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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마왕(3)
소녀, 세이렌이 인간, 데이몬과 함께 산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세이렌은 데이몬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데이몬 씨.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네요. 로멘 씨.”
우선 그는 붙임성이 좋았다. 도시 외곽에 집을 차렸다곤 하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를 경계하는 마족들은 거의 없었다.
몇 몇 마족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그를 첩자나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려 했지만,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사람들은 의심을 풀고 그를 친근한 이웃집 사람처럼 대하게 되었다.
“신기해.”
그리고 그는 적응력이 빨랐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살아온 마족인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던 도시의 비밀부터 시작해,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와 싸웠고 누가 누구와 무슨 관계인지.
마치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인처럼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이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땐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족이었고 그 누구도 그 정체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세이렌이 빤히 데이몬을 바라보고 있자,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데이몬이 세이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세이렌은 전쟁을 하고 있다는 현실도, 그동안 겪었던 불행도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봐.”
그때였다. 한 무리의 마족 패거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울타리처럼 집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며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혹시 여기서 사는 거야? 여기는 우리 창고라고.”
‘패거리!’
세이렌은 이들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데려다 팔려 했던, 남자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버린 두 명의 마족과 같은 그룹의 마족들이었다. 사람을 파는 것은 두 사람이서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당연히 동료가 있었을 것이다.
“잠깐. 얼마 전에 공급책 녀석들이 사라졌던데…… 혹시 너희들이 묻은 거냐?”
“하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이. 그럼 이 집에 원래 살던 녀석들은 어디 있는 건데? 응? 형씨. 대답해 봐.”
명백한 시비. 패거리들이 세이렌과 데이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탐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저 애는 꽤 반반한데? 돈 좀 벌겠어?”
“남자 쪽도 생각보다 반반해 보이지 않아?”
“킥. 취향하고는…….”
그들에게 동료에 대한 복수심 따윈 없었다. 그저 개가 고기를 보고 달려드는 것처럼,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자신들을 잡아다 팔 생각밖에 없었다.
“세이렌. 안으로 들어가 있으렴.”
“하지만…….”
“어이! 누구 마음대로!”
“어서!”
패거리들이 다가오기 직전, 데이몬의 고함에 세이렌이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를 뒤쫓던 패거리들이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통에 그녀는 오랜만에 공포심을 느끼며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아 귀를 막았다.
‘데이몬…….’
이제 겨우 만난 행복인데, 그와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더 큰 행복은 바라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행복이 깨지려 하는 것일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려 했건만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어둠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크아악!”
그리고 그 순간, 세이렌은 창 너머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데이몬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그 빛이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세이렌이 구석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패거리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은 결코 신사적으로 노크를 하지 않으니까.
“괜찮니!?”
“괜찮아!?”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물었다. 그 우연한 상황이 웃기고 신기해서 두 사람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가 문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 패거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말로 해서 순순히 돌아갈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쫓아낸 것일까?
“걱정하지 마.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니까.”
자신을 달래주듯이 말하는 데이몬을 보며 세이렌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불안함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데이몬의 표정에 살짝 서린 어두운 기운을 발견한 것이다.
“혹시 죽인 거야?”
“…….”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침묵이 긍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아무 말하지 않는 데이몬을 보며 세이렌은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그녀는 데이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데이몬은 강해.’
그는 강하다. 도시에서도 싸움은 자주 벌어진다. 마족이기에, 그 어떤 종족보다 마법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싸움은 언제나 크게 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이몬은 그렇지 않았다.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다. 그런 그가 마족들을 상대로 아무런 소란 없이 싸움을 종결지었다. 세이렌은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데이몬처럼 싸움을 쉽게 끝내려면 차원이 다른 강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점심 준비를 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그녀의 걱정과 다르게 데이몬은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세이렌도 불안을 마음속에 꾹꾹 담아둔 채 그의 행동에 맞춰주었다.
‘데이몬은 강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강자들은 언제나 그렇다. 약자와 다르게 걱정 따윈 하지 않는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세이렌이 보아온 그 어떤 마족보다 강한 데이몬이니 그를 따르면 되지 않을까. 그의 얼굴에 잠시 비췄던 어둠은 그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닐까.
