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무로 태어난 나의 일상-193화 (1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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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마왕(4)

세이렌이 예의 그 사건, 한밤중에 데이몬이 흐느끼는 것을 목격한 그 사건이 점차 일상에 파묻혀 잊힐 무렵, 그녀는 데이몬의 새로운 취미를 함께 하는 것에 의구심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데이몬은 갑작스럽게 매일 아침 도시를 산책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명상이나, 서점에서 사온 책들을 읽던 그였건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며칠 째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더 자도 되는데. 정말 괜찮겠니?”

그의 산책은 해가 막 뜰 무렵인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기에 아직 어린 세이렌이 거기에 참가하려면 무거운 눈꺼풀이란 크나큰 적을 이겨야만 했다.

“괜찮아…….”

그래도 어떻게든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밤을 새가면서 까지 새벽에 일어난 세이렌. 산책에 취미는 없었지만 그녀는 새벽에 나간 데이몬이 훌쩍 떠날까봐 걱정되었다.

‘그때 말한 이름들…… 가족일지도 몰라.’

마족과 다르게 인간들은 가족에 대한 마음이 끈끈하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 날 밤에도 몰래 숨죽여 흐느끼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던 걸지도 모른다.

세이렌에게 있어서 이제 데이몬은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그녀는 자신이 데이몬에게 영향을 받아 인간처럼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받아들였다.

“그럼 가볼까.”

산책은 단조로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몇 몇 마족들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계속해서 도시 외곽을 따라 걷는 것이 전부였다.

예전이라면 이런 행동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도시라곤 하지만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마족들이 곳곳에 존재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자라는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는 세이렌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이젠 데이몬이 있다.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시가 다르게 보였다. 위험하고 끔찍했던 도시는 이젠 자신이 살아가는 소중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 힘겹게 지내던 뒷골목은 그저 청소가 제대로 안 된 응달처럼 보였고, 무서웠던 마족의 어른들도 친근한 이웃집의 아저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더 이상 도시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데이몬과 함께 산책을 하며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로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사그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데이몬이 나타난 이후론 더 이상 마족들이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역시. 이상하군.”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때때로 홀로 중얼거리는 데이몬. 그는 가끔씩 산책을 하며 허공을 만지듯이 손을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

세이렌은 그럴 때면 그의 손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있지만 그가 자신과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산책이 한 달이 넘게 유지될 무렵, 세이렌은 데이몬과 함께 이상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역시…….”

그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데이몬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 때도 세이렌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허공에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죽음의 함정.

데이몬과 산책하면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외곽에 그것이 하나 더 존재하고 있었다.

“데이몬. 이게 뭐야?”

“차원이 깨진 거란다. 아주 위험한 현상이지…….”

“차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세이렌은 데이몬에게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데이몬은 언제나 침착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경계심 높은 마족들도 그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고 세이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데이몬은 그 어떤 마족들보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이몬…….”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니?”

떨리는 세이렌의 목소리에 데이몬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표정 역시도 완전히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고, 무언가 시름을 한껏 안은 듯한 표정이었다.

“우선 빨리 이걸 없애야겠구나. 더 커지기 전에.”

데이몬이 구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서 데이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따스한 빛의 힘이 흘러나와 구멍에 들어가자, 구멍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자꾸나. 오늘 산책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응.”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 동안 세이렌은 힐끗거리며 데이몬을 바라봤지만 그는 그런 시선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에 서렸던 근심과 걱정은 며칠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 * *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몬은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것 같구나. 떠나야겠어.”

“왜!?”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왜 떠나려는지 그에게 물었다. 데이몬은 씁쓸한 웃음만을 지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선 설명해주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이곳에만 머물기엔…… 더 이상 침묵하고만 있어선 안 될 것 같아.”

“설마 그때 그거 때문이야? 그 이상한 구멍?”

그녀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차원의 구멍이라는 것을 본 이후로 그가 매일 같이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생각이 맞았는지 데이몬도 딱히 말을 꺼내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이제 안전할 거야. 이곳만큼은 그동안 돌아다니며 균형을 맞춰놨으니까. 더 이상 이곳에선 사람들이 예전처럼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분노하지 않겠지.”

