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94화 (1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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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마왕(5)

“저, 저는 그냥 지나가던 엘프인데요?”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는 엘프. 그가 변명을 해봤지만 인간들은 엘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 이런 전쟁터에 엘프가 있을 리가 없지. 첩자로군.”

“전쟁은 끝났습니다…….”

전쟁은 끝났다. 아인족들의 습격으로 인해 인간의 도시는 폐허가 됐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수십 년, 어쩌면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분명 이 습격은 엘프가 저지른 짓이 아니다. 그러니 엘프의 말이 옳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미 폐허가 된 도시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엘프가 첩자까지 보내겠는가? 하지만 인간들은 이미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화풀이할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아직 이야. 우리는 지지 않았어!”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부정하며 엘프에게 검을 들이미는 인간들. 세이렌은 그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아직도 홀로 상념에 빠져 있는 데이몬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어딘가에 뭉쳐 있는 것인가?”

“데이몬.”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돼. 그래서 세계가 부서져가고 있던 거였어.”

그녀가 데이몬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사이, 인간들의 공격을 피하던 엘프는 부리나케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엘프가 사라지고, 인간들도 사라졌다. 전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은 데이몬과 세이렌 두 사람뿐이었다.

“데이몬?”

세이렌이 데이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각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 표정은 데이몬이 다시 입을 여는 그 순간에도 계속 되었고, 세이렌은 그 모습 그대로 그의 표정이 다시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그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데이몬을 보며 불안한 예감을 느꼈었다. 혹시나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처음 공간에 뚫린 균열을 발견했을 때 초조해 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두려운 예감. 세상을 돌아다니며 점차 지쳐가는 모습의 그를 보며 모든 걸 포기하고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했던 예감.

그 모든 예감은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었고, 언제나 데이몬은 다시 활력을 되찾고 친근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되돌아왔었다.

“데이몬. 괜찮아?”

“…….”

표정이 차갑다. 그녀는 금세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예감이 들어맞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건만 그의 표정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살고 있던 곳은 더운 지방이었고,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눈이나 얼음이란 걸 본 적이 없었다. 책이나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차가운 물체에 대해서 실물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데이몬의 표정을 보며 눈과 얼음을 실제로 본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함께 살며 대화를 나누던 시간들은 사라지고, 데이몬 홀로 생각하는 시간만 계속해서 늘어갔다. 세이렌이 열심히 식사를 차려봤지만 그는 수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데이몬. 왜 그래. 무서워.”

“……미안. 세이렌. 혼자 있게 해줘. 생각할 게 있단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돌아오겠지. 그녀는 그를 믿었기에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전해줬던 처음의 온기와 친절함은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었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믿음이 되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조사가 필요해. 이대로는 안 돼.”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데이몬은 입을 열었다. 세이렌은 드디어 그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그가 향한 곳은 부엌이나 세이렌이 아닌 도서관이었다.

“엘프…… 엘프에 대해 알아야 해.”

그가 도서관에서 찾은 책은 모두 엘프에 관련된 서적들뿐. 마치 엘프라는 종족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는 듯이 게걸스럽게 서적을 탐닉해갔다.

세이렌은 이전에 엘프의 모습으로 변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또 그들의 상식이 어떤지를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엘프에 대해 무엇을 더 알려고 하는지 데이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또 다시 며칠을 책에 파묻혀 살던 데이몬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결과는 얻지 못했는지 짜증스럽게 책을 집어 던지며 밖으로 나갔다. 세이렌이 그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지만 데이몬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데이몬. 어디가?”

“…….”

“왜 그래.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줘. 우리는…….”

그녀는 ‘가족이잖아’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데이몬이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만 없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내가 알던 그는 어디가고 지금의 데이몬은 대체 누구인걸까?

“데이몬…….”

그 서러움에 세이렌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울먹거렸다. 데이몬은 그녀를 계속해서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곧 그 가면이 깨지며 그녀가 알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미안하구나…… 너와 정을 떼려고 했건만…… 역시 내겐 무리였어.”