강한 자는 마음도 강한 법이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세이렌은 불안한 기분을 훨훨 털어내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 * *
“저기. 데이몬은 왜 아무것도 안 해?”
점심식사가 끝나고 세이렌이 설거지를 준비하는 그에게 물었다. 아직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불안이 그녀로 하여금 데이몬에게 말을 걸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들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강자와 데이몬의 행동에는 괴리감이 심했고, 그 괴리감은 어쩌면 데이몬이 어디론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심어주었다.
“지금 설거지 하고 있는데? 식사도 같이 만들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데이몬은 강하잖아. 강하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해?”
“그게 무슨 뜻이야?”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데이몬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마족의 생활에 완전히 동화되긴 했지만 세이렌이 가진 마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까진 흉내 내지 못했다.
“강한 사람들은 다들 떠나. 전쟁터에 가서 싸워.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실험해 보려고 해. 강한 사람들은 다들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데 데이몬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
강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하려 한다. 그 누구도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하지만, 강자들은 오히려 전쟁터를 선호한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하며 그렇게 세상을 바꾼 이들은 영웅이라 불린다.
“강자라…… 세이렌이 보기엔 내가 강해 보이니?”
세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라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그 모습에 데이몬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세이렌을 불안하게 했던 오늘 낮의 웃음이었다.
“강한 힘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설사 바꿀 수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피해를 보기 마련이지.”
“아니야. 강한 힘만 있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걸.”
“물론 그렇겠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힘에 의해 끝난 전쟁은 결국 다시 전쟁을 불러오게 마련이란다.”
설거지를 하며 데이몬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의 말은 세이렌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이야기였다.
“진정으로 강한 힘은 절대로 움직여선 안 돼.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듯이, 강한 자가 움직이면 세상이 요동치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이 결국엔 바뀌어 버려. 그렇기에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세상을 돕는 거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강하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힘으로 인해 바뀐 결과는 그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아주 많아. 우리처럼…….”
“우리?”
설거지를 끝마친 데이몬이 의자에 앉아 세이렌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빛은 투명하고 눈부셔서 세이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 말았다.
“힘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아. 편하긴 하지만 결국 그 힘에 적응돼 버리거든. 그리고 남들과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모든 것을 바꾸려하지.”
“……그럼 전쟁 말고 평범하게 쓰는 건? 설거지도 마법으로 할 수 있다고 들었어. 청소도, 집수리도 전부 마법으로 가능한걸.”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는 거야. 우리에겐 몸이 있잖아? 손이 있고 발이 있는데 마법에 의존할 필요는 없지. 익숙함이란 아주 무서운 일이거든. 한 번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설거지를 하며 손이 차갑다는 느낌도, 그 추운 손을 난로 옆에서 녹이는 것도, 집안일을 끝마치고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한가함을 즐기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정상적이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거거든.”
“마법을 쓰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거야?”
“응. 마법이란 원래…….”
데이몬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곧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세이렌에게 충고했다.
“아니야. 네겐 마법이 익숙할 테니까. 자연스러운 거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두렴. 마법은 자주 사용해선 안 돼. 그런 힘에 익숙해지지 마렴.”
“으응…….”
세이렌은 아무 반발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데이몬은 강하니까, 데이몬 말이 맞을 거야. 어차피 나는 마법도 못 쓰는걸.’
* * *
강한 사람의 말을 듣는다. 그것은 마족으로서 본능적인 행동이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러나 세이렌은 어느 날 저녁, 데이몬이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이 다가오는 깊은 밤. 데이몬과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세이렌은 흐느끼는 소리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데이몬을 볼 수 있었다.
“시은아…… 예미야…… 세연아…….”
사람의 이름일까? 처음 듣는 이상한 이름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슬픔만은 세이렌도 느낄 수 있었다.
‘울고 있을까.’
자는 척하며 몰래 실눈을 떠봤지만 창밖을 보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세이렌은 데이몬이 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하다. 강한 자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우는 것일까?
강한 사람은 언제나 행복한 게 아닌 걸까?
‘어쩌면 데이몬은 강하지 않을지도…….’
그렇게 세이렌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