“그런 말하지 마……. 나도 같이 갈 거야.”

“미안하구나. 여행은 위험해. 너와 함께 가기엔……. 윽!”

데이몬은 말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달려든 세이렌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안기듯이 몸을 던진 세이렌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걱정 되서 그런 것일까.

“나도…… 나도 갈 거야…….”

그의 품에서 울고 있는 세이렌.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데이몬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살던 곳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 * *

여행은 데이몬의 걱정과 다르게 순조로웠다.

처음엔 많은 곳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기 일쑤였다. 전쟁으로 인해 같은 종족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족인 그들을 다른 종족이 쉽게 받아줄리 없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데이몬은 신기하게도 그들과 같은 종족으로 변하였고, 때때로 그 신기한 힘으로 세이렌까지 변화시켰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착한 친구로군.”

그리고 그들 사이에 파고들어 마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친절한 태도로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또 산책이야?”

여행의 목적을 세이렌은 처음엔 몰랐지만 점차 그 목적을 알 게 되었다. 데이몬은 언제나 들린 도시에서 그 종족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면 도시를 산책했다. 그리고 마족의 도시에서 했던 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힘으로 허공을 쓰다듬었다.

세이렌은 그것이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는 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데이몬. 그 균열이 생기면 안 되는거야?”

“안 돼. 이 세상 사람들이 다들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것도 다 그 균열 때문인걸.”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이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균열이 뭐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는 전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일까?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게 있지. 주변 환경이 나빠질수록 사람들의 도덕적 관념이 점차 희석되어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쉽게 선택한다는 이론이야.”

“그게 왜? 무슨 상관인데?”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며 세상이 파괴되려 하고 있어. 그러니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안함에 빠지게 된 거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이 불안해지니까 자연스럽게 타인을 증오하고 분노에 쉽게 빠지게 된 거고. 쉽게 말하자면 집이 무너져 가면서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살기 위해 죽고 죽이게 된 거랄까. 이 세계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기엔 너무 약해져 있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의 말은 그녀에게 너무 어려웠기에 세이렌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추가적으로 더 설명하는 대신에 그녀를 보며 웃어주었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다들 싸움을 안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정말?”

데이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가 들린 도시에서, 그가 산책을 한 달 정도 하고 나면 다들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며 증오가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그렇게 도시 하나의 증오가 꺼지면 다른 도시로 가고, 그 다른 도시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를 수 십 차례. 그동안 데이몬과 샤이렌은 엘프가 되기도, 마족이 되기도, 드워프가 되기도, 그리고 인간이 되기도 하며 계속해서 여행을 지속했다.

“데이몬…….”

그러나 그 방법은 옳지 않았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이 들렀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면서 데이몬은 점차 좌절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들이 있던 도시들은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결국 다시 증오에 사로잡혀 전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했구나.”

얼마 전에 들린 인간들의 도시. 그곳이 전쟁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인간으로 변해 다시 그곳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그들은 평야에 널린 시체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역시 이 방법으론 해결할 수 없어. 이미 깨져버린 그릇을 고치려면 그 힘이 필요해. 하지만…… 이곳에 힘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다른 이유는 없는 걸까?”

홀로 중얼거리는 데이몬의 손을 꼭 잡으며 세이렌은 불안에 떨었다. 그의 얼굴에 점점 더 어둠이 깔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프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세이렌이 고개를 돌렸을 때, 폐허가 된 전쟁터 사이에서 한 명의 엘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엘프는 그들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아직 살아남은 인간 병사들이 그를 발견하곤 악에 받쳐 소리쳤다.

“엘프마저 이제 우리들의 땅에 침범하려 하는가!”

그 순간, 세이렌은 볼 수 있었다.

그 병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데이몬이 엘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을.

“그럴 리가…… 설마…… 아아…… 그렇군…… 그 힘이 이 세상을 만든 거였어…….”

그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경악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의(如意).”

* * *

‘잠깐. 저 엘프는!?’

기억 속의 데이몬이 놀란 것처럼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라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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