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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마족들의 고아원(2)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한글…….”
나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어쩌면 나 말고 또 다른 지구인이 이곳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르제의 어머니가 나와 같은 지구인인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한글을 간판에 적어둔 게 아닐까?
“역시 알아보시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오신 거죠? 저와 같은 지구, 한국인이었나요? 왜 굳이 알아볼 사람도 없는데 한국어를 적어두신 거죠? 혹시 나와 같은 지구인들을 찾기 위해?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우선 해결할 일부터 해결하고 나서 이야기해요. 이제 곧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졌으니까. 아이들을 굶주리게 할 순 없잖아요?”
내가 묻기도 전에 내 마음을 알아챈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베르제의 손을 이끌고 거리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정말 알려주시는 거죠? 당신은…….”
“너무 보채지 마세요. 그런 남자는 별로 인기 없답니다.”
“으윽.”
뭔가 가슴이 찔린다. 인기 없는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가슴이 찔린다.
어쨌든 우선 해결할 일을 해결하고 나서 알려준다고 했으니 그녀를 믿어보자.
“여기가 마족의 도시…….”
마족들의 도시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그냥 머리가 검고 눈이 붉은, 그리고 뿔이 달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불과했다.
몇몇 마족들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거리를 걷는 자들도 있었다.
무슨 차이일까? 마족이 아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르제. 정말로 거기에 넘겨준 거야?”
“네. 전에 우연히 들었는데 용의 비늘이 필요하다고 해서…….”
“흐음. 그럼 빨리 가야겠네. 실험용으로 써버리기 전에.”
베르제 어머니의 등 쪽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한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베르제가 펼쳤던 박쥐 같은 날개가 아닌, 천사와 같은 깃털 달린 날개였다.
타락천사가 날개를 가진다면 이런 날개일까. 검은색의 날개가 내 눈엔 아름다워 보였다.
“자. 이리와. 거기, 그쪽도 이리 오세요.”
베르제를 품에 안은 그녀가 내게 손짓했다. 그녀의 품은 일인승이라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에, 나는 어디에 매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끄응. 그것보다 오늘 처음 본 사인데 매달려서 가는 건 좀…….
“저기 베르제 어머님…….”
“세이렌이에요.”
“예?”
“제 이름이요. 세이렌이라고 불러주세요.”
“아하. 넵. 세이렌 님. 저기 제가 매달릴 곳이 없는데요.”
“푸훗. 설마 지금 정신이 어른이라고 몸도 어른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아이 두 명 정도는 한 팔에 한 명씩 안아줄 수 있다구요.”
“끄응…….”
그게 더 창피한데. 더 이상 시간 끌기도 뭣하고, 무엇보다 빨리 일을 마치고 듣고 싶은 것이 있기에 나는 그녀의 품에 순순히 안기기로 결심했다.
“그럼. 도시 끝에 있으니까 빨리 날아가죠.”
갑자기 느껴진 압력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기에 몇몇 마족들이 그녀를 보고 손으로 경례를 표했다. 그녀 역시 거기에 화답하려고 했지만, 양 손에 우리를 안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늘에서 인사할 땐 마족들은 경례를 하는군. 재미있는 사실이다.
“저기, 근데 마법으로 가면 편하지 않나요?”
분명 베르제 어머님, 아니 세이렌은 마법으로 나와 베르제를 데리고 왔다. 그러니 순간이동하는 마법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이용해 도시 끝으로 가면 훨씬 더 편하지 않을까?
“마법이란 편리하긴 하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되죠. 이렇게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해결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힘이란 자주 사용하면…… 결국엔 거기에 대한 감정이 무뎌져 버리니까요.”
그녀가 잠시 내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친근한 미소였다.
“그리고 이곳엔 처음 오시는 거 아닌가요? 저희 마족이 사는 도시를 구경시켜 드리고 싶었거든요. 한 번 아래를 보세요.”
그녀 말대로 나는 이곳에 처음 오는 거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복잡하다. 그런 머릿속을 날려버리기 위해 그녀의 말대로 아래로 시선을 돌려 도시의 경관을 구경했다.
‘멋지네.’
현대의 도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높은 고층의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전에 갔던 도시에서도 가로등을 본 기억은 나지만, 그건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로등이었으니 이들의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자동차?’
심지어 구식 자동차와 같은 물건이 길 위를 가로지르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현대의 자동차와 같이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고, 마차를 개량해 말없이 홀로 다닐 수 있는 수준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매우 느리고 허접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자동차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었다는 게. 좀 더 발전한다면 지구의 자동차와 흡사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도착했네요.”
그녀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연구소 같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건물. 하얀색으로 도배되어 딱 봐도 ‘저 연구소입니다’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렉슬럼에게 세이렌이 왔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아. 마제(魔帝)님의 지인이신가요?”
