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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마왕(2)
‘인간일까?’
갑자기 등장한 남자. 소녀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천천히 남자를 관찰했다.
마족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색인 검은색의 머리카락. 하지만 마족은 아니었다. 그에겐 마족에게 중요한 뿔과 꼬리가 없었다.
‘날개도 없어.’
기절한 마족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다. 마족의 날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체내로 숨기는 방식이라, 기절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봤을 때, 소녀는 이 남자가 의심의 여지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보통의 마족이라면 남자를, 인간을 죽였을 것이다. 세상은 전쟁의 폭풍에 휘말려 있었고 모든 종족은 서로를 증오하고 칼을 들이밀며 죽고 죽이는 짓이 멈추지 않았다.
또는 평화를 갈망하는, 생명을 존중하는 소수의 마족이라면 남자를 치료해줬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하다 할지라도 그 안엔 과거를 갈망하며 평화를 원하는 이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
그러나 소녀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기에, 그저 남자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비록 남자가 나타나며 집안을 가득 채웠던 빛이 따듯했고 소녀의 몸을 치료해주긴 했지만 지친 마음까지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삶을 유지할 힘도, 스스로 죽을 의지도 꺾여 버린 소녀는 그저 숨을 쉬고만 있을 뿐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으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루가 흘러 소녀가 건강해진 몸으로 최초의 배고픔을 느낄 무렵, 쓰러져 있던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
그는 한참이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피로한 것일까? 피로라고 하기에는 눈을 감은 남자는 무언가를 느끼려 하는 것 같았다.
“■, ■■■■…….
그리고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 *
‘저 말은!’
세이렌의 기억을 읽고 있던 위그드라실은 남자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소녀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남자의 말을 틀림없는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의 한마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용. 대체 왜…….’
「당신도 들었군요.」
그 때, 위그드라실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위그드라실에게 말을 건 것이다.
「혹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저도 이젠 이해할 수 있지만…… 무슨 연유에서 저 말을 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네요.」
‘아뇨. 저도 잘…… 저 말 뜻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네요.’
「역시…… 그럼 남은 기억들을 계속 살펴봐 주세요.」
* * *
“아아…….”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괴로운 신음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가 넘게 기절해 있던 사람치고는 멀쩡하게 일어섰고, 그는 곧 소녀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소녀는 그저 쭈그려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따뜻해.’
그리고 소녀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느꼈던 따스한 빛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삶의 희망도, 죽음도 포기한 소녀였지만 그 감촉만큼은 다시 느끼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렇군. 이런 식으로 말하는구나. 이제 내 말 알아듣겠니?”
방금 전까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던 남자. 하지만 이제는 소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마족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말을 못 하니?”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는 소녀. 방금 전 자신의 머릿속을 비춰주던 환한 빛의 여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기에 소녀는 그 기분을 계속 느끼기 위해 여운의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여운이 남아있지 않자 소녀는 그제야 조용히 대답했다. 남자는 안심이 된 듯 씁쓸하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너희 집이니?”
남자의 물음에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다. 고아인 그녀에게 집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을 팔아먹으려던 사람들의 거처일 뿐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엉망이 된 집을 보았다. 안 그래도 창고 같은 집 안이 폐허인 것마냥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엉망이군.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러야겠으니…… 조금 손을 봐야겠어.”
집 안을 뒤지는 남자.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한참을 돌아다니던 남자는 찾는 물건이 없는지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안 돼…….’
소녀는 남자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이곳은 마족의 도시. 인간이 밖으로 나갔다간 순식간에 살해당할 수 있었다.
좋은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그가 사라지면 아까 전 그 빛을 다시는 보고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소녀에게 있어서 그 빛은 생전 처음으로 느껴본 따스하고 부드러운 행복과도 같았다.
“나가면 안 돼…….”
“응? 왜 그러니?”
남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소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속셈이 무엇이든지 걱정해 주는 마음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잠깐 실례. 미안하구나. 조금만 볼 테니 용서해 다오.”
다시 한 번 남자의 손에서 빛이 나오며 소녀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빛이 자신에게 들어온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했다.
“……미안하구나. 좋지 않은 기억까지 보게 돼서.”
그리고 소녀는 그 빛 이상으로 따스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가 소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왜……?”
지금까지 자신을 껴안아 준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빛으로 인해 혈색도 돌아오고 몸도 건강해졌지만, 소녀는 기본적으로 아주 더러웠다. 때때로 시궁창으로 도망쳐 몸을 숨길 때도 있었고, 쓰레기를 끌어 모아 이불 대신 사용한 적도 많았다.
