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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마왕(1)
“제가 세계수인 건 어떻게 아셨죠?”
그녀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걸었던 몇 몇 이야기들은 나를 모르고선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물론 나에 대해 모른다 할지라도 그런 말들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추측은 지금 한 이야기로 인해 모두 깨져 버렸다.
“미안해요. 당신이 기절했을 때 기억을 조금 읽어버렸어요. 당신에 대해 궁금해져서요. 분명 베르제만 데리고 오려고 그 아이에게 심어두었던 기운을 쫓았는데, 가까이서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데려왔는데…… 그 느낌이 제 기운과 너무 비슷해서 기억을 읽어봤어요.”
“기억을 읽는다니…… 마법인가요?”
“그런 마법은 없어요. 이미 답을 알고 계시지 않나요?”
기억을 읽는 마법.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겪어왔던 현상.
비록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었었지만, 이번만큼은 반대로 나의 기억을 읽혔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성립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세이렌은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읽기 위해선 세계수의 마력이 필요한데, 당신에게선 전혀 그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아. 깜빡했네요. 너무 오랫동안 감춰온 터라……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그녀가 눈을 감았다. 마치 옷을 벗는 것처럼 그녀의 몸에서 새로운 마력이 느껴졌다.
아니, 이게 마력일까?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힘이었다. 이세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력과 전혀 달랐다.
나의, 세계수의 마력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마력.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힘.
그런 것과 동시에 그리운 힘. 이 느낌을 언제 느껴봤었지?
‘아! 마기!’
마기(魔氣)에 대해 안지 얼마 안 됐을 때, 숲에서 검은 짐승들을 정화시킬 때 느꼈던 그 감정.
그녀의 힘은 세계수의 마력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마기와도 닮아 있었다.
“어때요? 이제 좀 느껴지시나요?”
“그 힘은…… 대체 뭐죠?”
당장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힘을 껴안고 싶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물을 갈구하듯이,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타들어가는 강렬한 갈증을 호소했다.
“원래 당신의 힘과 하나였던 힘. 그리고 마왕님이 세계수를 파괴하려 했던 이유…….”
“마왕님……?”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르제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녀가 마왕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왕이 세계수를 파괴하려 했었다고?
마왕은 단순히 인류를 멸망시키려 했던 게 아니었다는 거야? 인류가 목적이 아니라, 세계수가 목적이었다고 말해주는 거야?
‘그러고 보니…….’
과거 벨룸의 기억에서도,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에서도 마왕의 행보는 모두 엘퀴라즈 숲,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인류 따윈 그저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며 처리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길을 걷는 행인이 개미를 신경 쓰지 않듯이, 그저 마왕에게 밟혀죽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거야?
“표정이 심란하네요. 무슨 생각하는지 다 드러나고. 혹시 그런 이야기 자주 듣지 않아요? 표정 관리 좀 하라는 이야기?”
“윽…… 가끔 듣긴 하는데…….”
그녀가 꺄르르 웃었다. 아이들을 돌보며 어른스러운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꼭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놀랐어요. 이 힘을 받게 된 후부터, 지구라는 곳에 대해 쭉 궁금했었거든요.”
“역시…… 지구에 대해 알고 계시네요.”
“가본 적은 없지만, 기억으로는 알고 있죠. 당신이 살던 곳, 한국이죠? 당신 기억 속에서 봤어요. 모든 기억을 다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구에 대해 알고 있는 세이렌. 하지만 나의 기억을 읽기 전부터, 그녀는 지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구에 대해 ‘기억’으로만 알고 있다고 하였다.
“당신은 지구에서 살던 사람인가요? 저처럼 이곳에 환생한 건가요?”
“아뇨.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방금 말했잖아요? 기억으로는 알고 있다고.”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진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억으로만 지구에 대해 알고 있는지. 마왕이 세계수만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역시.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아요. 모든 게 궁금하죠?”
“말해주세요. 어떻게…….”
“말이란 정확하지 않아요. 아무리 제가 알려드리려 해봤자, 말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죠. 정확한 상대의 감정이라거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라거나…… 말이란 뛰어난 전달 수단이긴 하지만 결국 말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죠.”
“그게 뭐죠?”
세이렌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내게 말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이럴 때 쓰는 말 아닌가요?”
“백문이 불여일견…….”
이 역시 지구에만 있던 속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마 제 기억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당신에게 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정말로 가능할까? 내가 기억을 읽을 수 있었던 상대들은 전부 세계수의 마력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상대들이었는데?
