
화를 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분명 어머니의 죽음이 슬픈 일인 건 맞지만 마왕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물론 아인족 마을에서 쿤의 기억 속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어머니는 분명 마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이곳에 나타날 때 느꼈지. 갑자기 세상에 없던 존재가 나타났던 것…… 그가 가진 슬픔……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무슨 목적에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마왕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세계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었나 보다. 그래서 내게 빨리 결혼하라고 득달하셨던 거였나.
“잠깐. 세계는 이제 완전히 안정된 건가요?”
“글쎄요. 워낙 불안정한 세계라…… 하지만 당신이 빨리 씨를 뿌리면 그럴 일은 없겠죠?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는 있나요?”
“으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마음만 맞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요.”
씨를 뿌리기 위해선 적어도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내 주변에 그런 상대는…….
핀밖에 없구나. 그럼 나 핀이랑 결혼…….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은 괜찮긴 하지만 빨리 결혼하시길 바라요. 안 그러면 마왕님이 하셨던 것처럼 제가 똑같은 짓을 저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예…… 예!?”
“기억 속에서 봤잖아요. 그분께서 하신 말씀. 뒷일은 제게 맡기겠다고. 비록 지금은 세계가 안정됐다곤 하지만 언제 또 바뀔지 모르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으음. 어머니도 그렇고 세이렌도 그렇고 모두가 내 결혼을 바라고 있다니. 여기가 지구였으면 명절에 고향집 내려가기 싫은 상황이었을 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끝났는지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부끄럽네요. 기억 속에서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저 ‘데이몬~’ 하면서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만 보여드리다니.”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하…….”
나는 지금도 그러는 걸. 만약 이게 소설이었으면 나는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구경만 하는 구경꾼 역할이었을 거다.
“그나저나 미안한 일이 하나 더 있었네요.”
“뭔가요?”
“혹시 용사의 무기를 찾고 계시지 않나요? 이것도 당신 기억에서 읽은 거지만…….”
“아! 혹시…… 마족 용사가 가지고 있던 무기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그럼요. 당신도 오늘 봤는걸요?”
내가 오늘 봤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분명 내 기억으론 마족 용사가 가지고 있던 무기는 지팡이였고…… 오늘 내가 본 지팡이라곤…….
“아!”
“후후. 이제 아셨나요? 오늘 만난 렉슬럼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
“그게 용사의 무기였나요? 하지만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제가 벌써 거기 있던 기운을 세상에 흩뿌렸으니까요. 거의 구백 년도 더 된 일이네요.”
“아……. 뭐 미안할 것까지야…….”
어차피 용사의 무기를 회수하려 했던 이유는 그 무기를 나쁜 일에 사용할까 봐 그런 거였으니까 별문제는 안 된다. 세계의 안정을 위해 그 기운을 흩뿌리셨다니 오히려 잘 된 일 아닐까.
“숲으론 조만간 보내드릴게요. 내일 아침에 베르제에게 숲으로 가라고 한 뒤에 그 좌표를 통해 보내드릴 수 있거든요. 그나저나 진짜로 전생에 한국인이었나요? 그분의 힘을 얻으면서 기억도 일부 받긴 했지만 한국이란 꼭 소설책에 나오는 곳이라 현실감이 안 느껴지네요.”
“저는 여기가 더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데. 서로 반대네요.”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니까 당연한 거겠죠?”
오랜만에 지구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영 낯설고 기분이 이상했다. 지구라.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생을 끝내지 않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망설여지는데.
“그 분 기억에선 한국인들은 전부 군대를 다녀왔다고 하는데…… 당신도 다녀왔나요?”
“군대요? 아뇨. 저는 집에만 있어서 가질 않았어요.”
“흐음. 보통 한국인 남자들은 다들 스무 살 전후로 다녀온다고 했는데…….”
“모병제인데 굳이 군대를 갈 필요가 있나요? 정 취직이 안 되면 가는 곳이 군대인데…….”
“모병제요? 하지만 제가 알기론 한국은 징병제인 걸로 아는데?”
그녀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징병제라니. 우리나라가 독일처럼 분단국가도 아니고 왜 징병제라는 거지?
한국 군대가 모병제인 건 당연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