“왜 그런 건데? 왜!?”

“왜냐하면…….”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한참이나 그녀를 담아두던 그는, 지금의 모습을 눈동자 속에 담아두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이 세상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

데이몬은 세이렌에게 몇 마디 말을 해주고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가 떠난 목적지는 모두 엘프들의 숲. 어느 한 곳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려워.’

그는 세이렌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따라오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의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그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계. 그러니 그 세계를 고치는 것도 내 책임이겠지. 그것이 설사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말했다. 이 세상이 불완전한 세계라고. 깨진 그릇처럼 지금 만들어진 세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담을 수 없는 곳이라고.

‘그래서 그런 이상한 게 생긴 걸까?’

그녀는 데이몬과 여행하면서 몇 번이나 발견했던 공간의 균열을 떠올렸다. 그 균열 너머로 보이던 검은 어둠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그녀의 손발을 떨리게 만들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 균열 너머의 어둠은 그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데이몬과 세이렌은 끝없이 엘프들의 숲을 찾아 헤맸다. 데이몬은 숲을 찾으면 언제나 그 숲의 엘프들에게 파란 눈의 엘프에 대해 물었고,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엘프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쩔 수 없나. 결국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욱 초조해졌고, 그와 여행하며 공간의 균열을 목격하는 일도 더욱 늘어만 갔다. 전에는 이주에 한 번씩 발견되던 균열은 이젠 하루가 멀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은 그 균열에 대해 눈치 채지 못했다. 세이렌은 꼭 데이몬과 자신만이 그 균열을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게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균열이란 평범한 사람은 절대 볼 수 없지. 동화 속 등장인물이 책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이 세계에 대해 설명할 때면 언제나 철학자처럼 말을 하는 통에 세이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말할 때마다 그는 웃으며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많은 책임이 따른단다.’라며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이젠 더는 시간이 없어.”

그가 마지막 엘프의 숲에 들리면서 한 말이다. 전에 보였던 초조함조차 사라진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엘프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린 마지막 숲은 원래 세이렌과 그가 살고 있던 마족의 도시 주변 숲. 처음의 도시를 떠난 그들이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다행히도 엘프의 숲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세이렌은 그것이 데이몬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마족의 도시를 평화롭게 만든 그의 힘이, 주변에 있는 엘프의 숲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말이다.

“푸른 눈의 엘프라…… 들은 적이 있군요.”

운명이란 참으로 장난 같다. 어째서 진즉에 이곳을 먼저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하긴, 그랬다면 그 푸른 눈의 엘프를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세이렌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늙은 엘프가 데이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저 멀리 북쪽 땅 끝에 엘퀴라즈 숲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세계수님이 자라고 있는데 그분께 선택받은 엘프만이 푸른 눈동자를 지니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세계수라…….”

데이몬이 눈을 감았다. 씁쓸하게 웃는 그의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과 같았다.

“이 기운은?”

그 순간, 그가 무언가를 느끼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세이렌은 그의 뒤를 쫓아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그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같이 가! 데이몬!”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보며 세이렌은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며 데이몬의 뒤를 따라간 세이렌은 멀뚱히 멈춰서 새싹을 내려다보고 있는 데이몬을 발견했다.

그는 작은 싹에게 다가가려다가 무언가에 막힌 듯이 잠시 멈춰 섰다.

“마법……. 싹을 보호하기 위한 그대의 조치인가?”

데이몬이 손을 내젓자 얇은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데이몬은 새싹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작은 싹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무릎까지 꿇은 데이몬. 그가 조심스럽게 새싹을 만지며 또 다시 눈을 감았다.

“……역시. 여의의 힘이 뭉쳐서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이로군.”

“데이몬…….”

마침내 그가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아직 안정되지 않은 숨을 몰아쉬며 세이렌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울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표정을 보아왔지만 그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세이렌은 그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구나. 여의여. 그대도 깨달았겠지만…… 이미 늦었어. 어째서 더 빨리 실행하지 않은 것이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양에서 세이렌은 그가 통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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