그녀가 말없이 내게 보였던 것처럼 싱긋 웃자, 경비원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경비원이 오기까지 그가 말한 이명에 대해 생각했다.
‘마제? 마제라면 홀랜드가 싸웠다던…….’
분명 홀랜드는 마제에게 졌었다고 했었지 아마? 그래서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고. 결국 핀에게 져서 숲에서 도를 닦는 중이지만.
잠시 후, 건물 안에서 한 인물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다른 마족과 다르게 흰머리에 영화 속 마법사처럼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어머니! 정말 오랜만에 찾아오셨군요!”
으음?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할아버지가 세이렌에게 어머니라고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는지, 세이렌이 그에게 돈자루를 내밀며 말을 놓았다.
“오랫만이네.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런데…… 자. 여기. 우리 아이가 훔친 물건을 네게 팔아버렸어. 미안하지만 물건을 돌려주면 안 되겠니? 광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인데 말이지.”
“예? 아. 이런. 이 꼬마도 혹시 어머니가…….”
“얼마 전에 만났단다. 이젠 네 동생이야.”
“으윽…… 엄마. 저 노인네도 엄마 아들이었어요?”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베르제의 머리를 꾸욱 누르는 세이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보며 정신이 반 쯤 하늘로 붕 떠올랐다.
누가 봐도 2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저런 노인의 어머니라고? 혹시 저 노인은 인간이 아닐까? 그런데 머리카락이랑 수염은 희지만 뿔은 확실히 달려 있잖아? 게다가 베르제한테 형이라 부르라고?
“끄응. 또 어린 동생이 생겨 버렸구먼. 어머니께서 원하신다면…… 가져다 드려야죠. 안에서 쉬시지요.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냐. 일이 있어서. 간만에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그냥 갑옷만 빨리 가져다 줘.”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노인. 마치 어린아이를 부리듯이 그를 다루는 세이렌을 보며 나는 그녀가 정말로 그의 어머니가 맞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까 마족이다. 마족들은 개체마다 수명이 서로 다른 걸까? 어쨌든 인간이 아니니까…… 마족에 대해 잘 모르는 내 기준으론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노인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검은 비늘로 뒤덮인 하나의 묵빛을 띤 갑옷을 볼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으음…… 아쉽군요. 용의 비늘이 꼭 필요했는데…….”
“직접 가서 구하면 되잖아? 이제 남은 용족은 없으려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여야죠. 아! 그러고 보니…… 흐음. 구할 수 있긴 있겠군요.”
“거봐. 노력하면 다 구할 방법이 생긴다니까. 자. 어서 받아.”
세이렌이 노인에게 돈 주머니를 내밀었다. 노인은 받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밀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받아두시지요. 어머니.”
“……나 알잖아. 왜 그래? 화낸다?”
“끄응…… 역시 변하지 않으셨군요…… 그럼…… 대신에 언제든지 돈이 필요하면 제게 말씀하시지요.”
“알았어.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이야기를 끝마친 세이렌이 갑옷을 들더니 또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마치 미래에서 온 귀 없는 고양이 로봇의 주머니처럼,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크기임에도 갑옷은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말 필요할 때만 마법을 써야한다. 바로 지금처럼요.”
“하긴…… 갑옷이 있으면 우리를 못 업고 가겠네요.”
그녀가 다시 한 번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마치 오래된 인연처럼 그녀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설렜다.
세이렌이 베르제와 나를 안고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어가는 저녁 때라, 그녀의 말대로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들 나와 있지 말라니까. 밖에 나갈 때마다 그러면 어떻게 해.”
정정해야겠다. 아이들은 배고파서 밖에 나온 게 아니었다. 글썽거리는 눈매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아선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자. 그럼 저녁을 해야겠네.”
그녀는 진정한 어머니였다. 내가 모르는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고, 마제라 불리는 노인에게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연배도 있었다. 그녀가 몇 살인지 묻고 싶었지만, 첫 만남에 꽤나 실례되는 짓일 것 같아서 묻지 못했다.
마제라면 꽤나 대단한 양반이 아닐까? 그런데 왜, 베르제가 도둑질을 해서 돈을 생일선물로 줄만큼 가난하면서 손을 빌리려 하지 않는 걸까?
평범한 인간 따윈 무시해도 될 만큼의 힘을 가졌거늘, 그녀는 인간처럼 행동하며 인간답게 홀로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여기, 저녁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차려준 멋진 식사를 고아원의 아이들과 함께 나누며, 나는 처음으로 판타지 세계가 아닌 지구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잠들 무렵,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그녀의 첫마디는 내 예상대로였다.
“세계수님?”