소녀를 데리고 온 사람들 역시 그녀를 팔기 전에 씻겨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코를 찌르는 그 냄새는 아직도 소녀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잘 버텼구나. 열심히 살아왔어. 그래. 훌륭해.”
자신의 등을 두드려 주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소녀는 마음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남자가 만든 빛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자. 그럼 살 집을 개선해야겠지. 그러려면 도구도 필요하고. 네가 왜 걱정했는지 알 것 같구나.”
“안 돼. 나가면…….”
소녀가 남자를 말리려 했지만, 남자는 벌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존재하는 법. 소녀는 문밖에 있는 몇몇의 마족을 보며 남자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함께 가지 않겠니? 네 기억을 보긴 했지만 역시 혼자는 좀 무섭구나.”
역광이 비춰져 집안에선 남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막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온 그 순간, 소녀는 남자의 모습을 그제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어떠니? 이 모습이라면 괜찮겠지? 마족의 모습을 하는 건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구나.”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커다란 날개. 위엄 있게 솟아 있는 뿔.
검은 색 눈동자는 석양보다 짙고 붉은 눈동자로 변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소녀는 지금까지 마족의 눈동자를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들의 눈동자를 볼 때면, 심지어 자신의 눈동자조차 피처럼 붉고 잔혹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자. 어서.”
남자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줬다는 사실에 소녀는 망설였지만, 등을 두드려주던 느낌을 생각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 * *
남자는 신기했다. 종족이 바뀐 것도 신기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 이상했던 옷차림은 어느새 다른 마족들과 같은 옷차림으로 바뀐 것도 신기했다.
분명 마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남자였지만 태어날 때부터 마족이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 익숙해져 있었고, 분명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었지만 돈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똑똑히 보았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남자의 힘을.
‘부러워.’
그 모습을 보고 소녀는 돌멩이가 부러웠다. 소녀는 언제나 자신을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흔하고 가치 없는 존재라 생각했었다.
그런 돌멩이조차 황금으로 바꿔버리는 힘. 그 힘은 분명 그가 만들어내던 빛이 가진 힘이었다.
이름 모를 남자의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그가 돌멩이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황금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소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불안했다. 지금이야 이곳에 대해 확실히 모르기에 자신을 곁에 두고 있지만 그는 익숙해지는데 빨랐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소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곁에 남아 있고 싶다. 자신을 황금으로…….
“그런데 이름이 뭐니?”
소녀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내에서 사온 도구들로 집을 수리하던 남자가 이름을 물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돌멩이도 황금으로 만들고, 죽어가던 자신조차 되살린 그의 힘이라면 이런 집 정도는 순식간에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왜 굳이 도구를 사와서 직접 손으로 수리하는 걸까?
소녀가 알고 있는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고, 남자의 힘 역시 자신이 본 적 없는 엄청난 마법이라 생각했다.
“없어……요.”
습관적으로 반말을 하려던 소녀는 혹시나 남자의 기분이 상해서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말을 높였다. 남자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소녀가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안. 역시 없구나. 흐음. 그럼 혹시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되겠니?”
“왜요? 왜 저 같은 녀석을…….”
기대하는 마음이 클수록 실망하는 마음도 큰 법이다. 소녀는 그것을 어린나이에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녀를 잘 달래주며 말했다.
“괜찮아.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너와 같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내 일이었거든. 그러니 걱정하지 마렴. 내가 널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절대로……’라며 남자가 뒷말을 흐렸다. 소녀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선 소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이렌. 세이렌이라는 이름은 어떠니? 목소리가 예쁘니까 세이렌이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이름이든 다 좋아요.”
처음으로 소녀가 웃었다. 꺼져가는 전등처럼 빈약한 미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자도, 소녀도 기뻐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뭔가요?”
“내 이름? 으음…… 그러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데이몬이 좋겠구나.”
“데이몬?”
소녀는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몬이란 이름은 가축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조류인 그 가축은 빛에 민감해서 아침 해가 뜨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매일 같이 알을 낳기에 식량으로도 쓸 수 있었고 그 고기도 먹을 수 있는 효율적인 가축이었다.
“그래. 데이몬. 원래 세계에선 다른 이름이었지만. 이름도 여러 개였어.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이곳에 없는 가축 이름으로 부르곤 했었지.”
“그 이름은 뭔데요?”
소녀가 물었다.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닭. 이상한 이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