그녀가 나와 비슷한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수의 마력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내가 그녀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력에 내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고민은 그만. 직접 부딪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나를 향해 외치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였다. 내 정신이 벌써 그녀의 기억 속 어느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나고 있던 것이다.
‘이곳이…… 그녀의 기억…….’
순간적으로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
고아원을 처음 세웠을 때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죽었으면…….」
아직 어린 모습의 그녀가 죽음을 기도하고 있던 순간.
나는 그곳에서부터 그녀의 기억과 동화되어 모든 일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 * *
‘죽었으면…….’
뒷골목의 쓰레기들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전혀 배고프지 않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소녀는, 이대로 또다시 배고픔이 느껴지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끼가 낀 벽에 기댄 채 소녀는 몸에서 힘을 뺐다. 어차피 힘을 주고 싶어도 더 이상 줄 힘도 없었고, 밖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약해빠진 마족으로서 소녀의 목숨은 행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 약한 자는 약한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세계.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을 수 있다면…….’
남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남들에 의해 인생이 좌지우지 되던 삶이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의 얼굴 따윈 알지 못했고 다른 마족들의 명령을 들으며 몸을 굴렸고 몸조차 망가진 지금 그들에게조차 버림 받아 하루하루를 굶주림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
소녀가 깨진 유리조각을 들었다. 날카로운 절단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고통보다는 ‘차갑다’라는 느낌이 훨씬 더 와 닿았다.
그리고 소녀가 유리조각을 목에 가져다 대는 순간, 누군가의 손짓에 의해 그것을 힘없이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뭐해?”
“아니, 거지가 자살하려고 해서.”
그저 지나가는 행인들이었다. 소녀는 그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다 할지라도, 스스로 죽겠다는 결의는 쉽게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실패를 했으니 다음에 다시 죽고자 결심하기 까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들이 베푼 작은 호의가 소녀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작은 씨를 싹틔웠으니까.
“여자아이잖아?”
“이봐. 부모님은 없어? 머물 곳은?”
말할 기운조차 없었기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행인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처음 소녀를 구해주었던 행인이 소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우리 집에 데려가도 되겠군?”
“빨리 가자고. 어서.”
“…….”
두 사람이 자신을 안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무렵, 소녀는 이들의 호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가 겪은 호의란 결코 아무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호의엔 언제나 대가가 딸려왔다. 그리고 이들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지…….’
이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굶주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는 아무 저항 없이 그들이 데리고 가는 곳까지 조용히 있었다.
“후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번화가와 동떨어진 도시 외곽의 작은 집이었다. 남자 둘이 살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 허름한 집. 전쟁이 한창이거늘, 인적이 드문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소녀는 의아했다.
“자. 빨리 시작하자고.”
“얼마에 팔 수 있을까?”
‘아아…….’
몇 번이나 들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고. 노리개로 팔리는 경우도 있고, 마법사들의 생체실험을 위해 실험용으로 팔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소녀 역시 그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고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팔려가지 않았을 뿐 그 소문이 진실이라 믿고 있었다.
“일단 옷부터 벗기자고. 좀 씻어야 팔릴 것 아니야.”
“그것보단 일단…….”
자신의 자살을 말렸던 행인 남자. 소녀는 그와 같은 눈빛을 몇 번이고 본 적 있었다.
자신과 같은 고아들을 상대로 행해지는 지독한 행위. 자신만은 당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추잡한 짓거리.
조그맣게 피었던 마지막 희망이 갈갈이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어!?”
“뭐, 뭐야!?”
그 순간, 갑자기 집 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녀는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그 일그러짐을 따라 두 사람의 신형이 산산조각 나며 사라지는 것을.
“…….”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기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그러진 공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소녀 역시 그 빛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소녀는 기운 없던 신체에 활력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바짝 말라 장작개비처럼 보였던 팔에 살집이 붙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체력이 회복되고, 갈라진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비로운 빛이다. 대체 이 빛은 무엇일까?
도망칠 체력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소녀는, 차라리 죽을 거라면 이 빛에 의해 다른 두 사람처럼 죽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게 공간의 일그러짐은 소녀를 집어삼키기 직전에 사라졌고, 집 안을 가득 채웠던 빛 무리는 한데 모이기 시작하더니 형상을 만들었다.
한데 모인 빛무리에서 빛이 사라지자, 한 명의 인간이 그곳에 나타났다. 정신을 잃었는지 기절한 그를 보며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